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가 없는 나무’에 관한 변명
최성림 목사
가끔씩 “목사님의 설교는 참 좋습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 민망하고 부끄럽다. 먼저는 실제로 나는 좋은 설교자가 아니며 내 설교는 소위 말하는 ‘좋은 설교’ 축에도 못 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를 더 부끄럽게 하는 것은 과연 내 설교가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고 있는가? 과연 능력있는 하나님의 말씀인가?하는 회의가 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거짓선지자를 삼가라고 경고하시면서 참선지자와 거짓선지자의 차이를 단 한 가지, 곧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15-20)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 설교자가 바르게 설교하고 있으면 성도들은 다 구원의 능력을 누리는가? 바른 설교를 전하고 있으면, 또 사람들이 그것을 듣고 이해하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가? 궁금하여진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 삼으시고, 그들에게 구원의 능력을 베푸시며 더욱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다. 선지자 이사야는 그때 하나님께서 “극상품의 포도나무(이스라엘)를 심었다”고 하시며 선지자들과 직분자들을 보내신 것을 두고 “망대를 세웠고, 술틀을 팠다”고 하시면서, 당신이 심으신 그 포도나무에서 ‘극상품의 포도가 맺히기를 바랐다’고 증거하신다. 하나님이 심으신 극상품의 포도나무, 주님이 친히 신실한 일꾼을 보내어 가꾼 좋은 포도나무이기에 어쩌면 당연히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 일컫는 모세와 엘리야와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던 이스라엘에서 나타난 결과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많은 신실한 선지자들을 보내셨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들이 생명의 구원의 말씀을 듣고 영생하기를 원하시며, 다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이라는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못했고, 유대교회는 나쁜 열매를 맺어 결국 찍혀서 불에 던져졌다. 바른 선지자가 없거나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서 망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성도들이 참 고맙게도 보잘것없는 설교자이고, 부족한 나의 설교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드러내려 하고, 성경의 계시만을 설교하려는 그 중심을 알기에 좋은 설교라고, 듣고 감사한다. 실로 들을 귀 있는 자는 주의 성령께서 그 귀를 열어 주의 말씀을 듣게 하실 것이다. 모든 성도들의 고백대로 우리교회는 매주일 말씀과 성례와 권징이 펼쳐지는 풍성한 예배가 있고, 또 ‘좋은’(?) 설교자도 있고, ‘좋은 설교’가 있다. 또 그런 예배를 드리는 것을 즐거워하고, 그런 소위 ‘좋은 설교’를 분별할 수 있는 신실한 교회의 성원들이 있다.
그러면 우리교회는 살아있는 것일까? 소위 ‘좋은 설교자’가 있고, 바른 예배가 있고, 그 속에 ‘좋은’ 설교를 듣고 좋아하고, 성례를 성실히 거행하고, 권징이 있음을 칭찬하는 교회이기에 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모세 당시의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여 말하는 자신들의 설교자가 얼마나 대단한 설교자라고 칭찬했던가? 그러나 광야의 이스라엘은 열매를 맺지 못하여 다 망하지 않았는가? 요나보다 더 큰 선지자이신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할 때 듣는 자들은 기이히 여기며 얼마나 쫓아 다녔든가?
실로 좋은 설교자, 바른 말씀이 있는 교회, 그런 시대는 분명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고, 그런 교회는 은혜의 특권을 가졌다. 그러나 좋은 포도나무에 가지를 치고 있으면서, 바른 예배, 좋은 설교자, 성실한 성례, 올바른 권징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소위 ‘좋은 나무로 심겨진’ 설교자의 문제가 아니라 그 말씀을 듣고도 열매맺지 못하는 가지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실까? 좋은 설교를 들은 자들은 그 열매를 내어야 한다.
2015.06.07. 주보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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