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밴드에 올릴 때 사진이랑 같이 올렸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다 지워져 그냥 이렇게 올립니다.
I. 비아 돌로로사(십자가의 길; 라틴어로 ‘고통의 길’)
<라, Via-길, Dolarosa-슬픔, 고통 / 십자가의 길 곳곳에 이 표식이 있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예루살렘의 구도심은 4개 종단에서 분활관리하고 있습니다.
관리하는 지역에 경계선이 그어져 있거나 검문검색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각 종단이 지키는 안식일이 달라 각 지역마다 분위기가 확연히 다릅니다.
(이슬람-금요일, 유대교-토요일, 아르메니안, 기독교-일요일)
1.
일반적으로 걸어서 구도심을 들어갈 때는 욥바문이나 다메섹문을 이용합니다.
그러나 저희는 비아 돌로로사(라;Via Dolorosa)를 가기 위해 스데반 문으로 향했습니다.
이곳은 이슬람이 관리하는 지역이기 때문에 어제 안식일을 지낸 이슬람사람들이
많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2.
스데반 문을 통해 비아돌로로사로 가려면 그 전에 베데스다연못을 거쳐가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의 베데스다연못은 아직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통치국가가 바뀔 때마다 앞의 흔적을 흙이나 돌로 덮고 새롭게 건축을 하기 때문에
현재의 지표면에서 약 8m 아래 원래의 베데스다 연못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요 5장에 베데스다연못은 솔로몬의 행각 다섯이 있다고 했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 베데스다연못으로 알려진 곳은 그 이후에 만들어진 연못이라고 합니다.
3.
어쨌든 베데스다는 다음 기회에 다루도록 하고, 조금 더 올라가니 비아 돌로로사의 첫 번째 행선지인 빌라도의 법정이 나왔습니다.
빌라도 법정이 있던 곳에는 이슬람 초등학교가 들어와 있어, 보통 그 옆에 세워진 채찍교회당에서 모여 출발을 합니다.
일행 중 한 분이 가이드에게 ‘십자가를 지고 가는 퍼프먼스’를 해보고 싶다고 했나봅니다.
어쨌든 50달러를 내고 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저를 포함하여 두 가정이 참여하지 않겠다고 하고, 10가정이 남편이 앞을 들고, 아내가 뒤를 바쳐 조금씩 나누어 메고 갔습니다.
4.
로마교회는 ‘예수님의 걸으신 십자가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빌라도법정에서부터 골고다에 이르는 약 800m의 길에 9개 지점을 만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묻히신 곳인 성묘교회라는 곳에 5개의 지점을 만들어 총 14개의 포인트를 기념하고 있습니다.(그들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는 내용들, 예수님이 세 번 넘어지신 장소, 어머니 마리아를 만나신 장소, 또 베로니카라는 여인이 예수님의 땀을 닦아준 장소를 만들어 기념하고 있습니다)
<로마군병들이 구레네사람 시몬에게 십자가를 대신 지게 했을 때, 힘드셨던 예수님께서 바위에 손을 짚었는데, 손자욱이 남아 있다고 ‘바위의 파여진 것’을 기념물로 만들어 두기도 했습니다.>
5.
십자가의 길이라 불려지는 도로는 대부분 이슬람사람의 관할에 속해 있고, 폭이 넓은 곳이 6m, 좁은 곳은 3m정도 밖에 되지 않는 민가지역인데 길 좌우로 상가가 늘어서 있습니다. 오늘 토요일은 유대인의 안식일이지만 이슬람사람들은 안식일이 아니어서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시끌벅적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이 상품화 되어져 각 지역마다 조형물이나 기념물이 만들어져 팔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졌습니다.(십자가를 지고 가신 분들은 느낌이 어땠는지 물어보지 않아 잘 모르겠습니다)
<십자가의 길 좌우에는 이슬람상인들의 가게가 쭉 늘어서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 길은 매우 번잡한 길이었다고 합니다. 그때나 이제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는 자들의 거리처럼 보입니다>
6.
비아돌로로사를 걸으면서 가장 인상 깊이 남은 그림은 13지점에 있는 마리아의 가슴에 칼이 꽂혀 있는 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가 정결례를 위해 처음 성전에 올라갔을 때 선지자 시므온이 했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눅2:35)
아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며 고난을 당하고 죽임당하는 것을 볼 때의 어미의 마음! 마리아는 당신의 아들로 나신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서 이런 비통한 일을 생각이나 했을까요? 그러나 그분이 인간의 죄악된 마음의 생각을 들춰낼 때 죄인들은 그 부끄러움과 패역한 마음을 십자가로 나타낸 것입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 아니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셔야 할 길을 통하여 어머니 마리아가 경험할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의 약속을 선포한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가 아니라 어머니 마리아의 비통함, 그 아픈 가슴을 우리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위로해 주십니다. 곧 십자가 아래에 있던 마리아와 사랑하던 제자 요한을 불러 이르시기를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요한에게 당신의 육신의 어머니를 맡기셨고, 또 요한을 불러 이르시기를 '보라! 네 어머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가족이 형성된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언약공동체입니다-요한은 에베소에서 목회를 했다고 하며, 마리아가 죽을 때까지 곁에서 모셨다고 합니다>
7.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걸으실 때 주님을 따르던 자들이 다 그분에게 등을 돌렸고, 심지어 제자들도 주님이 잡히시자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마가가 홑이불을 덮어쓰고 무리에게 붙잡혀가는 주님의 뒤를 쫓다가 무리들에게 잡히자 이불을 내 팽개치고 벗은 몸으로 도망을 가기도 했고(막14:51-52), 예수님을 사랑하는 제자라고 불리우던 요한이 들키지 않게 예수님의 뒤를 쫓아 갔지만, 또 죽을지라도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했던 베드로도 멀찍이서 예수님이 심문받으시는 대제사장의 집에까지 들어갔지만... 어느 누구도 그분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오직 홀로 모든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8.
그리고 그분은 이제 그 고난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육체에 채우라’고 하십니다. 이 초대는 그리스도께서 홀로 고난당하셨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가 그 고난등 통하여 우리의 죄와 허물을 씻기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의에 옷을 입히신 후 ‘나와 함께 나의 몸된 교회가 받는 고난에 함께 참여하자’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자들을 향하여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 일은 당신이 비아돌로로사를 걸었으니 너희도 그 길에 십자가를 지고 한 번 걸어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협의하신 십자가의 길을 철저히 순종하며 걸어가신 것처럼, 이제 각 성도가 그리스도이 몸의 지체로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친구로서 하나님께서 각인에게 허락하신, 소명으로 맡기신 길을 순종하며 걸어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걷는 길,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은 대부분 고통의 길일 것입니다. 그 고통은 오롯히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에게 주어진 고난입니다. 이를 통하여 내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는 것입니다.
9.
문득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당하시기 위하여 사람의 모양으로까지 자기를 낮추심, 자기를 비우심을 경험한 교회가, 이제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을 위하여 자기를 낮추어, 자기를 비워 그들의 가난과 고난을 함께 감당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된 성도가 주의 남기신 고난에 참여하는 한 걸음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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