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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역사가 주는 교훈] 5. 한국 자유주의 신학과 일제하의 역정
언약 2014-07-28 추천 1 댓글 0 조회 268

5. 한국 자유주의 신학과 일제하의 역정

 

한국 장로교회는 100년 남짓 짧은 역사 동안 선교역사에 유례없는 성장을 했지만, 세계 어느 교회에 못지않은 시련과 박해를 겪었다. 시련과 박해의 시대에 어떤 분들은 옥고를 치르고 순교를 당했는가 하면, 어떤 분들은 시류를 잘 타고 협상 양보함으로 박해를 피하거나 배교의 길을 걷기도 했다.

19389월 장로교 제27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후 체제상의 한국장로교회는 태양신을 섬기면서 우상숭배의 급물살을 탔다. 1년 후인 1939년에 안두화 선교사가 미 북장로교 선교본부에 한국기독교인 중 거의 98퍼센트가 신앙양심을 굽혀버렸다는 소식을 전했다. 목자들이 태양신을 섬기면서 우상숭배가 아니고 국민의례라 가르쳤으니, 대부분 순진한 양떼들은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제도상의 한국장로교회는 배교단체가 되어버렸다.

그 때 이런 배교생활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따라한 상당수 목사들과 신자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앞장서서 친일행위를 보이며, 배교한 분들이 있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일찍부터 자유주의 신학을 추종하거나 포용한 분들이다. 보수주의자들은 다 신사참배를 반대했고, 자유주의자들은 다 신사참배를 했다는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보수주의자들은 반대 입장에 서 왔고, 자유주의자들은 협상 혹은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 못할 사실이다.

1938년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후 1939년부터 배교총회를 이끌어간 소위 지도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자유주의자들이거나, 유사 보수주의자들이었다. 자유주의 신학자 채필근이 1940년 친일 평양신학교를 세워 교장으로 등장한다. 그는 1942년 총회에 나와서 "我等 不知不識間美英人思想 觀念感染되어 此等 아직 殘存해 있는바 우리들은 깊이 反省하여 國家에 대해 罪惡을 철저히 悔改하고 싶다"고 토로했다. 이렇게 기존 기독교에 속했던 것을 회개한 후 순정 일본적 기독교로 전향한 채필근은 1943년 일제가 만든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의 통리가 되는 영광(?)을 안았고, 부산의 자유주의 추종자 김길창은 연성국장겸 경남교구장이 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자 김재준은 평양신학교가 설립되던 같은 때에 서울에 설립된 조선신학교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 학교의 다음과 같은 교육목적에서 그의 친일 배교적 모습이 잘 드러난다. "복음적 신앙에 기하여 신학을 연구하고, 忠良有爲皇國의 기독교 교역자를 양성한다"

이는 일본 국책을 따라 천황에게 충성하는 목사를 배출하겠다는 것이다. 이 양 신학교의 이 사였던 자유주의 신학의 추종자 김관식은 194581일에 모든 교파를 통합해 만들어진 '일본기독교조선교단' 통리로 임명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당시 자유주의자들은 일제가 조선 기독교를 신도(神道) 제도권 안으로 완전히 끌어들여 말살하려는 기도에 저항없이 협력했다. 자유주의 신학추종자 전필수는 이미 1932년에 함태영, 감리교의 신흥우 등과 함께 '적극신앙단'이란 단체를 만들어 사회복음주의자임을 나타내 보였고, 1943년에는 일제의 뜻을 간파하고, 일제가 싫어하는 구약과 계시록 등을 폐기한 개조된 일본적 기독교인 '조선기독교혁신교단'을 조직하고 거기 의장이 되었다. 이 외에 배교단체에서 앞장서 친일배교생활에 협력한 분들이 있는데, 송창근 윤인구 같은 사람들이다.

일제 시 배교생활에 앞장섰던 자유주의자들은 해방이 되었을 때 그럴듯한 자기변호를 했다. 신사참배를 하고 감옥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밖에서 교회를 지키기 위해 고생한 사람이나 고생과 명분은 다 같다고 변을 늘어놓았다. 그래서 저들은 해방 후에도 일제 말 배교 교회 안에서 누리던 권좌를 그대로 유지하려 노력했고, 이에 방해가 되는 세력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제거하기에 총력을 기울였다. 저들의 이런 계책은 교회를 분열하고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예를 들면 일제의 작품인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의 통리였던 김관식은 해방 후에도 그 체제를 그대로 이끌고 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형식상 재건된 장로교 안에 정치부장이란 한 권좌를 차지하여 교권을 휘둘렀다. 그는 공적참회와 정화를 부르짖는 고려신학교를 누구보다 미워했다. 그래서 1948년 제34회 총회 시에 고려신학교 문제가 논의되자 그는 "고려신학교는 우리총회와 아무 관계가 없으니 노회가 천서를 줄 필요가 없다"고 칼로 베듯 잘라 말했다.

1949년 제35총회, 1950년 제36총회에서 고신을 중심한 경남(법통)노회를 절단하고 축출하는데 큰 공헌을 세운 '전권위원회', '특별위원회'의 위원 대부분이 자유주의 추종자였다.

이들은 필연적으로 1953년에 기독교장로회측에 가담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제35총회가 세운 '전권위원회'의 위원장이었던 김세열은 뒤에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창설준비위원장, 첫번째 총회장(1953)이 된 인물이다. 36회 총회의 '특별위원회'의 위원이었던 박용희와 조승제는 각각 1956년과 1962년에 '기장교회'의 총회장이 되었다. 1951년 제36회 총회에서 고신계 경남노회를 축출한 주역들도 바로 그들이었다. 고신축출은 이 자유주의자들과 소위 중도 보수주의자들의 암묵적인 합작품이었다.

한국교회 자유주의 신학 추종자들의 역정은 여러 교훈을 주고 있다. 먼저 저들은 인본주의적 사고 속에 살아감으로 시류를 잘 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 저들은 교회를 분열하고 무너뜨리는 일에 주역을 담당했다. 지난날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은 실은 저들로 말미암아 시작되었다. 첫번째 분열을 일으킨 사람이 바로 김길창이다. 19492월 경남노회와는 신앙과 신조가 맞지 않다는 이유를 내세우고, 다른 10여명 동류 목사들과 함께 불법노회를 조직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총회의 자유주의자들, 교권주의자들과 합력하여 고려신학을 지원하는 경남노회를 축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저들은 분열자 김길창을 옹호하고 경남(법통)노회를 축출함으로 한국장로교회의 첫 번째 분열을 야기했다. 50주년을 맞는 고신교회는 피해의식에서가 아니라 미래역사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음으로 양으로 틈을 노려 잠입하려는 자유주의 신학을 경계하는 안목을 새롭게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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