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와 교회(2) -허순길 박사
칼빈주의 개혁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은 생활이다'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이 말은 칼빈주의 개혁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의 탁월한 신앙생활관을 잘 보여준다.
그리스도인에게 모든 생활영역은 곧 신앙생활 영역이다. 교회만이 아니라, 매일 일하는 모든 곳이 신앙생활을 하는 영역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들이 교회나 가정에서 예배드리는 몇 시간만 함께 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신다. 그는 피 흘려 우리를 구원하여, 자신의 소유로 삼으시고, 우리 몸을 '성령의 전'이라 부르시며,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셨다.(고전 6:19,20, 12:1) 우리는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그에게 순종하며 영광을 돌리고 살 사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닌 어떤 사람이나 조직체를 주로 삼고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스도인은 어느 곳에서나 그리스도를 유일한 주로 모시고, 그의 사랑의 계명을 따라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그런데 노조는 노동현장에서 이런 생활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전혀 배치되는 계급투쟁을 활동의 목표로 하고, 이를 강요하고 있다.
그리고 노조 내에서는 원칙적으로 종교적인 주제의 토론을 허용하지 않게 되어 있다. 나아가 모든 회원들에게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그에게만 충성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노동현장에서도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나 노조는 이를 수용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모든 생활영역에서 그리스도를 왕과 주로 모시고 살려는 그리스도인이 노조 회원이 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리스도인이 노조가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이에 가입하지 않고 살아가려 할 때 여러가지 불이익에 당면하게 될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구미 세계에 개혁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노조가입이 강요되지 않는 직장을 구하거나, 자영업을 함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유일한 주 그리스도에게만 충성하는 길을 택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노조가 본질적으로 계급투쟁을 위한 조직체요, 절대 순종을 요구하는 실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교회가 직영 혹은 간접 운영하는 기관에 노조가 존재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기관들에서 직원(노동자)들은 경영자와의 협상과 직원들 간의 상호복리와 친교를 위한 '협의회'를 갖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통속적인 '노조'를 도입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교회에 속한 기관들은 그 직간접 목적이라 할 수 있는 하늘나라 건설과 교회봉사라는 하나의 공동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사용자와 노동자는 같은 주 그리스도를 모시고 공동목적의 성취를 위해 봉사하는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다 같은 일꾼이요 동역자다. 혹 어떤 문제에 있어서 운영진과 직원들 간에 의견차이가 첨예하게 나타날 수 있고, 긴장이 조성될 수 도 있다.
그러나 같은 그리스도의 영의 통치를 받고 사는 세계에서 투쟁이란 있을 수 없다. 사랑 안에서의 대화와 협상을 통한 해결만이 유일한 길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인 노사 양자는 주일마다 교회에서 '성도가 서로 교통(교제)하는 것'을 사도신경으로 함께 고백하고 있다. 교회에서는 이것을 믿고 고백하면서 기관(일터)에 나와서는 서로 투쟁의 상대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교회가 직간접 운영하는 기관에 노조를 수용할 수 없다면, 교회안의 노조 조직이란 더 더욱 상상할 수 없다.
근래에 여러 교회 안에 노조가 조직되고 부교역자들(부목사들)이 노동자의 입장에서 노조를 결성하고, 담임목사(사용자)를 상대로 쟁의를 일으킨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것은 한국 교회의 극단적 속화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교회생활의 속화를 주도하고 있다고 보는 구미 자유주의 교회 안에서도 '목사 세계'에 노조가 조직되어 활동한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모두는 아닐지라도 한국교회의 상당수 담임 목사들이 지나치게 교권을 행사하고 부교역자들을 동역자 입장에서 제대로 대우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부교역자들의 노조설립 원인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불합리한 대우가 결코 교회 안의 노조도입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는 없다. 담임목사나 부목사는 양자 모두 단순한 노동자가 아니오, 양의 목자들이다. 임금이나 어떤 대우문제를 위해 투쟁하는 분들은 더 이상 목자가 아니오, 삯을 위해 일하는 삯꾼들일 뿐이다. 교회는 교회이어야 하고, 세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노조를 도입할 수 있을 만큼 된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닌 세상의 한 공동체나, 영리 단체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한국교회가 고도의 외적 성장은 가져왔으나, 내적으로 참된 기독교적 생활은 없는 교회가 되어 있다. 한국 개신교회 세계에는 칼빈주의 개혁신앙을 쫓는다고 주장하는 '장로교회'가 대세이다. '칼빈주의 개혁신앙'은 생활을 중요시 한다.
막연한 개인적인 경건 생활이 아니라, 세상 모든 영역 생활현장에서 주를 고백하고 사는 신앙생활을 중요시하는 것이다. 노동자는 노동현장에서, 교사는 교육현장에서, 사업가는 사업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종으로, 하늘나라의 시민과 건설자로 생활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한 치의 영역도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영역은 없다. 모든 영역이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 그리스도인이 가서 서는 세계는 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거룩한 땅이요, 그가 주권을 주장하는 영역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영역에서든지 그리스도의 뜻을 살피고 이루기 위해 생활해야 한다. 성경은 부자와 가난한 자들이 서로 어떤 관계 속에 살아야 하며,(신15:7, 19:15, 암4:1, 신15:1,2 등), 사용자와 노동자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원리적인 교훈을 주고 있다.(엡6:5-9 ) 성경은 사랑과 믿음 안에서 서로의 의무를 강조하고 있다. 성경 어느 곳에도 계급투쟁의 개념은 발견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노사 양자에게 "너희와 저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느니라"(엡6:9)고 하며, 양자가 같이 하늘에 계시는 주를 상전으로 모시고 자기 맡은 의무에 성실할 것을 가르친다. 그리스도인은 교회 안에서뿐 아니라, 그 외 모든 영역에서 노사 간 어떤 신분에 속하든지 그리스도의 백성으로 살아야 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평생 모든 생활 영역에서 '왕을 위해' 사는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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