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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산책(24-29장)-고충석
최성림 2014-08-02 추천 1 댓글 0 조회 303

교회사 산책
발표자-고충석

24. 캔터베리의 대감독 안셀무스(Anselm, 주후 1033-1103년)

안셀무스는 이태리 출신으로 1094년에 영국 캔터베리의 대감독이 되었는데, 그는 특별히 중세 초기 스콜라철학을 주도한 큰 인물이었다.

그는 1033년 이테리 알프스의 롬바르드 농장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15세 때 수도원에 들어가고자 했으나 아버지가 법을 공부하기 원해 이를 거절하고 여러 해 동안 유럽을 배회했다.

그 후 알프스를 넘어 프랑스에 들어가 1059년에 노르망디의 백(Bec)에 있는 수도원 학교에 입학했다(이 시대에는 총명한 젊은이들이 삶의 가치를 찾아 수도원을 많이 찾았음).

백 수도원의 저명한 교사인 랑프랑크의 권유로 1060년에 수도사의 서약을 하게 되고, 1063년에는 수도원의 부원장이 되었다.

1066년 영국을 정복한 윌리엄의 요청으로 영국으로 간 랑프랑크를 대신하여 벡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랑프랑크는 캔터베리 대 감독이 되었다.

이후 많은 저술활동과 제자 양성으로 유명해지고 몇 차례 영국을 방문하게 되면서 윌리엄 2세 때 캔터베리 대 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안셀무스와 영국 왕과의 사이는 순탄치 않았다. 안셀무스는 교황의 편에 서서 왕의 성직자 임명에 반대하였고 이 일로 영국에서 두 차례 추방당하기도 하였다.

두 차례의 유배 후 남은 생애를 캔터베리 대감독으로 지냈다.


안셀무스는 철저한 실재론자로서 보편이라는 것이 현실에서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의 실재론 견해에 따르면 신은 사람들의 머릿속 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존재한다. 안셀무스는 신의 존재를 다음과 같은 존재론적 방법을 통하여 증명하였다. 만약 어떤 사람이 '무엇보다도 가장 큰 존재인 신'이라는 말을 이해했다면 이는 우선 그의 머릿속에 존재한다. 이제 그가 '무엇보다도 가장 큰 존재인 신'이라는 개념이 자신의 머릿속에만 존재한다고 주장하면 옳지 않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존재는 신'이므로 신은 머릿속을 뛰어넘어 현실에도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이론이 정통적 신앙과는 모순이 된다는 비난을 받았을 때 그는 신앙이 이성을 올바로 사용하도록 이끈다고 응수했다.

그러나 그는 합리적인 방법을 강조함으로서 성경을 통해 그의 백성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단순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과 그의 백성의 거리를 멀어지게 만들었다.


안셀무스는 “하나님이 왜 사람이 되었는가?"라는 글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의 교리를 다루고 그의 유명한 속죄의 교리를 명료하게 나타내고 보상설을 반박했다.

(*보상설 : 아담과 하와가 타락할 때 그들이 자신의 인간성을 사단에게 넘겨주게 됨으로 하나님은 사단으로 하여금 이를 가지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해 값을 지불하고 다시 얻어 오셨다. 그러나 사단은 예수를 죽음가운데 얽매여 놓을 수 없었다. 사단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배상으로 여기므로 공정한 거래가 사단과 하나님 사이에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안셀무스는 인간의 죄는 마귀에게 진 빚이 아니고 하나님께 진 빚이요,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상한 하나님의 명예에 만족을 줄 것이라고 그의 책에서 주장했다. 그의 책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이 범죄함으로 우주의 주이신 하나님이 그의 영광에 손상을 입었다. 하나님은 우주의 도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사람을 용서해 주기 원하나 죄를 간과할 수 없다. 죄에 상응하는 속죄가 있어야만 한다. 사람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사람만이 속죄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스스로 속죄를 할 자격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 결국 하나님이면서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가 속죄를 이루었다”(속죄 만인설, 혹은 속죄론)


안셀무스는 스콜라 철학의 선구자로 성경을 잘 알았지만 인간 논리의 힘을 사용하기를 원했고, 성경에 기반을 둔 신앙을 제쳐두고 논리적으로 교리를 증명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스콜라 철학은 차츰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흐리게 하는 어두운 시대로 인도하였다.

25. 카노사(Canossa)성에서의 교황과 황제(주후 1077년)

*동방교회 : 황제가 총주교를 임명하고 공의회를 소집함으로 교권을 지배, 교회가 속권에 복종.

*서방교회 : 황제가 로마를 떠남으로 남긴 정치적 공백을 로마의 교황이 채우게 됨에 따라 교황이 속권까지도 행사. 이후 로마의 교황들은 제왕보다 우위한 입장을 차지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

교권과 속권의 충돌의 절정은 11세기 교황 그레고리 7세와 황제 헨리 4세 때이다.

원인은 교황과 황제 중 누가 대감독을 임명하느냐의 문제였다.

독일의 황제 헨리는 제국 내 대적들을 제압하고 그의 자리가 공고해 지자 교황의 뜻을 거슬러 밀란의 대감독을 스스로 임명하였다.

이에 교황이 그를 질책하는 서한을 보냈으나 그는 보름스에서 감독회의를 소집하고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였다. 교황은 이에 헨리를 파문하였다.

황제 헨리에게 호의를 갖지 않았던 일부 귀족들이 이를 계기로 반기를 들어 황제가 1년 안에 교황에게 사면을 받지 못하면 폐위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 일의 논의를 위해 아우스부르그로 초청받은 교황을 중도에 만나 사면을 받아야만 했던 황제는 한 겨울에 알프스 산맥을 넘어 카노사 성에 머물고 있던 교황을 찾아가 성문 앞에서 사흘 밤낮 동안 맨 머리, 맨 발로 서서 참회자의 모습을 보이며 교황에게 사면을 호소하여 사면을 얻었다.

(==> 교권 앞에 속권이 수욕을 당한 사건)

이후 헨리는 기회를 엿보며 먼저 제국 내 적대 세력을 평정하고 무적의 최강자로 선후 다시 교황과 맞섰다.

이에 교황은 1080년 3월 로마에서 회의를 열고 황제를 다시 출교하고 폐위를 선언하였다.

황제 역시 그해 6월 감독회의를 소집하여 교황을 폐위시켰다.

1081년 황제가 로마를 점령하고 로마의 시민들과 추기경들의 상당수가 황제의 편에 서게 되고 결국 1084년에 황제가 선화하는 대감독 비베르트를 교황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다.

교황은 황제에게 제관을 씌워주었고 그레고리는 결국 망명자가 되어 1년 후 세상을 떠났다.

이렇듯 중세 교회는 교권과 권력에 집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훼손시켰다.


26. 제1차 십자군(주후 1095년)

638년 이슬람이 유대 땅을 점령한 이후에도 예루살렘을 순례하는데 큰 방해가 없었으나 1071년 셀주크 투르크족이 소아시아와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 순례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로마의 교황인 그레고리 7세 때 콘스탄티노플의 황제인 미가엘 7세로부터 셀주크 투르크족을 격퇴하는 일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독일 황제 헨리 4세와의 심한 갈등으로 아무런 결과를 내지 못하였다.

그 후 1088년 교황 우르반 2세 때 동방 제국의 황제 알렉스우스 1세로부터 이슬람 터키족의 위협으로부터의 도움 요청을 받았다.

이에 교황은 첫째, 단절된 동방교회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기회와 둘째, 하찮은 일로 서로 다투고 있는 군주들의 관심을 돌려 서로 연합시키고자하는 목적으로 도움을 줄 것을 약속하였다.

교황은 공의회를 소집하여 십자군 원정의 필요성을 설교하고 나아가 세금면제와 죄의 사면, 그리고 영생의 면류관을 약속으로 십자군을 모집하였다.

십자군은 세 개의 큰 군대로 편성되었는데 그 구성원들은 단순한 성지 탈환의 종교적 목적이나 경제적인 이득의 목적으로 모였다.

세 십자군 집단은 1096년 8월에 출발하여 1099년 7월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으며 같은 해 8월 이집트 원군까지 격파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서 대학살을 감행하였고 ‘포로를 잡지 말라’는 전략 아래 적군을 다 살해하였다.

이후에도 7,8회의 십자군 동원이 있었으나 1차 때와 같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고 결국 1244년 다시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장중에 들어간 후 다시 회복되지 못하였다.

십자군 전쟁은 국가 소관인 전쟁을 교회가 주도한 것이다. 이는 교회의 영역 밖의 일에 교회가 앞장선 것으로 이를 통해 교황의 지휘가 더욱 강화되었고 십자군이 교회 내 이단자에 대한 정벌과 종교 재판에도 도입되게 되어 중세 교회를 더욱 어두운 시대로 인도하게 되었다.

27. 파리대학과 옥스퍼드 대학의 설립(주후 1200?년)

12세기 이전의 고등교육은 대성당이나 수도원 안에 있는 학교에서 하였다.

이러한 학교 교육은 12세기에 가장 번성하였는데 스승들의 수가 많아지면서 그들에게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신학의 경우 프랑스 파리와 영국의 옥스퍼드가 가장 유명했다.

오늘날 대학을 상징하는 '유니버시티(university)'는 파리에서부터 나온 단어인데, 원래 라틴어의 '유니베르시타스(universitas)'에서 유래된 것이다. 처음에 그것은 길드나 자치도시에서 단순히 '다수·복수·사람들의 집합체' 또는 '합법단체·법인단체'를 의미했다. 이처럼 여러 단체에 적용되었던 유니베르시타스는 13세기 초에 이르러 '학생조합 또는 교수조합' 등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파리의 로테르담 대성당학교는 일찍부터 이름난 교사들이 많은 학생을 끌어 모았다.

1200년에 프랑스 왕 필립 2세가 이 대학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고 교사와 학생들은 그 시대에 사제가 누리는 것과 같은 사회적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의 자세한 설립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1133년 파리대학에서 신학자 뷜랑이 초빙되어 강의한 것을 대학의 기원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1168년 무렵, 파리대학교에서 영국 학생들의 입학을 불허하자 파리대학을 빠져나온 영국인 학생들이 귀국해서 이곳에 옮겨오는 한편, 헨리 2세의 칙령으로 해외유학이 금지된 학생들도 여기에 들어오면서 대학의 기초가 더욱 확고해졌다.

13세기는 학문의 전성기로 이러한 대학들은 14세기 이후 문예부흥과 종교 개혁을 초래하게 하는 중심 기관이 되었다.


28. 어둠 속의 빛 왈도파(Waldenses, 주후 1170년)

중세를 ‘암흑시대’라 처음 부른 사람은 16세기 로마 카톨릭 교회 사학자인 바로니우스였다.

왈도(Waldo)는 이러한 시대에 빛으로 등장한 평범한 신자로 원래는 프랑스 리용의 부유한 상인이요 평범한 신자였으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실천에 옮겨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성경 말씀대로 두 벌 옷을 갖지 않고 맨발로 걸으며 주는 대로 먹으면서 복음 전파에 나섰는데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그들은 모두 왈도의 생활의 본을 따랐고 둘씩 짝을 지어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이에 리용의 대감독은 저들에게 설교 금지령을 내렸으나 왈도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설교를 계속하였다.

이들은 결국 출교를 당하게 되었으나 이후 더욱 힘을 얻어, 속화된 교회에 실망한 많은 기독교인들과 경건한 종단도 이들에게 합류하게 되었다.

교황 이노센트 3세 때 이단들을 향한 십자군 정벌에서 왈도파도 정벌 대상이 되어 무서운 박해를 당하였다. 결국 왈도파는 이태리와 프랑스 접경 지역인 알프스 산록으로 피해 가서 살게 되었다.


왈도파는 비록 복음에 대한 이해가 매우 얕고 율법적인 면이 있었지만 이단이 아니라 암흑시대 때 성경대로 살고자 힘쓴 정통 신앙인으로 그 시대를 밝힌 빛이었다. 왈도파는 종교 개혁 때가지 지속되어 왔다. 현재도 로마 교황청 가까운 위치에 신학교를 가지고 있으며 이태리를 중심으로 세계에 70여 교회를 가진 소규모 공동체로 교회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29. 제4차 라테란 공의회와 화체교리(주후 1215년)

라테란 궁은 로마 바티칸시의 교황이 거주하는 곳으로 7세기에서 18세기까지 14번의 공의회가 있었다. 그중 세계성을 띤 공의회는 다섯 번으로 보는데 이를 라테란 공의회라 부르고 그중 제4차(제14차 에큐메니컬 공의회)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노센트는 가장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교황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중앙집권을 공고히 하고 교황권을 크게 강화했다. 이전의 교황들도 일찍부터 베드로의 후계자요 대리자임을 자체했는데 이노센트는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의 교황의 권리를 주장하고, 교황을 신의 위치의 반쯤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는 교황을 “하나님과 인간의 중간에 선 중재자요, 하나님보다 낮으나 인간보다는 높다.”고 했다. 그 결과 그는 제왕들을 파문하기도 하고 이단을 척결하기도 했다.


이노센트는 1215년에 제4차 라테란 공의회를 소집하고 자기의 이념을 현실화 했다.

공의회는 온 교회의 통일된 생활을 위해 모든 신자들이 매년 한 번씩 의무적으로 사제에게 나아가 죄를 고백하고(고해성사), 성찬에 참여할 의무를 법으로 정했다. 또 로마 교회와 일치하지 않는 모든 교리는 이단으로 간주하고 이를 위해 종교재판을 도입했다. 또 성직자 생활에 대한 규율을 마련하고, 유대인이나 이슬람과의 혼합 결혼이나 상거래를 금하고 비기독교인들은 구별된 옷을 입거나 표를 달고 자나도록 했다. 이런 조처가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게토지역(ghetto)을 생겨나게 했다.


이 공의회가 결의한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화체설’교리를 교회의 공식 교리로 받아들인 일이다. 이 교리는 성찬 예식 때 사제가 성별하는 순간 떡과 포도주는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희생의 살과 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별함으로 떡을 그리스도의 성체로 변화시키는 사제는 신비한 이적을 행하는 자로 초인적 권위를 인정받게 되어 있다.


동방 그리스교회는 이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개혁교회는 이 교리를 우상숭배로 본다. 상당수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도 이 교리의 타당성에 관하여 의혹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카톨릭 교회는 아직도 이것을 공식적인 교리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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