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고신교회사와 교권
고신교회는 1950년대 초 장로교 총회(1951-2)가 휘두른 교권횡포 결과로 생겨난 교회이다.
고신은 교권의 큰 피해자다. 그렇다면 고신은 교권남용이나 횡포에 남다른 경계를 해야 한다. 교권이란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교회의 순수성, 성결성을 유지하기 위해 교회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권'(權)이기 때문이다. 교권은 교회건설을 위해 시행되어 질 때 그리스도의 인정을 받고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런데 종종 빗나간 교권행사는 분열을 초래하거나 큰 해를 입혀 왔다.
고신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경남노회는 제35-36회 총회가 휘두른 교권의 횡포로 무서운 박해를 받았다. 총회의 대세는 정통적 개혁주의 신학으로 교육하고, 교회의 공적참회와 정화를 부르짖는 고려신학교를 싫어했다. 그래서 이 신학교를 승인하고 지원하는 경남노회를 분쇄해야 할 대상으로 삼았다. 1949년 2월 배교자요 자유주의자인 김길창이 경남노회 안에 분열을 일으켜 불법노회를 조직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제35회 총회가 김세열을 위원장으로 하는 '5인 전권위원'을, 제36회 총회가 다시 '7인 특별위원'을 보냈다. 그런데 양 위원회 주도인물들은 자유주의 조신측을 지원하는 분들로서 김길창과 동색이었다. 그러니 분열자 김길창에게는 전혀 책임을 묻지 않고 고려신학교와 이 학교를 지원하는 경남노회를 분쇄하는데 만 초점을 맞추었다. 결국 이들은 총회를 배경한 교권을 가지고 기존 경남(법통)노회를 제거하기 위해 새 불법 경남노회를 조직함으로 경남노회 분열을 고착시켰다.
제36회 계속 총회는 이 새 노회를 받아드림으로 '법통 경남노회'를 제도권 밖으로 축출했다. 친일 배교의 죄를 가리기 위해 사용된 교권의 횡포였다. 여기 고신교회의 불가피한 출발이 있었다.
고신교회는 교권의 남용과 횡포가 교회에 얼마나 무서운 해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체험했다. 초기 고신 총회 분위기는 교권은 봉사라는 사실을 생활로 보여주었다. 회장으로 당선되어도 그 자리에 선듯 나가기를 원치 않았다. 총회임원으로 당선되어도 겸손하게 사양하고 사의를 표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정말 그리스도의 종들이 모인 '성회'답게 보였다. 총회장은 총회기간에만 회를 사회할 책임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총회 후에는 총회장이란 칭호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이런 분위기는 적어도 합동직전인 50년대 말까지 지속되었다.
그런데 차츰 고신교회가 그 원색을 잃어 가면서 교권을 접근하고 시행하는 태도에 변화 조짐을 보였다. 이것이 처음 나타난 것이 고려신학교 이사회가 신학이나 교리문제가 아닌 주일성수와 관련된 '건덕'상의 이유로 고신신학을 주조(鑄造)해온 박윤선 박사의 교장직을 해임한 데서이다. 그가 주일에 부득이한 일이나, 자비의 일은 할 수 있음을 성경적으로 교리적으로 밝혔으나 이사회는 이것을 수용하지 않고 징계했다. 건덕상의 문제로 이런 중징계를 한 것은 이사회의 지나친 교권행사였다고 볼 수 있다. 결과는 곧 고신교회의 위기를 불러와 '실패한 합동'으로 이어졌다.
이 후 고신 안에는 교권남용이라 할 수 있는 일들이 때때로 일어나 교회에 큰 손해를 초래했다. 이것은 고신의 속화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67년에 신학교 측은 대학부의 대학인가를 얻기 위해 기존 '유지재단'을 '교육재단'으로 명의 변경하기를 원했다. 이에 대한 이사장의 적극적인 협력이 없자 한상동 목사를 이사장으로 하는 '가 이사회'를 조직하여 '학교법인'인가를 신청하여 받았다. 이것은 다른 형태의 교권남용이라 볼 수 있다. 이 사건은 곧 한상동(측)과 송상석(측)사이에 극단적인 대립을 불러 전국교회를 불안하게 했다.
이렇게 출발한 '학교법인'은 30년이 지난 오늘도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1972년에는 송상석 목사가 소위 '법적이사장'직을 고수함으로 문제를 일으켰다. 4년 임기를 마쳤지만 교육부에서 승인한 임기가 남았다는 이유로 이사장직을 고수했다. 이제 양측 교권이 충돌하게 된다. 74년 총회는 '송목사 비행에 관한 처리'를 위한 특별재판국을 설치했다. 그 해 12월에 재판국은 송목사에게 '목사면직'이란 극단적 시벌을 가했다. 그가 곧 정년 은퇴할 시점이었다. 교회권징의 가장 큰 목적은 치유에 있다. 그런데 이 권징은 치유보다는 출혈의 결과를 가져왔다. 재판국은 지나친 교권행사를 했다는 비난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배경하고 있는 경남노회가 반발하여 행정보류를 선언하고, 7년을 따로 살게 된 비극을 초래했다.
1990년대를 돌이켜 본다. 복음병원 지하주차장 건설입찰문제를 둘러싸고 소송문제가 일어나 95년부터 98년까지 무려 3년 동안 시련을 겪었다. 95년 총회는 "학교법인 안에 있는 제반문제 해결을 위하여 전권위원을 내기로"결의했다. 이는 1949년 제35총회가 경남노회 분규를 해결하기 위해 전권위원을 낼 때 "기타의 모든 복잡한 문제"를 "심사처리"케 하기 위해 전권위 5인을 내어 무한한 교권을 행사한 역사를 기억하게 하는 일이었다. 이해 전권위원이 1년 동안 17회 모여 많은 작업을 한 보고를 96년 총회가 어렵사리 받았다. 받은 보고의 중요한 내용은 시벌이었다. 그런데 다음해인 97년 총회는 96년 총회가 받은 전권위원회가 낸 보고서에 대한 전권위원을 내게 된다. 양립된 세력 간의 교권 시소게임이었음이 분명했다. 98년 총회에서 새 전권위원이 제출할 보고는 총회에 위기감을 조성했다. 조정위원을 내어 결국 지난 3년 동안의 모든 것을 백지화했다. 평화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덮어 버렸다. 불법이 있으면 밝혀 징계하고, 범법자는 이를 겸손히 수용하는 것이 개혁주의 교회생활이다. 수년 동안 심각한 듯 다루어 온 모든 일은 양 세력 간의 교권장악을 위한 시소게임이었다는 인상만을 남겼다. .
고신교회는 특별히 교권남용과 횡포에 의해 어려움과 박해를 받은 역사적 경험을 가진 교회다. 합동 때도 교권의 횡포로 분쇄당하기 직전 환원했던 쓰라린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런 고신이 지난날 교회 내에 시행해 온 교권이 그리스도의 왕권을 성실하게 봉사해온 것이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교권남용과 횡포는 지도자들의 전형적인 속화현상이다. 교권횡포에 큰 피해를 경험한 고신교회는 50주년을 맞아 그리스도의 왕권을 성실하게 받드는 겸허한 마음으로 교권행사에 임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댓글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