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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역사가 주는 교훈] 7. 예장 제36회 총회와 고신계 축출
언약 2014-07-28 추천 1 댓글 0 조회 226

7. 예장 제36회 총회와 고신계 축출

 

36총회가 고려신학교를 지원하던 경남(법통)노회를 축출한 때는 6.25의 비극이 한창이던 19515월이었다. 이 때 한국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민족의 화복을 책임진 양심공동체로 과거의 죄를 살피며 베옷을 입고 참회했어야 했다. 그런데 한국장로교총회는 이에 역행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를 감행한 총회 주체세력은 일제에 친일 배교한 교권주의자들이었다.

해방 후 장로교 총회는 진실한 공적 회개로 과거를 청산하고 교회재건에 나서지 않았다. 19466월 남부총회로 모여 교회재건을 했으나, 이는 기구적인 재건이었을 뿐 영적 신앙적 재건은 아니었다. 총회는 '순정일본적기독교'(純正日本的基督敎) 건설과정의 극치였던 '일본기독교조선교단' 지도급 인물들이 계속 교권을 장악했다. 예를 들면 일제 '교단''통리'로 친일의 최고사령탑에 앉았던 김관식이 1948년 총회 시에 정치부장으로 등장했다. 그 해 그는 총회를 대표하여 암스텔담에서 열린 세계기독교협의회(WCC) 창립총회에 한국교회 대표로 참석했다. 남부총회는 1938년에 결의한 신사참배를 취소하는 결의를 했다. 공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성실하게 실천해 온 분들이 공적참회나 권징과정도 없이, 단순히 결의를 취소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전필수 김길창 등은 민족 반역죄로 반민법에 걸려 심판을 받을 자리에 있었지만, 총회는 이들을 오히려 감싸주었다. 김길창은 계속 총회 총대로, 전필수는 후에 총회장으로 선출되는 영광을 누렸다.

1949년 초 김길창은 회개를 외치는 고려신학교와 경남노회가 싫어 불법노회를 조직, 경남노회의 분열을 일으켰다. 35회 총회(1949)는 이 문제해결을 위해 5인 전권위원을 파송했다. 그런데 이 전권위원장은 김길창과 동색을 가진 조선신학교 지원자 김세열이었다. 그러니 전권위는 경남에 와서 분열자 김길창을 돕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회개와 정화를 외치는 고려신학교를 분쇄하고, 이 학교를 돕는 기존 경남노회를 해체하고 삼분(三分)해 세를 분산함으로 김길창을 도우려했다. 36회 총회는 이 전권위의 보고를 받을 수 없게 되자 다시 '7인 특별위원회'를 파송했다. 이 위원회도 같은 성분을 가진 인물들로서 같은 방향의 작업을 했다. 당시 총회의 교권은 친일 배교자들을 도와 그들의 위신을 세워주고, 정화를 부르짖는 세력을 분쇄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결과적으로 한국장로교회는 교회와 민족 앞에 일제 시에 범한 죄를 회개하고 청산하는 일을 외면함으로 양심공동체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런 교회가 자리 잡고 있는 땅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을 수 없었다. 해방 5년 만에 동족상잔의 전쟁이 일어났다. 이 민족적 대참사는 배교의 죄를 회개하지 않은 교회의 책임으로 보아야 한다. 6·25 1년 전인 1949년 초 한상동 목사는 '대한교회에'라는 제목으로 예언자적인 다음 글을 파숫군지에 실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과일(過日)의 모든 죄를 솔직히 자복하고 눈물을 흘려 통회하면 긍휼이 풍성하신 여호와께서 용서하시련만은, 해방을 주시고, 독립을 주신 오늘에도 회개는 고사하고, 패망의 일인(日人)에게 배운 버릇 훌륭한 체 생각하고, 죄감이 전무하고, 회개를 거부하니 어찌 여호와의 진노를 피하리요여호와 반듯이 진노하시리라." 그는 회개하지 않는 한국교회 때문에 이 땅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을 심각하게 느꼈다.

6·25가 한창이던 19515월 부산중앙교회에서 제36회 계속총회가 모였다. 전해 4월 대구 제일교회에서 36총회가 모였으나, '전권위원회'의 보고를 두고 폭력이 일어나 무장경관이 출동, 진압해야 하는 대치욕을 남기고 5일간을 허송하다 9월에 속회하기로 하고 정회했다. 그러나 2개월 후 6·25가 일어나 모이지 못하고, 다음해 5월에야 '계속회'로 모였다.

상식으로 생각하면 속회로 모인 이 총회는 민족 대란을 맞아 피 흘리고 고통하는 때에 하나님 앞에 베옷을 입고 참회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지난날의 배교의 죄, 신사참배의 죄, 일제 시에 범한 모든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청산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총회는 더 굳어져 있었다. 총회는 오히려 공적회개와 참회로 정화의 길을 밟아 교회재건에 나서자고 외쳐 온 고려신학교와 이 학교를 지원하는 경남(법통)노회를 분쇄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교권을 동원했다. 총회는 미리 입장권을 발행하여 총대들에게 나누어주어 입장하게 함으로 경남(법통)노회 총대들이 입장하는 길을 막았다. 이런 방법으로 총회는 경남노회를 총회제도권 밖으로 축출해버렸다.

그래도 한국장로교회를 사랑하는 경남노회는 총회와의 정상적인 관계를 원해, 다음해 37총회에 총대를 보냈다. 하지만 이 총회는 경남노회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해 버렸다. 이에 경남(법통)노회는 하나님께서 회개를 외면하고 이교적으로 흐르는 교권으로부터 벗어나서 한국장로교회의 전통을 바로 이어가기 원하시는 줄 믿고, 그해 911일 총노회를 조직함으로 고신교회로서의 새 출발을 했다. 고신의 선진들은 하나님 앞에서 공적 참회와 권징을 통한 정화로 한국교회의 신앙적 재건을 하기 원했고, 이것이 나라와 민족 앞에도 책임 있는 일임을 믿었다.

그런데 이만열 교수는 6·25 민족상잔 시기에 고신파의 분열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고신파의 분열이 기장의 경우와 거의 마찬가지로 6·25의 동족상잔이 자행되고 있던 1951-2년에 이뤄졌다는 점이다. 동족끼리 피를 흘리고 있을 때, 민족적인 시련을 두고 마음을 합해야 할 시기에 '진리싸움'이라는 명분으로 교단분열을 결과했다는 것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이만열, 특집/한국교회, 연합의 장은 열리는가1. 목회와 신학, 1995, 3월호, p.51) 고신교회를 향한 이런 사관은 고신교회 존립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사관은 신앙보다 민족을, 진리보다 교회일치를 앞세우고 있다. 6·25의 비극을 민족중심적 입장에서만 보았지 신앙의 눈으로는 보지 않고 있다. 결과 고신교회의 출발을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참된 신앙을 가진 성도와 교회는 바른 신앙의 파수와 참된 교회의 건설만이 그 땅과 민족을 진정 위하는 길로 알고 살아간다. 고신교회는 50주년을 맞으면서 이 땅의 참된 교회 건설이 곧 이 나라, 이 민족에게 복이 된다는 사실을 역사로부터 배우고 교회의 참된 개혁과 건설에 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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