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양 교회의 신앙고백에 대한 관점
한국 장로교회는 한국 교회의 터를 놓은 미국, 캐나다, 호주의 장로교회 전통의 영향을 받았다. 그 가운데 미 남북 장로교회의 영향이 거의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초기 한국 장로교 선교사들은 장로교의 교리와 생활의 기반이 되는 신앙고백 문제에 대하여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크게 두가지방면에서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첫째는, 한국 장로교회 독노회를 조직할 때(1907), 한국 장로교회의 터를 놓으면서 선교사들은 역사적 장로교회의 신앙고백 내용인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을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채용을 하지 않고, 1904년 인도의 장로교회가 채용한 간단한 소위 "12신조"를 채용한 것이다, 아직 교회역사가 짧아 어린 형편에 있음으로 감당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미 선교가 시작된 지 23년이 되었고 비교적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동안 하나님의 축복으로 교세는 세계 어느 나라 장로교회 공동체에 뒤지지 않을 만큼 큰 집단을 이루었었다.
당시 교회수(지교회, 회당)가 1,472교회요, 성찬에 참여하는 교인수가 18.061명, 원입교인이 19,791명, 교회지도자인 조사가 160명, 전도인이 330명이나 되었다. 독노회는 12신조를 "대한장로교회신경"으로 채용하면서 그 서문에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앙고백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특별히 웨스트민스터 신경과 성경요리문답 대소 책자는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인즉 우리교회와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칠 것으로 알며"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을 끄는 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서 내용을 교회와 신학교에서 가르칠 것으로만 알고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신앙고백 내용을 신앙고백으로 보기보다는 단순히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으로만 보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교회와 신앙고백의 관계에 대한 매우 소극적 관계의 표현을 보게 된다. 신앙고백을 교회의 고백으로 보지 않은 것이다. 물론 신앙고백의 내용은 성경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성경은 절대 무오하고 신앙과 생활에 절대 규범이 된다. 그러나 신앙고백은 인간이 성경으로부터 가져온 것이요. 교정을 요하는 오류도 포함될 수 있다. 그렇다고 신앙고백을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으로만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는 교회사를 이끌어 가시는 교회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섭리적 역사를 간과하는 일이고, 지난날 주의 교회가 받아 고백해 온 역사적 유산을 등한 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 고백내용에서 오류가 발견되기 전에는 그것을 그대로 고백하고, 그대로 사는 것이 교회의 의무이다. 이런 초대 선교사들의 신앙고백에 대한 소극적 접근을 볼 때, 한국교회 초대 선교사들이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이었음은 틀림없으나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귀중히 여기고 장로교회의 정체를 뚜렷하게 하는데는 매우 약했었다. 곧 저들이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터로 하고 장로교회를 세운 "개혁신앙고백교회"의 건설자들이었다고는 보기 어려운 것이다.
둘째로, 한국 장로교회 초대선교사들 대부분은 전형적인 미국적 복음주의자들로 아르미니안 주의를 경계하지 않는 교회일치주의자들이었다. 1905년 재한 서울 장로회 일치 위원회(The Seoul Presbyterian Committee on Union=선교사 단체임)는 "대한예수교회(혹은 대한 그리스도교회=the Church of Christ in Korea)를 설립할 때가 무르익었다고 보고, 그 해 9월에 장, 감 선교사 150명이 함께 조직한 "재한 복음주의 선교회 총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 in Kroea)에 한국에 하나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울 것을 제의하여 수용하게 했다. 이 총공의회의 목적은 "선교활동의 협력과 단 하나의 원주민 복음주의 교회의 조직(Cooperation in missionary drrorts and eventually the organization of but one native evangelical Church)이었다. 이런 하나의 교회운동은 곧 같은 때에 카나다에서 일어난 장로교, 감리교, 회중교회의 일치운동의 소식에 고무되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 하나의 교회운동은 그 결실을 쉽게 보지 못했다. 그들을 파송한 본국 교회가 수용을 하지 않았고 한국장로교회 안에서도 이를 반대하는 분들의 수가 차츰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감리교회와 합해서 하나의 교회를 이루고자 하는 희망은 1920년대 말까지도 계속되었다. 1925년 캐나다의 일치운동이 결실을 맺어 "캐나다 연합교회(The Uniting Church in Canada)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1929년 개신교 기관지인 "기독신문"이 당시 교회지도자들에게 교회통합에 대한 의견을 질문지를 내어 물어보았다. 답을 준 36명 가운데 대부분이 찬성을 보였다(이때 신학면에서 어느 정도 진보적 경향을 가졌던 남궁혁, 백낙준, 부산의 김길창 등). 그러나 초대 한국 교회의 목사인 선천의 양전백이나 임택권 목사 같은 분은 교리와 정치가 다름으로 불가하다고 했었다.
한국 초대 선교사들의 대부분은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이었지만 철저한 칼빈주의적 개혁주의자들은 아니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19세기 하반기에 북미를 휩쓴 피니(Charles Gl. Finney, 1892~1875)의 부흥운동과 이어 나타난 무디(Dwight, L. Moody, 1837~1899)로부터 직간접영향을 받은 전형적인 미국의복음주의자들이었고 철저한 개혁신학과 교리를 옹호하는 자들은 아니었다. 그 가운데 특별히 언더우드가 선두역할을 했다. 그는 한국 선교사로 지원하여 이것이 수락되었을 때, 당시 북장로교 선교국 총무인 엘링우드(Ellingwood)에게 "장로교를 전하기 위해 나를 한국에 보낸다면, 나는 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의 복음을 공표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가겠습니다"라고 했었다. 그는 처음부터 교파라는 것을 싫어했던 일치주의자(unionist)였다.
초대 선교사인 소안론 (W. L. Swallon)같은 분도 성경의 완전영감은 철저히 믿었으나 교리 문제에 있어서는 "한국에서 감리교회와 장로교가 그 교리의 조화를 찾는데 어려움이 개재한다고 보지 않는다"고 했다. 1925년부터 평양신학교 교장으로 봉사한 라부열(S. L. Roberts)같은 분도 장, 감 양 교회의 일치문제에 있어서 양 교회가 다 한국교회이니 한국교회의 의견을 듣기 원한다는 중립태도를 취했었다. 감리교는 그들 독특한 신학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있다면 인본주의적, 체험주의적 부흥신학이고, 일반적으로 알미니안 신학을 좇고 있다. 이 신학은 화란의 돌트렉트 대회(1618~19)에서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정죄를 받았었다. 그런데 한국 초대 선교사들에게는 알미니안 주의가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이런 태도는 선교구역을 분할할 때에도 나타났다. 장, 감 선교회의 선교구역이 확정되자 어떤 장로교 선교지역에 세워진 기성교회를 감리교에 넘겨주게 되었다. 이때 갑자기 장로교에서 감리교로 넘어가도록 강요를 당한 장로교인들이 항거함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된 일도 있게 되었다. 이런 일들은 선교사들이 신학과 신앙고백(교리)을 간과한 데서 온 사건들이었다.
결과적으로 한국 초대 미 장로교 선교사들은 신앙고백 문제에 있어서 해이한 교회생활의 전통을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한국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1960년대가 이를 때까지 자기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이지를 않았다. 한국 대부분의 장로교 교파들은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이를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였다. 이를 볼 때 한국장로교회를 개혁신앙을 고백하는 고백교회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유럽의 개혁교회는 신앙고백관이 한국의 장로교회와는 매우 다름을 보게 된다. 그들이 가진 소위 일치신조(The Three Forms of Unity)를 교회의 신학적, 교리적 기반으로 삼고, 이를 교회의 가치(Symbolun)로 내세우며, 거기서 개혁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찾는다.
한국교회는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앙고백서를 교회적인 공식신앙고백문서로 채용했으나, 이를 참고서 정도로 여기고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목사와 장로 등 직분자들까지도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목사가 임직시에 이 신앙고백 내용을 "성실한 마음으로 믿고 따릅니까?"라는 물음을 받고 "예"라 답함으로 서약을 한다. 그러면 그가 가르치는 내용이나 설교의 내용은 이 신앙고백에 나타난 교리에 의한 검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한국 장로교회 목사 상당수의 설교들은 장로교 설교로서의 정체성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설교의 내용이, 개혁주의적이라기보다 아르미니안적 경향을 띄고 있음을 보게 된다. 개혁교회는 이와는 달리 목사의 교육과 설교에서 신학과 교리의 정체성이 뚜렷이 드러난다. 그래서 유럽의 개혁교회는 고백교회로서의 면모를 뚜렷하게 나타내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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