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독서발표 김용대(교회사 산책 13-17장)
13. 제왕을두려워하지 않은 감독 암브로스
374년 밀란에서 감독 옥센티우스가 별세를 하고 새로운 감독이 필요한 상황이였습니다. 옥센티우스는 니케아 공의회로부터 정죄를 받은 아리우스의 추종자였습니다. 새로운 감독을 세움에 있어서 정통파와 아리우스파가 싸우게 될 때 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암브로스가 등장했습니다. 그는 성경과 교부들을 열심히 연구하고 매일 설교했습니다. 니케아 정통의 열렬한 지지자로 아리우스 이단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아리우스파는 황제 콘스탄티우스가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니케아의 정죄를 받았지만 그 이단을 상당수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황제 발렌티니안의 어머니 황후 유스티나는 암브로스에게 밀란의 교회당 가운데 이단 아리우스파에게 넘겨줄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단에게 교회당을 양도해 줄수 없었고 결국 황실과 싸워 승리를 거두웠습니다.
황제 데오도시우스는 니케아신경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암브로스 감독과 친교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황제 데오도시우스가 교회의 권징을 받을 사건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시민들이 무거운 세금에 반대하여 지방의 지사를 살해했고 황제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어린이를 포함해 7천명을 학살하게 되었습니다. 암브로스는 이 지나친 학살을 지적하고 이에 대응하는 참회의 모습이 보일때까지 출교를 선언했습니다. 황제는 그 치리에 겸손하게 응하고 참회를 했습니다.
교회가 황제로부터 박해를 받았던 것이 이로 인해 교회와 제국이 전혀 다른 관계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서방교회의 위대한 4명의 교회교사가 있었습니다. 제롬, 어거스틴, 그레고리, 그리고 암브로스입니다. 암브로스에게 감화받은 사람이 어거스틴입니다. 어거스틴은 마니교에 빠지고 로마의 이교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정치적인 이유로 어거스틴은 밀란의 교회에 교리반에 참석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암브로스에게 가르침을 받고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암브로스 감독은 교회사에서 예배의식과 찬송작가의 선구자로 꼽히고 있습니다. 암브로스 예배의식과 발라드 격조의 찬송은 천오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유명합니다. 감독 암브로스는 실로 대 설교자요 실천적인 신학자이며 진리에 양보가 없는 대담무쌍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14. 힙포의 감독 어거스틴의 개종
초대교회 최고의 신학자 어거스틴은 불신자 아버지와 크리스찬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습니다. 수사학자가 되기 위해 카르타고에서 공부했습니다. 19세때 키게로의 저서를 통해 선과 진리를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 성경을 연구했으나 만족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진정한 만족을 얻기 위해 마니교에 심취했습니다. 마니교는 이 세상을 빛과 어두움 선과 악이 투쟁하는 곳이라고 가르치는 이원론 체계를 가진 종교입니다. 그러나 9년간 마니교에서 있었지만 만족할 만한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밀란의 황실 수사학교사로 임명을 받아 밀란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암브로스를 만나게 되고 그에게 가르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품고 있는 이념과 생활사이에 큰 간격이 있음을 느끼고 자신의 무력함을 탓하고 있을 때 한 어린이의 고함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것을 들어 읽어 그것을 들어 읽어” 그는 바로 옆에 있는 바울서신의 폈습니다. 그 말씀은 로마서 13:14절 말씀이였습니다.(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말씀을 읽는 순간 마음의 평화가 오고 죄를 극복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됨을 느꼈습니다. 387년 밀란에서 아들과 함께 암브로스 감독으로부터 세계를 받았습니다. 그는 세례를 받고 그의 출생지인 타가스테를 향했습니다. 고향으로 가는 도중에 어머니의 죽음과 아들의 죽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도원을 세워 금욕생활을 할것을 결심하고 북아프리카 알제리아에 있는 힙포로 갔습니다. 391년 반강제로 사제로 세움을 받게 되었고 감독 발레리우스가 별세한 후 40년 동안 감독으로 봉사했습니다. 그러다 반달족의 침입으로 430년 8월 28일 별세했습니다.
어거스틴은 두가지 큰 논쟁에 관련이 있습니다.
첫째, 도나티스트파 : 성경을 넘겨주고 배교했던 사제들의 직분과 그 세례는 무효라는 주장에 어거스틴은 성례의 효과는 시행자의 덕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께 있다고 도나티스트파의 주장에 반대했습니다.
둘째, 펠라기우스파 : 영국도서에서 온건하고 학식이 있는 수도사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원죄로 인해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사람의 구원이 인간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어거스틴은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부패성이 오게 되고 오직 하나님 은혜로 용서를 받는 다고 주장했습니다. 후에 종교개혁자들은 오직믿음 오직 은혜의 신학의 본질을 어거스틴의 신학으로부터 배우게 되었습니다.
15. 황금의 입을 가진 목사 크리소스톰
서방제국에 위대한 설교자 암브로스가 있었다면 동방에는 유능한 설교자 존이 있었습니다. 크리소스톰이란 이름은 ‘황금입“을 의미하는 것으로 후에 그에게 붙여진 별명입니다.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아래서 자랐습니다. 어머니는 훌륭한 스승을 택하여 아들 존에게 수사학과 법률학을 공부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의 성경해석방법은 문자적.문법적으로 해석하는 안디옥 학파의 전통을 따라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며 설교했습니다. (풍유적해석은 알렉산드리아 학파) 그는 안디옥에서 큰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397년 제국동방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자리에 황제 아르카디우스는 황금의 입 존을 감독으로 선택했습니다. 그의 설교는 직설적이고 강력한 설교였습니다. 부도적하거나 느슨한 생활을 하는 사제나 지나치게 화려한 의복을 입은 고위층 여성들에게 말씀으로 일침을 가했습니다. 이에 황후 유독시아는 자신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알렉산드리아 감독은 콘스탄티노플에 와서 ’떡갈나무‘라 불리는 공의회를 소집하고 존을 정죄하며 면직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전할 설교자가 필요했고 다시 그를 복직하게 되었습니다.
황후가 은 동상을 만들어 교회당 가까이 세우게 되었을 때 존은 제막식을 담대하게 정죄했습니다. 황후는 이 일로 존을 큰 원수로 보았고 부활절예배 때 군대를 투입해 예배를 중단시켰습니다. 그리고 존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죽이기 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키커서스라 불리는 땅에 유배를 보냈습니다. 유배지에서도 존은 교회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서신으로 권면하며 교회를 세우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그래서 동방의 황제는 그를 세상이 모르는 더 먼 곳으로 유배를 보내기로 했고 407년 피티우스로 옳기는 과정에 죽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문자적.문법적으로 해석하는 안디옥의 방법을 한층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는 밀란의 암브로스와 함께 세상의 통치자들 앞에서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라고 담대하게 선언한 종들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16. 칼케돈 공의회 제 4차 에큐메니컬 공회
오늘날 교회가 믿고 고백하는 중요한 교리들은 여러 세기에 걸친 토론과 교회 공의회의 수용을 통해 전해져 내려온 것입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논란을 해결했습니다.
시리아의 감독 아폴리나리우스는 니케아신조를 따라 예수님의 신성을 믿었지만 인성에 대한 문제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부패하고 육신은 욕만의 지배를 받는 다고 생각한 그는 로고스가 인간 예수의 마음에 들어오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가졌지만 인간의 마음은 갖지 않았다고 함으로써 예수님의 완전한 인성을 부인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공의회를 소집했습니다. 이 공의회에서 아폴리나리우스의 사상이 정죄되고 니케아 회의의 결정을 재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제 2차 에큐메니컬 공의회였습니다.
이에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인 네스토리우스가 아폴리나리우스의 이단을 거절하면서 다른 이설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예수 안에 신성과 인성이 병존해 있다고 가르치고 인간이 성전안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신 그리스도가 인간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결과 신인양성이 분리되어 있다고 본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인성의 어머니이지 신성의 어머니는 아니라고 하여 당시 마리아에게 붙여져 온 데오토고스란 호칭에 반대하고 대신 그리스도의 인성의 어머니라고 불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에 황제 데오도시우스2세는 431년 에베소공의회를 소집하여 이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이것이 제 3차 에큐메니컬 공의회입니다.
‘예수안에 신인양성이 완전히 나누어져 있다면 십자가 위에 수난을 당한 것은 그의 인성이 이었다고 밖에 볼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우리들을 죄에서 구원하신 구주일수 없게 됩니다. 네스토리우스(경교)는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지만 그는 로마제국 밖에서 많은 추종자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네스코리우스파는 동방으로 퍼져 850년 중국(당나라)에 까지 전했습니다. 중국에서는 경교라는 이름으로 큰 교회당까지 건축하였습니다.
삼위일체 교리와 그리스도의 양성교리문제는 100년에 걸쳐 세 번의 세계적 공의회가 모여 아리우스 아폴나리우스, 네스토리우스의 이단설을 정죄했지만 이에 대한 교리적 논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르키안 황제는 451년에 콘스탄티노플 건너편에 있는 칼케돈에서 공의회를 소집합니다. 이는 제 4차 에큐메니컬 공의회로 지난 어느 공의회때보다 많은 400명 이상의 감독들이 참석했습니다. 이 회에서 알렉산드리아의 디오스크루스는 지난 에베소 회의때 비행 때문에 출교를 당했습니다. 논란이 되어 온 교리문제에 있어서 이 공의회는 로마의 대주교 레오가 파송한 특사들이 제사한 레오의 그리스도의 양성에 관한 성명서를 거의 그대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 중요한 내용은 그리스도는 혼합되지 않고 변함이 없으며 분열되지 않고 분리되지 않는 양성을 가지신..참된 하나님이시고 참된 사람이라는것입니다.
칼케돈의 정의로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으로 완전한 신인양성을 가지신 구주라는 성경적 교리의 마무리를 짓게 되었습니다.
17.베네딕트의 수도원 설립
오늘날 수도원이라고 하면 세상을 등지고 금욕생활을 하는 곳이요 중세 이전의 생활이라고 보는 부정적 시각이 많습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교회가 속화되고 윤리적인 생활이 무너진 시대에 이따금 수도원이 교회에 경각심을 일으키고 영적 갱신운동을 일으킨 매우 긍정적인 흔적을 남겨 놓은 것을 보게 됩니다. 은둔자로 일찍이 금욕생활을 시작한 사람은 이집트의 안토니였고 수도사의 공동생활을 만든 사람은 파코미우스였습니다.
콘스탄티대제가 신교의 자유를 선언하게 되고 오랫동안 백해를 받던 기독교는 로마제국안에 인기있는 종교가 되었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로인해 신자와 외식하는 자의 구별이 힘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이런 세계를 벋어나 수도원을 찾게 되었습니다. 처음 이집트에서 시작된 은둔자들의 금욕생활 운동은 아타나시우스, 암브로스, 어거스킨에 의해 서방에 소개 되어서 많은 사람들의 호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일반화된 규칙이 없었고 그래서 과도하게 엄격한 생활을 하는가하면 느슨하게 수도생활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수도원생활을 체계적이고 개혁을 한사람이 바로 베네딕트였습니다.
그는 480년 이태리 누르시아의 귀족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공부하기 위해서 로마에 머물을 때 로마시민들의 부패한 생활과 부도덕한 모습을 보고 은둔자가 되기로 했습니다. 그는 500년 로마의 동쪽 수비코아에 있는 산속 동굴에 들어가서 생활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고결한 생활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근처 수도원장으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엄격한 규율을 정하고 적용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순종하지 않고 심지어는 그를 독살할려고 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곳을 떠나 몬테카시노에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방의 신전을 헐고 그 위에 수도원을 세웠습니다.
베네딕트가 큰명성을 얻게 된 것은 이 새 수도원을 세우는데 있지 않고 73장으로 된 수도원체제와 생활 규칙을 마련한데 있습니다. 그는 수도원을 그리스도 군병들이 자족 자급해야 한다는 영적이 요새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농장과 작업장을 두고 수도사의 생필품을 위해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도록 했습니다.
그는 예비 수련기간을 두고 그 후에 영구히 세상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세가지 서약을 하게 했습니다.
첫째, 빈곤의 서약으로 가진 모든 소유를 사회에 넘겨주는 것이고
둘째, 순결의 서약으로 이성과의 관계를 버리는 것이며
셋째, 순종의 서약으로 수도원의 지도자들에게 언제나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수도원생활에서 예배는 가장 큰 의무였습니다. 베네딕트 수도생활 규칙에 ‘게으름은 영혼의 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수도사는 그 시대의 일반 노동자만큼의 시간을 들여 육체노동을 하고 부엌일을 했습니다.
이 베네딕트의 수도원 체제와 규칙으로 말미암아 서방 수도원제도는 최선의 단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9세기 ‘샤를마뉴대제’때에는 베네딕트의 체제를 따른 수도원제도가 거의 보편화 되어졌습니다. 로마제국 후기와 중세때에 가장 훌륭한 인물들의 상당수가 이 수도원제도를 지지했으며 또 수도원에서 이런 분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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