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한상동 목사와 장로교회 재건운동
한상동 목사는 주남선 목사와 함께 고려신학교의 설립자일 뿐 아니라, 고신교회의 신앙과 생활의 터를 놓은 분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이 가졌던 교회관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특히 한상동 목사는 해방전후 교회재건을 위해 행동으로 헌신한 분이었기에 그가 어떤 교회관을 가졌는지 역사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오늘을 사는 고신 세대에 유익이 될 것이다.
그의 교회관은 개혁주의적인 매우 건전한 것이었다. 한국장로교회가 신사참배라는 우상숭배를 함으로 공적으로 무너졌을 때, 교회재건을 위해 노력했던 그의 걸음에서 이를 잘 알게 된다.
그는 투옥되기 전, 이미 배교한 조선장로교회를 재건하여 역사적 전통을 이어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겨우 반세기 역사를 넘긴 조선장로교회는 일제 압력으로 1938년 제27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이를 '솔선수행'함으로 배교단체가 되었다. 총회는 모일 때마다 국민의례를 먼저 하여 '황국신민의 서사'를 외고, 궁성요배를 했다. 신사참배는 뺄 수 없는 절차였다. 당시 제도상의 조선장로교회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었다. 태양신(天照大神)과 천황(天皇)을 성부 하나님과 성자 그리스도 예수보다 더 높였다. 그러니 제도상의 '조선예수교장로회'는 무너진 것이다.
이에 서북지방(평안도, 황해도)의 이기선 목사와 경남지방의 한상동 목사 중심으로 재건운동이 일어났다. 조직적인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신사불참배자들의 새 교회조직 운동이었다.
서북 보다 한상동을 중심한 운동이 더 조직적이고 적극적이었다. 한상동은 1939년 초 마산 문창교회를 사면하고 이 운동에 헌신했다. 처음에는 몇몇 신앙동지들과 함께 교인들에게 신사참배하는 교회에 출석하지 말 것과 신사참배하지 않는 사람들끼리 모여 예배드릴 것을 권장했다. 다음으로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결심하고 부산과 마산 진주 거창 각 지방에 책임자를 세웠다. 1940년 초에 이르러서는 신사참배한 현 노회는 해체하도록 노력하며, 신사 불참배주의 신도들만의 새 노회를 조직하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기존 총회에 속한 교회와 노회는 배교하고 실상 죽었으니 조선장로교회의 전통과 역사의 맥을 잇기 위해서는 새 교회, 새 노회를 조직함으로 교회재건을 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940년 4월 평양의 주기철 목사 가석방 소식을 들은 그는 이인재 전도사와 함께 주 목사를 위로하고 협의하기 위해 4월말 평양을 찾았다. 이 때 모인 20여명의 신앙동지 앞에서 한 목사는 조직적인 반대운동과 새 노회 조직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주 목사는 조직적인 운동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옥고를 겪고 나온 그는 조직적 운동이 더 많은 희생을 내지 않을까 함이요, 또 민족운동으로 오해받지 않을까 염려한 때문으로 보인다. 신사불참배 노회 조직에 대하여는 "시기상조"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원칙적으론 찬성하지만 때를 얻기 위해 좀 더 기다리자는 뜻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총회와 노회가 전적으로 배교한 단체임을 마음과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4개월 전인 1939년 12월에 평양노회가 그에게 목사면직 처분을 내렸다. 출옥 몇 주 전인 3월말에는 그가 시무하던 산정현교회가 폐쇄되었다. 가족은 축출 당하고, 그 사택에는 친일 신학교 교장 채필근이 점령하여 살았다. 그는 새 노회의 조직으로 교회재건이 있어야 한다는 원칙에는 찬동하면서 시기가 이른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새 노회 조직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두 분 사이에 이견이 없었다. 이는 두 분 다 분리주의적 혹은 완전주의적 교회관을 가진 데서가 아니었다.
해방 후에도 한상동의 거취에서 원리적으로 해방 전과 같은 행보를 그대로 보게 된다. 해방이 되고 출옥하자 교회의 환경은 투옥 전과는 달랐다. 이제 새로운 노회와 총회의 조직보다는 공적으로 배교하고 우상숭배한 교회가 공적인 참회와 정화를 거쳐 재건됨으로 과거의 전통적 조선장로교회 역사의 맥을 잇기를 원했다. 한상동은 '분리주의적, 완전주의적' 교회관을 가지고, 전혀 새로운 교회조직의 길에 나선 최덕지와는 달랐다. 그는 다른 출옥 충복들과 함께 배교한 교회의 공적참회와 권징을 통한 재건을 주장했으나 교회를 떠나지는 않았다. 교회 안에 머물면서 신학교를 세워 순교적 신앙을 가진 목회자들을 양성하여 파송함으로 교회재건에 봉사하기 위해 주남선 목사와 함께 고려신학교를 세웠다. 신학교 설립 후 경남노회 안의 이름난 배교자 김길창 일파와 교권주의자들의 갖은 비난과 신학교 파괴공작에 시달리면서도 총회와 노회를 떠나 다른 교회를 세우려하지 않았다.
1946년 12월 경남 제48회 정기노회에서 김길창이 노회장으로 선출되고, 지난 노회에서 결의한 고려신학교 인준을 취소하기까지 했다. 이 때 상당수가 저들과 함께 일할 수 없으니 새로운 교회의 기치를 들자고 강권했으나, 한상동은 교회 분열에 나서지 않았다. 이에 불만이었던 주상수 장로 같은 분들은 최덕지에게로 넘어갔다.
고려신학교 초대 교장으로 잠시 봉사하다 이탈했던 박형룡도 "새 교단을 형성하고자 밖에서 싸우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한상동은 새 교회나 노회 조직의 필요성을 언급한 일이 없다. 그는 끝까지 동지들과 함께 교회 안에서 모든 비난과 고신 분쇄공작을 견뎌내다가 제36, 37총회(1951,2)가 경남(법통)노회를 축출하고 완전 단절함으로 만부득이 이교파적으로 나가는 가설 총회를 벗어나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대로의 전통적인 장로회 총회를 계승"하기 위해 1952년에 총노회를 조직, 고신교회 출발에 동참했다.
해방 전이나 해방 후에 취한 한상동의 교회재건 운동은 원리상 일관되었다. 이에 대한 바른 이해는 고신교회의 정체 이해와 직결된다. 우리는 지난날의 교회사에서 고신의 선진들이 한국장로교회를 사랑하고, 신학, 신앙생활의 바른 전통을 잇는 교회를 재건하려는 일념으로 살았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들은 결코 '분리주의적' 인물이 아니었다. 이런 고신 선진들이 가졌던 개혁주의 교회관을 바로 이해하고, 그 선상에서 미래의 교회건설에 임하는 것이 50주년 희년을 맞는 고신교회의 사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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