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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산책(18-23장)-윤지혜
최성림 2014-08-02 추천 1 댓글 2 조회 213

교회사 산책
발표자-윤지혜

18. 그레고리1세

‘대 그레고리’로 잘 알려진 그레고리1세는 굉장히 자학적이고 야심적인 계급주의자로서 유능한 학자며 타고난 정치인.

그의 눈부신 맹활약은 앞으로의 후계자들을 위한 하나의 모범이 되었으며 이 사람이야말로 형세의 요구에 적합한 거목으로 교황이란 직임에 합당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의 업적으로는 교황제도의 수립 및 활동, 로마교회의 세력 확대, 영국 선교사 파송, 교회음악과 예배의식 제정, 교황의 세속권 기반 조성, 외교 강화 등이 있다.

- 어거스틴의 맥을 이어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음을 가르치나

   자신은 바로 그 교회의 머리.

- 교회 내의 그림과 성상의 사용을 도입, 장려.

   (단, 경배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 연옥신앙을 확증, 공식 반포

- 원죄는 세례를 받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지만 구원 이후의 죄는
   고행 및 성찬으로 속상.

-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반복. 희생제사로서의 의미.

※ ‘하나님의 종들의 종’ - 베드로의 계승자,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


19. 보니페이스

영국 출신의 보니페이스는 게르만 부족 내의 로마교회 수립에 지대한 공을 세운 한 사람으로 유능한 학자며 탁월한 행정가.

그는 로마감독에게 충성을 서약할 정도로 추종적이었으며 교구 건설, 교회 및 수도원 설립 등등의 봉사를 로마교회를 위해 수행.

투링가, 해세 등지에서의 그의 포교적 활동은 대단히 성공적이었으며

732년에 대감독으로 임명, 더 큰 영향력을 행사.

753년 대감독직 사임 후 프리스에서 회귀자들의 회심을 도왔으며

755년 보르네 강 부근에서 순교를 당한다.


20. 이슬람의 유럽 진입을 막은 뚜르전투

이슬람교의 등장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당시 상황에 엄청난 파장을 가져왔다.

교주 무함마드는 환상중에 가브리엘로부터 알라의 계시를 받아 기록으로 남겨(코란) 메카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나 자신과 추종자들에 대한 박해로 인해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메카를 떠나 메디나로 도피하게 된다(622). 이 사건은 ‘헤지라’라고 불리우며 모슬렘의 기원이 된다.

그의 신도들에 의하여 이슬람이라 불리우는 그의 종교는 헤지라 89년만에 세계 전역으로 뻗어나갔다.

곧 시리아와 팔레스틴, 지중해 일대를 침투해 들어갔고 나중에는 지브롤터 해협을 거쳐 스페인과 이베리아 반도에 진출,

동쪽으로는 인도와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였다.

스페인을 정복한 이슬람군은 732년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크족 영역에까지 침투했으나 이때 프랑크 궁재 찰스 마르텔이 이슬람군의 북진 진입을 저지함으로 유럽은 그리스교로 남을 수 있었고 그들 세력은 철저히 패하여 물러나게 되었다.


21. 샤를마뉴 대제의 대관식

콘스탄틴 대제가 로마제국 내에서 신교의 자유를 선언한 데 이어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됨에 따라 교권과 세속권간에 갈등이 빚어졌다. 8세기 중엽에 교황 측이 ‘콘스탄틴의 증여’라는 문서를 맹약으로 제시함에 프랑크 왕 페핀이 이를 추종, 롬바르디아 족에서 라베나를 취해 교황에게 증여함으로 교황의 세속적 주권이 시작되었다. 771년에 샤를마뉴가 통치자로 등극하면서 이후 30년간 롬바르디아족, 색슨족, 바바리아족 등을 차례로 굴복시키며 정복한 땅을 로마교회에 증여, 내부 반대파들의 잇다른 비난 속에서도 교황을 보호한다.

이에 대한 공로를 인정, 800년 성탄절날 교황은 샤를마뉴에게 황제의 관을 씌운다.

이것은 샤를마뉴가 프랑크의 왕일 뿐 아니라 서방 세계의 최고 통치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실상 교황은 이로 말미암아 교회제국을 목표했으나 황제 샤를마뉴로서는 제국이 교황의 지배 아래 놓이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에게 교회는 국가의 한 영역으로, ‘교황 위의 황제’ 로서의 정립을 확고히 하기 위해 교회적으로, 교육적으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샤를마뉴는 역사상 그 어떤 통치자보다 그 시대의 많은 것을 지배한 자로 ‘대제’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22. 러시아 왕자 블라디미르의 개종

블라디미르는 악명높은 이교도로, 여러 부인과 궁녀들을 거느린 방탕한 통치자.

전통에 의하면 그의 백성이 만족하며 살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를 고심 중에 종교를 택하기 위해 종교 대표자들과 논의하다가 특사들을 파견,

특사들의 보고를 듣고서 ‘예배의식의 화려함’에 끌려 그리스정교로 결정.

988년 블라디미르가 세례를 받으면서 그의 열두 아들을 포함한 제국이 기독교를 받아들인다.

그의 개종은 그의 생활 방식에 변화를 가져다주었으며 국가적으로도 새로운 문명의 지평을 열어놓았다.


23. 동·서방 교회의 분열

동?서방 교회가 분열에 이르게 되기까지는 많은 이유가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성령의 나오심에 대한 교리 문제였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였던 포티우스가 서방교회의 필리오케 첨삭과 관련하여 신성의 일치를 파괴하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 그로 그는 동?서 교회의 분열에 대한 전조를 보인 인물이 되었다.

포티우스가 죽은 후 163년만에 동·서 교회의 대 분열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 분열을 가져온 인물들은 교황 레오 9세와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인 미카엘 케루라리우스였다.

미카엘 케루라리우스 총주교는 관할교회를 제국정부로부터 독립시키고자 했으며 동시에 자신의 위치를 교황과 동등한 위치로 끌어올리길 원했다. 이를 위해 로마 교황에게 저들이 지닌 비정통성을 공격하며 나아가 콘스탄티노플 내의 라틴 교회를 폐쇄한다. 이에 대하여 교황은 콘스탄티노플에 특사를 파견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으나 결렬되었고 분노한 교황의 특사들은 케루라리우스 측에게 파문을 선고, 케루라리우스는 교황과 특사 측을 출교함으로 보복한다. 이로써 동?서 교회는 결정적으로 분리되었고, 둘은 아주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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