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언약교회 가정 기도회[2014년12월 7일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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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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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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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 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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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265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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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봉독 |
욥7:11-21,롬8:31-39 |
다 같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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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교 |
… 의인 욥의 당하는 고난 … |
부모대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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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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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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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기 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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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같 이 |
주제 : “욥이 자신을 주목하고 게시는 하나님을 원망하였다”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근거로 ‘욥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을 받은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이것은 정당한 것일까요?
1. “욥의 고난에 대한 두 입장”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이유를 몰랐지만 욥의 아내나 친구들은 그 고난의 이유를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1) 욥의 아내는 고난의 이유가 하나님의 신실치 못함에 있다고 보았습니다.(2:9) 그녀는 ‘하나님이 이유도 없이 욥에게 고난이 임하도록 하셨기에, 이제 우리는 이런 불공평한 하나님을 떠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2) 욥의 친구들은 욥의 아내와는 완전히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너, 곧 욥의 고난의 이유라’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나는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시며, 약속에 신실하신 분인지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은 죄인을 벌하신다. 그러므로 욥 너는 죄인이다.”고 충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은 서로 달랐지만 그 출발점은 똑같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이 게시하신 것 이상으로 욥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판단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판단으로 욥을 압박했습니다,
병문안을 할 때나 심방을 할 때에 매우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다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죄악에 빠진 성도에 대하여 돌이킬 기회를 깨닫게 하시고자 여러가지 고통으로 징계하십니다, 그러나 교회가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하는 성도의 고난 앞에서 섣불리 하나님의 뜻을 판정하며 성도를 판단하는 것을 삼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욥의 친구들의 논리나 욥의 아내의 논리를 따르는 어리석은 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나아가는 길의 미래를 알지 못하고, 또 우리가 당하는 일의 이유를 알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이유를 다 알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게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당하는 고난의 이유를 알지 못할 때 그것은 우리가 그 고난의 이유를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우리에게 알게 하시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마저도 우리에게 유익인 것입니다.
2. “욥이 생각한 고난의 이유”
욥에게 있어서 고난의 이유는 그 하나님 야웨께서 그에게 지나치게 관심을 까지신다는 것이었습니다.(7:12,19-20) 욥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바다나 용으로 보느냐?고 항변하는 것은 야웨께서 마치 자신을 이방인처럼 대우하신다는 말입니다, 곧 욥이 마치 언약공동체를 혼란스럽게 하는 무리나 괴물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을 살피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왜 나를 단련하시는데 이토록 많은 시간을 허비하시는 것일까? 라는 하나님의 지나친 관심이 욥을 두려워 떨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그의 유일한 소망은 죽음뿐입니다.(15) 물론 욥의 이 말은 이유를 알지 못하는 고통속에서 소망도 없이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말이지 죽음이 선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이 더 이상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지 말 것을 요청합니다(16) 이 피맺힌 절규가운데서도 욥은 자신이 여전히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합니다. 여전히 자신의 생명이 야웨의 손에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생명이 아직 위협당하고 있지 않음은 야웨께서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사단의 두 번째 천상회의에서 가결된 결정은 욥의 생명을 제외한 모든 것을 야웨께서 사단에게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까지도 놓아주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욥의 절규는 높으신 하나님께서 무가치한 한 인생에 대하여 관심을 까지시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야웨께서 그의 생애를 주목하고 계시며 여전히 그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것을 인하여 슬퍼하고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을 향한 욥의 원망”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나이까?”(17). 또 “내가 범죄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20)라는 욥의 항변은 지금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부당성을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크신 주께서 자신처럼 비천한 존재를 마음에 두고 아직 생명을 놓지 않으시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요청은 하나님께 수용되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고난당하는 욥을 “아침마다 찾아오셔서 권징하시고, 분초마다 시험하시고” 게셨습니다”(18) 잠시도 욥을 그대로 두지 않고 감시하시는 하나님의 눈. 이것이 지금 야웨 하나님을 향한 욥의 생각입니다,
욥의 생각에 그는 하나님께 어떤 뚜렷한 잘못이나 반역한 일이 없었습니다, 사람을 향하여서도 도리를 망각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어찌하여 나로 과녁을 삼으셔서 스스로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라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심각한 손상을 입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과연 이 질문은 하나님께 무거운 짐을 안겨다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고난을 조장하신 분이십니다. 욥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사단과 결탁하여 욥을 사단에게 내어 놓은 장본인이 하나님이십니다” 욥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할지라도 욥을 고난에 내어놓으신 것으로 인하여 이미 하나님의 공평성에 무거운 짐이 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21) 여기에 욥의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그의 항변의 저변에는 오직 야웨만이 자신의 정황을 아신다는 고백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은 아무리 심하다 할 지라도 그 심판의 궁극적인 목적은 회복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욥의 신앙은 죽음 앞에서 조차도 하나님께 자신을 던지는 것입니다, 이는 그 하나님만이 자신의 구원이시며 생명이 그 분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 죽더라도 죄의 용서를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이 있을 때 주님의 뜻을 구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 그 고난의 이유를 하나님께 맡겨두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맏아들까지 내어주신 분이십니다.(롬8:31-3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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