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Best”?
Dr. C. Van Dam(캐나다개혁교회신학교교수)
교회에 갈 때는 무슨 옷을 입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적절한 것일까? 사실 이 주제는 그리 자주 논의되는 질문은 아니기도 하고, 또 오늘날의 유행자체가 대체로 편안하고 캐주얼한 복장을 선호하기에 특별한 행사에 특별한 옷을 입는 일에 대하여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경향이 많다. 이런 이유로, 예배에서도 “Sunday best”(이 말은 성도들이 주일예배를 드리러 갈 때에 자신이 소유한 ‘가장 좋은 옷’을 입는데서 유래한 단어로, 통상적으로는 ‘나들이옷’ 등으로 번역된다). 에 대한 관심이 점차 무너지려는 낌새가 보인다. 심지어 개인의 자유가 강조되어지는 문화환경에 의해 예배로 나올 때의 의복문제를 주제로 삼는 것조차도 불쾌해 하고 화를 내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들에게 들을 수 있는 전형적인 대답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에 우리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 중요하게 여기시지 우리가 무엇을 입고 당신 앞에 나아왔는지에 대하여서는 개의치 않는다고 말한다.
물론 이런 논지는 정당한 대답이다(시24:4). 하지만 하나님께서 공적인 예배를 위해 입는 옷에 대해 개의치 않으신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이의가 제기되어야 한다. 아무리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오늘 날이라도 예배를 위한, 교회로 나아가기위한 옷을 아무렇게나 입는 풍토(trend)는 좋은 것이 아니다.
옛것으로부터 새것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애굽의 압제로부터 자유케 하신 후,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놀라운 경험을 맛보았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현현 속으로 나아가 그분의 음성을 듣기 전에, 그들은 스스로 정결케 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곧 옷을 빨고 산에서 멀리 떨어져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함부로 산을 범하는 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다(출19:10-12).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하심을 사람이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존경과 두려움을 받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자기 백성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나타나는지도 문제가 된다고 가르치셨다. 그분은 백성들의 정결을 요구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정결의 명령을 통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진 채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더불어 하나님의 이 정결요구는 사람들의 일상의 패턴을 파괴하였다. 출19:11v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옷을 빨고 제 3일까지 기다리라고 하셨는데, 이는 정결을 유지하는 시간이 이틀 이상임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우리가 본문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정결이 어느 정도의 수준이며, 어떻게 시행되었는지에 대해 정확하게 읽을 수는 없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의복, 곧 옷이다. 옷은 깨끗이 빨아져야 한다. 정결함에 있어서 일상의 다른 옷들과는 뚜렷히 구별되어진 옷이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에 부르실 때에 그들에게 거룩(구별)과 존경을 요구하셨으며, 그 명령은 옷에 대해서는 더욱 명백하게 요구되어졌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에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신적인 관심은 성막이나 성전의 제사에서도 명백하다.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이 거룩한 지역에는 그 영역마다 접근할 수 있는 거룩의 등급이 있었다.
일반사람들이 이 특별한 성역에 들어오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가장 바깥쪽 영역에는 그 집을 지키도록 명령을 받은 레위인들이 자기의 의복을 정제하고 접근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영역인 성소에는 오직 제사장들만이 들어갈 수 있었으며,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세 번째 영역의 거룩한 지성소에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 차례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각각의 영역에 접근하기 위해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입도록 명하신 드레스 코드를 따라서 옷을 입어야만 했다. 대제사장을 위하여 만들어진 옷은 매우 정성들여 만들어진 것이었다(출28:1-39). 그리고 일반 제사장들은 세마포 옷을 입어야만 했는데, 이 옷은 “영화롭고 아름답게” 디자인된 옷으로, 원어로 “영광과 광채를 위하여”라는 의미인데, 대제사장의 옷(출28:2,40)을 표현한 것과 같은 의미였다. 이 단어들은 또한 성전의 봉사자들이 입었던 옷들의 어떠함을 전달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로, 훌륭한(finery), 화려한(luxury), 놀라운(splendid) 아름다움이라는 이미지를 전달해주는 단어들이다.
요점은 그 옷들이 제사장이 하나님의 현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어떤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옷들은 제사장이 성막이나 성전에서 직무를 행할 때 입었던 것이기 때문이다(cf. 신12:7,18). 적합한 옷의 중요성은 심지어 제사장이 번제의 재를 버리는 것과 같은 하찮은 일을 할 때조차도 하나님께서 이 일을 위하여 특별히 명하신 옷을 입었어야만 한다는 사실에서 더 강조된다(레6:10-11).
이 모든 사실들은 지금 우리가 그 때의 이스라엘백성들이 경험했던 상황과 동일한 정황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오늘날에도 적절한 것이다. 곧 하나님께서는 이제 자기 백성들을 애굽의 죄와 사탄의 권세로부터 “우리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해방하셨다(고전5:7). 이것은 우리가 시내산으로 나아가는 대신, 이제 시온산으로 예배하러 나아갈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히 12장에서,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는 말씀을 읽는다. 말하자면 지금 우리는 출애굽당신의 이스라엘백성들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 하늘 면전에서 예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더욱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 뿌림 때문에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19-22)는 명령을 받고 있어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의 거룩한 제사장으로서(cf. 벧전2:5), 구약의 대제사장이 오직 일년 일차밖에 할 수 없었던 일을 감당하도록 허락을 받은 자들이다. 우리가 예배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는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이다! 누가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완전히 깨닫고 감사할 수 있겠는가?
이 중대한 진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현현이 있는 예배를 위하여 교회로 나아갈 때에 우리가 무엇을 입어야 할 것인지에 관한 통찰력을 제공해 준다. 만약 하나님께서 구약시대 때 제사장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접근할 것인지에 고려하셨다면, 지성소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이끌려지는 제사장적 특권이 오늘 교회 안의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이 때에, 구약에서 제사장들에게 명하셨던 것처럼 오늘 날에도 구별되어진 의복을 고려하지 않으실까?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우리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여전히 동일하게 거룩하시고 위엄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왕 중의 왕이시며,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주의 주시다. 그분께서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존경과 거룩한 두려움을 요구하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기대하신다. 우리는 본성적으로는 비록 비참한 죄인일지라도, 하나님께 나아갈 때, 두려움(awe)과 존경(reverence)과, 최선의 태도(attire)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현현 앞에서 “영화롭고 아름다운(dignity and beauty)” 우리의 옷을 차려 입는 제사장적 복식의 원리를 반영하는 것이다(출28:2,40; 히12:28-29).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성령시대임을 감안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의 복식(服飾)의 세부적인 면까지 관여하지는 않으신다. 우리는 예배를 위해 어떻게 입을 것인지에 관한 법이나 규례(draft rule)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보내어 주셔서 우리가 말씀에 설명된 적절한 원리들과, 말씀을 수단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결정을 할 수 있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성령께서 활동하실 공간을 드려서, 그분께서 우리와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조성하실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속주의와 자기의 편익을 위해 세상의 질서를 선호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하고, 하나님의 집을 지키는 자로서 하나님의 존귀와 거룩을 위한 가치와 규범들을 무너뜨리려는 움직임에 대하여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것은 복식의 영역에서도 그러하며, 특별히 예배드릴 때의 복식을 포함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사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문화에 쉽게 영향을 받는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을 포함한 대부분의 권위에 대하여, 특히 자신의 이익과 관계가 없어 보이는 권위에 대하여 옷을 아무렇게나 입고(dress down), 그 권위를 조롱하는 자세를 취한다. 경외심의 결여가 오늘 우리 사회에 넓게 퍼져 있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성도는 매우 신중하게 주일을 위해 준비할 필요가 있으며, 주일을 준비하는 것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경외심이 사라진 무리들과는 구별되어진 자들임을 나타내야 한다(출31:13-17)
우리가 교회당에 들어갈 때, 우리는 예배를 위해 특별하게 준비된 공간에 들어가는 것이며, 그곳에서 회중은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현현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의 예배와 기도는 우리를 지성소로 데리고 간다. 우리가 입은 옷은 하나님 앞에 선 우리의 경외심을 반영해야만 한다.
여기에는 호기심에서나 영적 갈구 때문에 교회모임에 오게 된 불신자들을 위한 요소도 있다. 그러한 사람은 스스로는 적절하게 하나님 앞에 서는 것에 대한 준비할 기회가 없었거나 예배의 구성요소가 무엇인지를 몰랐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이 교회 안에서 문제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자신의 모습이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는 자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아니할 때에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은 요구되어질 수 없을 것이다. 실상 많은 사람들이 세속문화 속에서 어떤 특별한 행사가 있다면, 심지어 단순한 오락에 불과한 골프모임에서조차도 거기에 적절한 복장을 갖춘 드레스코드가 품위에 맞다고 생각한다면, 사람들이 지존하신 하나님께 나들이옷(Sunday best)보다 덜한 옷을 입고 공적인 예배로 나아간다는 것은 하나님께 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닌가?
주의해야 할 또 다른 요소도 있다. 회중은 거룩한 제사장적 사람들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점이다. 구주의 신부로서 성대한 혼인잔치를 기대하며 살면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때에 구속의 흰 세마포 옷을 입게 될 것(계19:7-8)을 준비하는 자들이다. 그 날에 참여하게 될 때에, 우리는 가장 영광스러운 예배에서 그분 앞에 나타나게 될 것인데, 그때 최선의 것으로 입음으로써 우리의 주요 통치자이신 그분을 영화롭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잘 알려진 한 구약학자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방식이 종종 그의 마음의 태도를 반영한다”(cf. 마22:11-14)고 강조한 바 있다(R.K. Harrison, Leviticus, p.75)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현현 앞에 서 있는 존재로서, 예배의 자리에서 우리의 경외심과 놀라움의 감정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자. 예배의 자리는 우리가 당연하게 받을 수 있는 특권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특권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12:28-29).
클라리온 Volume 58, No.18 (August 28,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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