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이 된 복음주의
복음주의는 일반적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오류가 없는 말씀으로 그대도 받아들이는 입장을 말합니다. 폭 넓은 의미에서 보면 성경을 비평의 대상으로 삼는 소위 자유주의신학과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지금 우리는 복음주의에 속한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전통적인 보수신앙을 표방하는 대부분의 교단들은 복음주의 교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주의는 매우 건전한 성경관을 바탕으로 하는 바람직한 신앙의 진지라고 할 수 있는데, 소위 크리스챤이라면 여기에 무슨 다른 이견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러나 ‘주의(ism)’란 말이 어떤 단어 끝에 붙으면 원래의 뜻이 왜곡됩니다. 권위라 단어는 그 자체로 중립적이지만 '권위주의'라면 대번 부정적으로 들립니다. ‘00주의’라는 말이 붙으면 모든 것의 최우선 순위가 그 ‘00’이라는 가치로 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권위주의’는 권위 그 자체를 최우선으로 강조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공산주의’라는 단어에는 그것이 추구하는 최고의 철학적 가치관이 담겨있습니다. ‘민주주의’에 있어서 최고의 권력은 ‘다수’로 부터 나옵니다. ‘다수’의 논리에 반하는 모든 것은 민주주의의 적입니다. 이렇게 ‘주의’는 그것이 추구하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정당화시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이는 현대의 우상을 ‘이데올로기(주의)’라고 규정하여, 그것을 갈파하기도 했습니다.
언필칭 ‘복음주의’는 ‘복음’과는 다른 말입니다. 복음주의는 복음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복음을 최고의 가치로 두는 것이 성경적으로 무엇이 잘못된 일이란 말입니까?
칼빈이 죽은 후에 그에 대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 정리하면 연구하는 ‘칼빈주의’ 신학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부터 교회에서 칼빈주의, 개혁주의라는 소리를 많이 듣고 배우면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대학에 입학하여 칼빈이 쓴 기독교 강요를 읽어보게 되었을 때, 제가 가장 놀란 것은 제가 배운 칼빈주의와 칼빈의 직접 썼다는 책 사이에 다른 점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칼빈주의’가 칼빈의 가르침과 사상을 요약하고, 발전시킨 것이라면 ‘칼빈’이라는 텍스트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었는데, 실상 ‘제가 배운 칼빈주의’는 칼빈의 가르침과 다른 방향으로 진행된 부분이 많았던 것입니다.
물론 ‘복음’ 자체에 문제가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주의’는 ‘복음’ 그 자체와 같지 않고, 그 복음을 최고의 가치로 두려는 순간에 이미 복음을 왜곡시킵니다. ‘복음주의’가 복음 그 자체를 절대시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로 그러한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복음주의가 과연 복음을 순수하게 지켜가는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우상적 이데올로기가 복음주의에 섞여있는 것은 아닌가를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주의는 전도를 왜곡합니다. 복음주의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인 전도 지상주의, 혹은 선교 지상주의입니다. 전도와 선교가 신앙생활의 최고 가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는 것이 신자의 삶과 교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되는 것입니다. 매우 성경적인 주장 같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봅시다. '복음'이 가장 중요시되는 것과 '복음 전하는 것'이 가장 중요시 되는 것에는 뭔가 차이가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전도의 행위가 ‘복음전파의 길을 막았습니다’ 제가 대학 1학년이었을 때, 교회의 중고대연합 여름수련회를 김해의 한 계곡에서 가졌습니다. 그때 주제가 선교와 전도에 관한 것이라 어느 대학선교단체의 교제를 가지고 전도하는 방법을 배우고, 마을로 내려가 ‘복음을 전하는 전도 실습’인가를 했습니다. 150여명의 중고대학생들을 한꺼번에 시골 마을에 풀어놓으니 마을엔 거의 주민 반, 학생 반이었습니다. 조장이었던 저는 후배들을 독려하기 위해서라도 배운 대로 열심히 마을을 돌며 복음을 전하였는데, 세 번째 사람을 만났을 때 이미 그 분도 전도를 당했다고 ‘됐다!’고 하시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가셨습니다. 몇 사람에게 절차를 따라 복음을 전하고 같이 영접기도를 하고 난 후에는 이름과 연락처를 받아서 교회로 돌아와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였드랬습니다.
고신대학에 들어갔을 때 찬양단의 열풍이 온 나라에 미쳤고, 저도 학교와 교회 안에 있는 선교단에서 활동을 하면서 학교에서는 부산역, 남포동, 용두산공원, 해수욕장이나 태종대공원, 전철역, 심지어 국제시장에 있는 아주 큰 절 앞에서 호기롭게 찬송하며 노방전도를 하였습니다. 교회에서는 병원이나 인근의 공원이나 전철역,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니면서 찬송도 부르고 일종의 기도회도 하고, 전도도 했습니다. 욕도 많이 먹고, 사람들의 주목도 많이 받고.... 나름대로 ‘복음 전하는 것'을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는 저만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전도의 열풍이 불고 찬양단이 우후죽순처럼 세워지던 당시의 전국의 많은 젊은 학생들이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한 복음전도의 사명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열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한 기독교잡지에서 행한 설문조사를 결과를 우연찮게 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한국의 대학생들이 기독교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 것인가에 관한 설문조사였습니다. 설문조사의 결과는 아주 부정적이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기독교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더욱 부정적이 되어간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냥 무관심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악의적인 감정을 갖고 있는 자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특히 저의 마음을 어지럽힌 것은 대학생들의 대다수가 학원이나 노상에서, 그리고 가정을 방문하면서 복음을 전하던 당시의 전도방식에 의해 교회를 부정적으로 보게 되고, 이로 인해 전도를 받는 것에 부정적이라는 답변이었습니다. 백보를 양보하여 사단이 교회가 자라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전도하는 데 대한 반감이 커져가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더라도(그 당시의 입장에서) 어떻게 전도의 행위가, 생명의 복음을 드러내는 일이 오히려 복음이 전파되어지는데 방해요인이 되고, 복음을 가진 교회를 부정적으로 보게 하는 결과를 낳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때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은 ‘전도’와 ‘전도행위’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내가 ‘복음’이 아니라 ‘복음전하는 일’에 관심을 집중하여 복음을 희석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전도의 행위’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사람을 만나 그 사람에게 복음의 내용 중 일부를 전달하는 행위를 ‘전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도의 행위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복음을 열심히 전하는 사람’이라고 하고, ‘한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별칭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여기서 문제는 그 복음전하는 자의 ‘복음의 내용’이 아니라 복음전하는 자의 ‘복음전하는 행위’에 대한 평가라는 사실입니다.
전도가 복음을 왜곡해서는 안됩니다. 전도는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을 전하는 일이 복음을 왜곡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도와 ‘전도행위’를 동일하게 인식합니다. 그러나 ‘전도’와 ‘전도행위’는 다른 것입니다. 물론 전도는 전도행위를 포함합니다만, 전도행위자체로는 전도라 말할 수 없습니다. 전도는 교회나 교인들의 존재자체로 전달되는 말씀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전도행위의 모든 요식을 갖추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저로 인해 교회를 알고 다니는 친구들이 몇몇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저는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전도행위를 한 적이 없습니다. 돌이켜 보건데, 그들이 교회로 인도되고,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된 것은, 저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든 복음에 전달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저에 대해 교회에 대해 묻고 나오길 원했습니다. 반면에 제가 "복음을 전했던" 그 수많은 스쳐지나간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복음주의에서 전도와 선교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할 때, 진정한 전도의 의미를 왜곡합니다. 전도행위는 곧 전도라는 생각을 줍니다. 아닙니다. 전도행위는 전도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전도는 일차적으로 복음이 선포되어지는 설교이며, 그리고 성도에게서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 자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의 존재자체가 세상에 주는 메시지가 되어야 합니다.
제가 전도행위를 충실하였던 그 때, 저는 하나님 앞에서 참 뿌듯해 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에 저의 삶은 어떠했는지 돌이켜보면 너무나 극과 극인 삶을 살았더랬습니다. 죄와 방탕에 빠져 헤매다 주말에 교회에 와서 회개하고, 열심히 회개하고,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전도(행위)하면서, 저는 하나님 앞에 나름대로 할일을 다했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분명 저의 삶은 전도와 거리가 있었지만, 저는 전도한다고 하고 있었습니다.
전도지상주의는 전도의 바른 개념을 흐리고, 성도의 삶을 종교행위와 분리합니다. 전도행위만 다 하면 전도를 다 했다고 착각하도록 만듭니다. 선교헌금하고, 선교지에 몇 번 갔다 오기만 하면 선교를 했다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삶과 동떨어진 전도와 선교는 성경적으로 볼 때 어불성설입니다. 한국교회가 도리어 전도의 걸림돌이 된 것은 바로 전도와 전도행위를 동일시하게 만들고 그 개념을 왜곡시킨 복음주의의 영향 때문입니다.
복음주의는 복음의 내용을 왜곡시킵니다. 복음주의에서 복음을 강조하지만, 실제 중요한 것은 복음의 내용보다 복음이 전파되는 것의 효율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잘 전해지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다보니, 죄인인 사람들에게 껄끄러운 것이 되어야 할 복음을 잘 다듬어서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는 일이 일어납니다. 죄인들이 듣기에 거북하지 않고, 좋아할 내용으로 만들어 전달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 복음으로 인하여 상처받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도록 그들의 귀를 가려주고, 그들의 유익을 빌어주는 말씀으로 다듬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이름을 가지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말씀 전부가 아닌, 사람들이 듣고 좋아할 만한 말씀만을 골라서 그들이 복음에 설득당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지,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도자 예배라는 것이 생겨났습니다. 교회의 문턱을 낮추어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부담 없이, 편하게 와서 복음을 듣게 하자는 취지입니다. 예배에 대한 이야기는 차치하더라도, 거기서 전해지는 메시지가 어떤 것이 될지는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고발했던 성령님의 음성이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바울이 전했던 의와 심판에 관한 복음은 거기서 전해질 수 없습니다. 복음에는 사람들의 양심을 찔러 회개하게 만들고, 죄에서 돌이켜 주님께로 돌아오도록 기능합니다. 사람의 비위에 맞추어 포장될 수 있는 복음은 없습니다. 복음주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공의에 관한 설교를 찾기 힘들어진 지 오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우리에게 위로와 소망이 되시는 분이셔야만 하지, 두려워해야 하는, 때론 잔인하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에게 맞는, 우리가 기대하는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그렇게 철저하게 왜곡되고 변질됩니다.
복음주의에서 복음의 내용이 변질되게 된 데는 교회성장학의 영향이 절대적입니다. 진정한 교회성장학이 있다면 그것은 적어도 교회의 양적인 팽창을 위한 테크놀로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세상을 이길 힘과 권세를 그 숫자와 정치적 영향력에서 찾으려 할 때 그것이 하나님 나라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교회성장을 위한 많은 프로그램, 세미나에 수많은 목회자와 교회 관계자들이 모입니다. 거기서 아무리 그 형식과 하드웨어를 본딴 들, 그렇게 해서 교인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교회가 커진다 한들, 그것이 교회의 본질적인 참 됨과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죄인이 거듭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우리가 노력을 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는 우리의 노력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프로그램에나 조직이 교회에 접목될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프로그램이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데 ‘얼마나 효과적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성경적인 원리에 충실한가?’에 있습니다.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한다면 그것은 순전한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수를 더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가야 한다는 질적인 성장은 명령이요, 과제입니다. 이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힘과 양의 논리에서 벗어나, 본질적인 것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복음이 왜곡되면, 예배가 왜곡됩니다. 복음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달콤한 주술이 되고, 예배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는 곳이 아니라 구원의 자기 확신과 맘몬숭배를 실현하는 우상숭배의 장이 됩니다. 이러한 신성모독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복음주의가 왜곡시킨 복음은 실로 우리의 존재와 삶을 왜곡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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