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한국 장로교 안에 자리잡은 신학적 포용주의
초대 한국 장로교 선교사들이 철저한 보수주의자들로서 순수 복음을 전하고 교회생활에서 성경공부를 강조한 것은 아주 귀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청교도적 경건생활을 강조하고 보여준 것도 한국교회에 복된 것이었다. 초대 선교사 대부분은 성경을 파괴적으로 비판하는 자유주의 신학을 용인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찍이 미 북장로교 선교본부 총무인 브라운은 다른 지역에서는 보수주의와 진보주의가 공존할 수 있었는데, 조선에서는 고등비평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은 위험한 이단으로 간주되었다고 말했다. 이는 조선의 초대선교사들이 지나치게 완고한 보수주의자들이었다는 불평으로 들려지는 말도 되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잠시였고, 자유주의 신학을 가진 선교사들이 들어왔고, 전과 같은 분위기도 바뀌었다. 차츰 자유주의 신학을 배척하지 않고 포용해 가게 된 것이다. 한국교회 개척시에도 자유주의자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1909년에 한국에서 봉사하고 있던 북장로교 선교사 40명 가운데는 미국 자유주의 신학의 요람이라 할 수 있는 뉴욕 유니온 신학 출신 3명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중에 진보적 사상을 가진 분들이 틀림없이 있었겠지만, 강한 보수성을 가진 선배들의 대세 때문에 자기들의 정체를 드러내지 못하고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910년대에 이르러 자유주의 신학을 가진 선교사들의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때 두 사람의 선교사가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한국교회에 의해서 고소당했다. 그 중 한사람이 미 북장로교 선교사로 1908년에 한국에 와서 황해도 재령지역에서 일해 온 고위량이었다. 그의 영향을 받은 김장호 목사는 성경에 나타난 이적을 부인했다. 홍해의 이적을 간조(干潮)현상으로, 오병이어의 이적을 모든 사람들의 도시락으로 해석했다.
이 때문에 그는 면직 당했다. 그 후 그는 '조선기독교회'를 세우고 철저한 친일파가 되어 일제로부터 훈장을 받기까지 했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에서 사역하는 북장로교 선교회에 속한 대부분 선교사들이 개인적으로는 철저한 보수입장에 서 있었으면서도 자유주의자들에 대하여 유연한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저들이 취한 포용적인 정책이 곧 한국교회 생활에도 영향을 그대로 미쳤다. 이는 미 북장로교 선교부가 공위량의 문제를 취급한데서부터 나타났다. 선교부 전도위원회는 그의 신학이 문제가 되어있는데도 불구하고 재령성경학교에서 가르치도록 하자고 인사위원회에 제의를 했다.
인사위원회는 이 제의를 수용하지 않고 서울로 이동하게 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선교사를 사면하고 일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공위량은 곧 한국에 있는 일본인을 위한 선교사로 파송 받아 돌아와서 한국에서 일했다. 이것은 미 북장로교 선교부가 자유주의자들을 포용하는 방향으로 변모되고 있던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국 미 북장로교 선교부는 이런 정책을 그대로 따랐다. 공위량은 1923년에 미국에서 발표된 이름난 자유주위 신학 선언인 '오번선언'에 서명한 장로교 1300명 자유주의 목사 중 한 분이 되었다.
이제 한국에는 더 이상 보수주의 신학이 지배하는 세계는 아니었다. 자유주의를 포용하는 분위기가 차츰 형성되어 갔다. 1926년에 캐나다 연합교회 선교사인 서고도가 함흥의 성경학교에서 성경에는 역사적, 과학적 오류가 있다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1920년대에 일본, 미국 등에 유학하여 자유주의자가 되어 돌아온 김재준 송창근 채필근 등이 용기를 얻어 기회를 보아가며 그들의 자유주의 사상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34년에는 김춘배 김영주 등이 공개적으로 진보적 신학입장을 발표했다. 이미 언급한 대로 1935년 총회가 이들의 사상을 정죄하여 취소하게 했지만, 그들 마음속에 자리잡은 사상을 취소하게 할 수는 없었다. 서고도는 그의 자유주의 신학을 유포하고 가르치는 일에 별 제재를 받지 않았다. 결국 1938년 제27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아 보수 신학자들이 흩어지자 완전히 자유주의자들의 세계가 되어 버렸다. 위 역사는 오늘의 교회에 심각한 경고와 교훈을 던져 준다. 자유주의 신학의 포용정책은 결국 교회의 붕괴를 가져온다는 사실이다. 20세기에 들어서자 미 북장로교회는 급속하게 신학적 포용주의로 흐르게 된다. 선교사들의 강한 영향아래 살아온 한국장로교회도 이를 뒤따랐다.
한국장로교회의 포용주의는 캐나다 연합교회를 품에 안게 됨으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캐나다 장로교가 감리교회, 회중교회와 하나가 되어 캐나다 연합교회를 조직했을 때(1925), 한국장로교회는 이 교회로부터 오는 선교사들을 개인적으로 심사하여 수용하기로 결의했다.
그런데 바로 다음해인 1926년 그 선교회에 속한 서고도 선교사가 성경에 역사적 과학적 오류가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그를 제재하지 못하고 포용했다. 그는 후에 조선신학교의 후원자로, 교수로 거의 평생 한국에 자유주의 신학을 뿌리는데 어떤 어려움도 겪지 않았다. 그는 자유주의 '한국기독교장로회'측을 위해서는 은인이요 공로자가 되었다.
한국 장로교 역사는 일찍이 자리잡은 신학적, 교리적 포용주의가 한국교회의 배교, 분열, 붕괴의 한 큰 요인으로 작용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일제시대의 배교와 순정 일본적 기독교 건설에 주도적 역할을 한 분들의 대부분이 자유주의 신학의 추종자들이었음을 누구나 잘 알고 있다.
1951년 제36총회에서 고신을 축출하는데 앞장섬으로 한국장로교회 첫 분열을 야기한 주체세력도 이들이었음을 모두가 잘 알고 있다. 교회역사는 신학과 교리 면에서 협상이나 양보나 포용은 교회를 건설하기보다 결국 무너트린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종교적 다원주의(多元主義), 교회적 상대주의, 신학적 포용주의가 지배할 21세기에 50주년을 맞는 고신 교회는 우리 세대뿐 아니라, 오고 오는 다음 세대들이 복을 누릴 수 있는 미래의 참된 교회건설을 위해 신학과 교리(신조)면에 있어서 순수성을 지키는데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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