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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럽개혁교회와 한국교회의 신앙고백
유럽이 종교 개혁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을 때, 루터파 교회는 로마 교회의 화체설 입장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고, 그리고 주변의 다른 영주들도 루터가 만든 요리문답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래서 경건한 사람이었던 프레드릭 영주가 당시 학식이 뛰어났던 학자 두 사람을 동원하여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만들었다. 자기가 다스리는 주에서는 이것을 가르치게 했다. (당시 독일은 6개의 주로 나뉘어져서 각기 영주들이 다스렸어요.)
그런데 나중에 이것이 문제가 되어 독일 황제 칼의 소환을 받아 재판이 열렸을때, (칼빈의 색채가 있다고 해서 루터파 쪽에서 제소했기에 열린 재판) 황제 앞에서 프레드릭은 단호하게 자신의 신앙이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과 같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자신은 칼빈을 알지도 못하고, 다만 성경의 가르침을 따랐을 뿐이라고 했다.(하지만 사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작성한 두 사람의 신학자는 칼빈에게서 배운 사람들이죠.)
그래서 프레드릭은 황제로부터 '경건한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요리문답은 이후 서서히 주변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후 알미니우스 문제로 열린 화란의 돌트 회의에서 칼빈주의 5대 교리를 더더욱 천명하고, 알미니우스를 정죄하고, 내친 김에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도 개혁파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개혁교회라고 하면 주로 돌트신조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따르고 있다.
장로교회의 경우, 칼빈에게서 배운 존 낙스가 스코틀랜드로 돌아가서 세운 교회이다. 그래서 장로교회의 시조는 존 낙스라고 볼 수 있다. 이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문서들이 형성되자, 아니 좀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회의에 참석한 주된 학자들이 스코틀랜드 교회 출신들이었다. 그래서 장로 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채택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물론 1967년도에 미국 장로교회는 이 신앙고백서에 2가지 항목을 더해서 총 35장으로 확장시켰다.
개혁교회와 장로교회는 같은 신앙노선에 있다. 다 칼빈주의의 입장을 취하기 때문이다. 유럽의 개혁교회와 영,미를 거쳐온 한국 장로교회는 본질적으로 같은 내용의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으며 칼빈에게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데 유럽 개혁교회 신앙고백은 상당 부분 칼빈의 직접적 영향 아래 작성되었고, 그 대부분이 종교개혁의 뜨거운 열기가 아직 식지 않았을 때 작성되었다. (벨직신앙고백=Belgic Confession 1561,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Heidelberg Catechism 1563, 돌트신경=Canons of Dort 1618,9) 그래서 그 내용자체에 성경적인 직설적 표현이 많이 사용되고 있고, 단순한 면이 나타나고 있다. 이에 비해 장로교의 신앙고백은 이보다 약 1세기 후 웨스트민스터 총회(Westminster Assembly)에서 영국의 청교도적 개혁신앙을 가진 신학자들과 스코틀랜드(Scottland)신학자들의 협력으로 작성되었다.(1643-46). 이때는 이미 알미니안 주의가 화란 돌트렉트에서 열린 국제적 개혁주의 신학자 대회에서 정죄를 받은 후요, 칼빈주의가 유럽대륙에서 제세례파와 루터파와의 구별이 분명하게 드러난 뒤였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총회(Westminster Assembly)에서 1646년에 작성 완료된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의 신앙고백서의 내용은 매우 조직적이고 세밀하여 신앙고백서 중에서 가장 완벽한 것으로 간주되어 오고 있다.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앙고백이 작성된 때는 칼빈이 서거한지 이미 1세기도 넘은 때였기 때문에 그의 영향은 매우 간접적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화란에서 일어난 알미니안(Arminian)주의를 정죄한 후였기 때문에 돌트신경의 내용인 소위 칼빈주의의 5대교리의 내용이 함축되어 있었다. 그런데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앙고백의 내용은 유럽의 개혁교회가 받은 직설적이고 단순한 벨직(Belgic)신앙고백에 비해 매우 스콜라틱(scholastic)한 면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벨직(Belgic) 신앙고백은 체제상 매우 개인과 직결되어 매 장이 "우리는 중심으로 .... 믿는다. (We all believe with the heart....." "우리는... 고백한다"(We congess...)로 되어 있어 친근감을 느끼게 하나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앙고백은 객관적으로 교리를 진술함으로 친밀감을 덜 느끼게 하는 면이 있다.
그런데 신학과 교리면에서 다 같은 칼빈을 좇으면서 유럽 대륙의 교회와 영미의 교회는 각기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유럽의 교회들은 개혁교회(Reformed Church)로, 스코틀랜드(Scotland), 아일랜드(Ireland) 등의 영연방의 것은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로 불리어 왔다. 대륙의 교회를 "개혁교회"라 부르게된 것은 신학, 교회, 정치 모든 면에서 변질된 로마교회에서 개혁된 교회라는 의미에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불려졌고, 스코틀랜드(Scotland)를 위시한 영연방에서 "장로교회"라 부르게 된 것은 교회정치에 있어서 로마교회와 영국교회의 감독정치와는 다른 장로회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다는데서 온 것으로 보인다.
한국장로교회는 영연방인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으로부터 미국을 거쳐 온 장로교회의 신학, 신앙, 생활의 전통을 이어 받았다. 그것은 한국에 선교를 시작하고 교회의 터를 놓은 분들이 주로 미국 장로교회의 선교사들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장로교는 장로교의 모교회라 할 수 있는 스코틀랜드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지 못했다. 미 장로교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기 전 만주에서 선교하던 스코틀랜드 선교사들(John Ross, John MacIntire등)이, 한국 서북 지방에서 만주를 드나드는 한인들을 접촉, 전도하고, 이들과 함께 성경을 번역하여 한국에 보급함으로 한국선교에 큰 공헌을 했지만, 한국 땅 밖에서 봉사했을 뿐 한국교회에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신학과 신앙고백적 생활에 대한 어떤 전통도 남기지는 못했다.
한국의 장로교 최초 복음선교사인 언더우드(H. G. Underwood)는 영국태생이었지만 미국에 이주한 후 그의 부모들이 화란계 개혁교회에 가담했고, 그는 뉴 브라운슈바이크(New Brunswick)에 있는 화란 개혁신학교(The Dutch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을 수학했었다. 그러기에 그는 어느 정도 대륙의 개혁교회 전통의 신학과 교회생활에 접하였었다. 그러나 그가 대륙 개혁교회의 신학적, 신앙고백적 전통을 한국에 소개하거나 심어준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당시 미국의 주도적 장로교 신학교인 멕코믹(McCormick)이나 프린스톤(Princeton)신학교 출신들보다도 훨씬 미국의 복음주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 그래서 그는 한국 선교의 개척자로 큰 봉사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륙의 개혁교회 전통도, 미국의 장로교 전통도 남겨주지 못했다. 단지 넓은 복음주의적 신앙과 생활의 영향을 남겼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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