35. 루터(Martin Luther)가 올린 교회개혁의 깃발(1517년)
타락한 로마교회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면죄부를 판매하던 중, 브란드버그의 감독이었던 알베르트가 마인츠의 대감독직과 할베르스타드지방의 감독직을 모두 확보하기위해 큰 빚을 내고, 이를 갚기 위해 교황에게 도미니크수도회의 말재간꾼인 요한 테첼을 면죄부 판매자로 임명해달라고 요청하고, 이에 교황이 수입의 절반을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건축자금으로 낼 것을 조건으로 이를 허락하였다. 면죄부 특사가 된 테첼은 알베르트의 교구도시를 돌면서 온갖 거짓이설로 사람들의 주머니를 훔쳤다.
그때 죄인은 선행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던 비텐베르그의 사제요, 교수였던 루터는 1517년 10월31일(만성전 전날) 테첼이 비텐베르그근처에 와서 면죄부판매를 하려고 할 때 [면죄부판매의 부당성과 행위구원을 주장하는 것과 교황의 베드로성당건축의 부당성등을 지적한] <95개의 주장>을 만성절을 맞아 많은 사람들이 순례하는 비텐베르그성(城)교회 정문에 붙였고, 이것이 확산되어지면서 교회개혁의 불길이 일었다.
그가 제시한 <95개조항>은 처음은 말쟁이 사제 테첼(1517년)과, 이어 라이프치히의 신학자 존 에크(1519년)와 논쟁을 했고, 결국 1520년 교황이 루터의 사상을 정죄하는 칙령을 내려 그의 저서를 모두 불사르고, 파문을 지시했는데, 그때 루터는 비텐베르그성의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교황의 파문서를 불태움으로서 로마교회와의 관게를 끊게 되었다. 1521년 교황은 루터의 출교를 명령하고 보름스회의에 불러 설득하거나, 주장을 관철하지 않을 경우 세속권세를 통하여 화형에 처하려 했지만, 도리어 교회분열과 전쟁만 촉발시켰고, 루터는 선제후 프레드릭3세에 의해 보호를 받으며 본격적인 교회개혁에 앞장서게 되었다.
36. 스위스의 개혁자 츠빙글리(Ulrich Zwingli)의 등장(1519년)
독일에서 루터가 개혁의 횃불을 밝힐 때 스위스에서도 개혁의 불길이 솟아올랐다. 그는 바젤과 베른에서 어거스틴을 연구하고,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은 츠빙글리였다.
1506년에 갈레루스교구의 사제로 10년동안 봉사하다 용병제도반대설교를 하고 목회지에서 쫓겨난 그는 1516년 아인지델런의 사제가 되어 그곳의 마리아상을 숭배하는 순례객들을 보고 우상숭배를 신랄하게 비판했고, 에라스무스의 헬라어성경으로 설교를 하면서 로마교황청의 문서가 아닌 성경본문으로 설교하는 전도자가 되었다. 그후 루터의 글을 접한 후 그의 입장을 동의하게 되었다.
그후 1519년 취리히에 옮겨갔을 때 공식적으로 로마교회가 정해둔 글을 읽기를 거절하고 본문설교를 시작하면서 로마교회로부터의 분리를 시작했고, 1520년에는 교황청으로부터 오는 생활보조금을 거절하고, 로마교회의 의식과 교리를 떠나 성경을 통해 깨달은 내용을 설교하였다.
그 후 로마교황청과 충돌하여 2번의 공개토론을 거치면서 로마교회의 잘못된 교리와 교황주의의 잘못을 공격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재현하는 로마교회의 미사를 폐하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만찬예식을 거행하였다. 이로서 그는 로마교회와 완전히 단절하였고, 새로운 교회를 세웠다.
그 후 츠빙글리는 타락한 직분자로부터 받은 세례와, 신앙고백이 없는 세례를 부정하는 재세례파와 단절하였고, 독일의 루터와도 성찬에 대한 이해의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나눠지고 말았다.
1531년 스위스의 로마교회에 속한 5개주동맹군이 취리히를 쳐들어왔을 때 군목으로 출전했다가 카펠에서 전사했고, 그의 제자 블링거가 취리히에서 교회개혁를 계승했다. 그리고 10년 후 제네바에서 위대한 개혁자 칼빈이 등장해 스위스의 교회개혁은 세계교회의 개혁으로 확산되어갔다.
37. 재세례파운동(Anabaptism)(1525년~)
루터와 츠빙글리의 교회개혁이 진행될 때 츠빙글리를 따르던 자들 중에 좀더 극단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무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도 본인의 신앙의사에 따라 다시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수 없는 유아의 세례를 반대하는 자들로, 재세례파라 불려졌다.
재세례파주의자들은 거룩하고 흠이 없는 교회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세상과의 단절을 추구하며 교회는 중생한 신자들의 교제여야 하고, 신앙은 성화로 나타나야 한다고 했다. 신앙의 정결을 위하여 제정을 엄격하게 분리하여 국가의 부름이나 공직을 거부하고, 교회 내에서도 감독이나 공의회같은 조직적인 교회체제를 거부하고 회중제도를 옹호했다.
이로 인해 재세례파교회 안에서는 새로운 게시를 주장하는 많은 이단들이 일어났으며 일부다처제를 옹호하는 지도자들도 나타나 개혁자들뿐 아니라 로마교회의 박해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생활의 순결과 신앙의 열정을 좇는 개신교 신자들이 재세례파에 들어가기도 했다.
한편 네덜란드의 메노시몬스라는 온건한 재세례파의 지도자가 있는데, 후에 그의 가르침을 따른 자들을 ‘메노나이트’라 불렀고, 북미와 러시아로 이주하여 지금도 메노나이트파와 형제교회파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한편 16세기 개혁교회신자들은 이들 재세례파와 자신들이 다르다는 것을 신앙고백문서들을 통하여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38. 영국교회의 ‘교회수장령’ 선언(1534년)
교회개혁의 샛별인 위클리프와 루터와 츠빙글리의 영향을 받은 영국교회이지만, 개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정치적인 동기에서 교회개혁이 일어났다. 그런 이유로 영국에서는 참된 개혁교회가 세워질 수 없었다.
헨리8세는 원래 루터의 교리를 반대하고 로마교회의 7성례를 옹호하는 글을 썼던 자인데 아버지의 정략에 의해 자신의 죽은 형의 아내인 스페인의 캐서린과 혼인하였다가, 앤 볼린과의 결혼을 위해 형수 캐서린과의 혼인은 불법이요, 무효라는 판결을 교황에게 얻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교황이 답변을 속히 하지 않자, 당시 캔트베리의 대주교였던 토마스 크랜머가 신학자들의 의견을 통해 ‘헨리와 형수 캐서린의 혼인은 하나님의 법에 위배된 것이라 무효다’는 판결을 내려주어 헨리는 교황의 승인없이 캐서린과의 결혼생활을 끝내고 앤과 결혼을 했다.
그후 교황이 헨리에게 출교로 위협을 하며 결혼무효를 명하자 영국의회가 ‘영국국왕이 영국교회 최고의 머리’라고 하는 수장령을 선언하고, 이에 교황 클레멘트가 헨리8세를 재혼의 이유로 출교함으로서 영국교회와 로마교회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헨리8세는 개신교의 입장을 취하지도 않았고, 그의 신앙은 철저히 로마교회의 교리를 따랐지만, 자신의 캐서린과의 이혼을 도와준 크랜머를 계속 그의 곁에 두었는데, 크랜머는 헨리8세가 죽은 후 에드워드4세를 도와 영국교회 안에 남아 있던 로마교적인 6개항을 폐기하고 개혁주의입장을 수용하여 향후 영국교회의 개혁을 주도했다.
그러나 영국교회는 로마교회의 흔적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해, 지금도 ‘강력한 감독정치와 펠라기안적인 교리를 가진 고교회’와 ‘개신교적 39개조항과 공동기도서를 가진 저교회’로 나뉘어져 있다. 이 두 교회의 정식이름은 영국국교회이며, 흔히 성공회라고 부른다.
39. 제네바의 개혁자 요한 칼빈(1509-1564년)
1509년 프랑스 노용에서 태어난 칼빈은 1533년 친구 니콜라스 콥의 파리대학 총장취임식 연설문을 쓸 때 루터의 사상과 에라스무스의 글이 인용한 이유로 망명의 길로 올라 바젤을 가는 길에 제네바를 들렀다가 그곳에서 제네바의 교회개혁을 이끌 던 목사 파렐을 만나 그의 추상같은 저주의 말을 듣고 자신의 여행을 포기하고 제네바에서 교회개혁에 참여한다.
제네바 성피에르교회의 목사와 교사로 봉사하면서 교회정치조례를 마련하고 교회의 권징이 당회의 의무라고 주장하다가 제네바 시의회와 마찰을 일으켜 3년만인 1538년 동역자 파렐과 함께 제네바에서 추방당해 스트라스부르에 가서 그곳에서 마틴부쳐의 도움으로 작은 프랑스 개신교회 피난민들의 목사로 봉사하면서 부쳐와 함께 예배질서를 비롯한 교회질서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러던 중에 제네바시로부터 다시 돌아와 달라는 간절한 초청을 받고 고민하다가 ‘주님! 주님의 일을 위해 즉시 저의 심장을 바칩니다’는 비장한 결의와 함께 제네바에 돌아와 사역을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교회의 치리회를 복원하고 부도덕한 생활에 젖어 즐겨오던 자들에게 성찬예식 참여를 금하는 권징을 시행하면서 무서운 저항을 맞았지만, 15년에 걸친 힘겨운 싸움을 통해 성찬상의 성별을 지켜냈고, 1555년에 가서야 안정을 얻게 되었다. 당시 스코틀랜드의 박해를 피해 제네바에 와 있던 죤 낙스는 제네바교회의 경건생활을 보면서 ‘사도시대이후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학교’라 감탄하기도 했다.
제네바에서 격렬한 신앙의 투쟁과 쉼없는 봉사를 벌이던 중 몸이 쇠약해져 1564년 55세의 나이로 별세한다. 그는 자신의 장례식을 일반인과 동일하게 소박하게 치러줄 것과 그의 무덤이 성인들의 무덤처럼 우상숭배지가 되지 않도록 JC라는 이름의 약자를 적은 비석하나만 남기도록 했다. 이는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그의 이름은 드러나지 않기를 바랐던 그의 아름다운 삶의 흔적이다.
40. 스코틀랜드의 개혁자 죤 낙스(1513-1572)
죤 낙스는 스코틀랜드의 전쟁과 개혁으로 혼란한 시기에 1528년 복음진리를 전파하다가 화형을 당하는 패트릭 해밀턴을 보고 큰 충격을 받고, 1540년 사제가 된 후 다른 개혁의 옹호자인 조시 위시하트가 화형당할 때 여기에 대항한 위시하트의 제자들이 성앤드류대감독인 비튼을 살해하고, 성앤드류를 요새로 삼고 로마교황군과 싸울 때 위시하트의 제자들과 합류하여 성앤드류의 목사가 되었다. 그러다가 비튼대검독 살해사건 때문에 파송된 프랑스군대에 의해 프랑스로 붙잡혀가 3년동안 노예생활을 하였고, 그 후 1546년 영국에 돌아왔을 때 피의 여왕 메리의 개신교박해가 시작되어 1556년 제네바로 갔다가 그곳에 있는 영국피난민교회의 목사로 3년강 봉사하면서 칼빈의 가장 친근한 제자중 한 사람이 되었다.
1559년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와서는 프랑스왕실과의 결혼문제로 개신교가 위기를 맞을 즈음에 엘리자베스여왕의 도움으로 영국군이 개신교를 돕는 일이 일어나고, 결국 개신교를 핍박하던 메리여왕이 죽음으로 1560년 칼빈주의 신앙고백과 장로교회정치체재를 수용하는 교회법을 만들어 개신교의 성공적인 꽃을 피우게 했다.
그는 스코틀랜드교회를 개혁하는데 사용된 하나님의 큰 일꾼으로 스코틀랜드의 독립과 장로교회를 설립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고, 그를 통한 칼빈주의개혁운동은 스코틀랜드뿐 아니라 영국의 청교도운동이 일어나게 하여 신대륙과 온 세계에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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