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데스다 연못에서
한 유대인의 명절에 예수님께서 성전에 올라가시다가 양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연못을 지나게 되셨습니다.
베데스다연못의 이름은 집을 뜻하는 ‘베이트’와 자비, 긍휼, 사랑 혹은 은혜를 뜻하는 ‘헤세드’라는 단어의 복합명사입니다.
곧 자비의 집, 혹은 은혜의 집이 될 것입니다.
베데스다는 실제로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한 집입니다. 이 못은 물이 동할 때 누구라도 먼저 이 물에 들어가는 자를 낫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많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구하는 환자들, 곧 소경과 절름발이와 혈기마른 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사실 여기 모여 있는 환자들은 소경이고 절름발이고 혈기마른 자, 곧 중풍 병자나 뇌성마비환자들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연못으로 빨리 뛰어 들어갈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연못은 어느 순간에 경쟁과 다툼이 가득한 집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치료의 은혜를 서로 먼저 받기위해 다투고 싸우는 곳입니다.
38년 된 병자는 자신이 낫지 못한 이유를 ‘누군가 자기를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누군가가 먼저 못에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인간의 불의하고 이기적인 욕심을 하나님께 책임이 있다고 말합니다.
왜 베데스다연못이 동할 때 한 사람만 고침을 받게 하시는가? 좀 더 많은 사람이 낫도록 하실 수 있지 않는가? 묻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가 공평하지 못하다고, 공의롭지 못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마치 애굽의 이스라엘백성들이 출애굽은 원하면서 이 일로 바로가 고역을 더 힘들게 만들 때 자신들에게 닥친 그 어려움이나 고통을 인하여 금세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욕하는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습니다.
더욱 거슬러 올라가면 이는 첫 사람 아담과 여자의 모습입니다. 분명 뱀의 유혹을 받았을 때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욕심으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어 놓고,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였느냐?’고 물었을 때에 아담과 여자의 원망과 불평은 둘 다 ‘당신이 내게 주신 저 여자, 저 뱀 때문입니다’고 말합니다.
죄의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여전합니다.
많은 불신자들이나 교회 안에 있어도 신앙 없는 자들이 똑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를 인하여 공격합니다.
하나님이 왜 전쟁이 일어나 죄 없는 사람이 죽게하시는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세월호 같은 사건으로 죄없는 수많은 사람이 죽었는데도 침묵하실 수 있는가? 인간의 죄악으로 인하여 벌어지는 불의한 일들이 하나님의 무책임, 혹은 무관심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증거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인간 군상의 모습입니다. 진정으로 자신의 죄로 인하여 재앙이 임하고 하나님의 진노와 징계가 임하였다는 것은 시인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일어나면 모두 다른 것에서 책임을 찾고 물으려하면서 자신은 그저 하나님의 공의와 공평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실로 하나님께서 친히 이 죄악된 무리들을 만나주시지 않는 이상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무지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아니 스스로 자신의 죄책으로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이유도 이것입니다. 스스로 베데스다연못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할 자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있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2015. 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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