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개혁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 http://www.lovereformed.com/)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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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유아 세례에 관한 글을 남긴적이 있었지만 또 다시 글을 쓰는 이유는 이것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지난번에 미쳐 발견하지 못했던 점들을 추가로 작성하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은혜를 받을 수 있는 통로를 성경을 통해 가르쳐 주셨는데 이미 우리가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서에서 배웠듯이 '말씀(설교)'과 '성례(세례와 성찬)'와 '기도'이다. 많은 이들의 기대에도 불과하고 유감스럽게도 찬양이 빠져있는데 유일하게 찬양으로서 은혜의 방편에 포함될 수 있는게 있는데 바로 '시편찬송'이다. 시편찬송은 그 자체가 말씀이므로 그것이 가능하다.
여하튼 오늘은 이 세가지 은혜의 방편 중에 세례, 한걸음 더 나아가 유아세례에 관한 얘기만 나눠보자. 필자가 '또 하나의 축제'라고 제목을 붙인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교회에서 축하를 주고 받을 만한 일들이 무엇이 있을지 떠올려보자. 생일, 결혼, 자녀, 취업, 찬양 경연대회 우승 등등이 있을 것이다. 그 중 우리가 가장 기뻐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사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우리가 은혜와 위로를 얻는 것 만큼 기쁜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주로 개인적인 기쁨과 만족으로 남을 가능성이 더 많다. 그렇다면 세례와 성찬은 어떠한가?
보이는 말씀으로서 세례와 성찬이야 말로 가시적인 기쁨과 축하가 오고 갈 수 있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축제의 '그림자'이다. '그림자'라 표현한 것은 실체가 존재하며 그림자와는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하고 완벽한 은혜 그 자체가 임할 날이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 실체를 날마다 기대하고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축제의 하나인 세례, 특히 신자의 자녀가 태어났을 때 그 아이가 태어나기 이전, 아니 천지가 창조되기 이전에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영원한 작정과 선택으로 태어난 언약의 자녀를 '인'치고 '표'하는 유아 세례, 이것은 분명 우리 가운데 보이는 위로와 기쁨이다.
필자가 혹은 아무개가 유아였을 때 우리의 부모의 신앙고백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인받을 것을 지금은 알 수 있지만 그 어린 아기였던 우리는 전혀 기억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태어나고 세례를 받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업신여겼던 죄인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양자로 택함 받은, 이 이해 할 수없는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또 한번, 아니 매번 깨닫게 된다.
개혁교회에서는 아이가 태어나 유아 세례를 받을 때 양가의 모든 어른들과 참석 가능한 모든 친척들이 모인다. 그렇다. 이것은 마치 작은 축제인 것이다.
오늘도 그러했다. 아침부터 교회가 왠지 모르게 어수선했다. 붕 떠있다는 느낌이 정확하겠다. 많은 타 지역의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모두 한 아이의 세례식을 축하해 주기 위해 온 사람들이다. 할아버지들, 할머니들, 삼촌과 이모들, 사촌들...
모두 숨죽이며 아이의 세례식을 지켜보고 세례식과 예배가 끝나면 모든 성도들이 그 아이를 보고 축복해주기 위해 줄을 길게 선다. 부모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고 가벼운 포옹으로 힘을 더해 준다.
이미 전 주에 이 아이의 세례식이 있음을 광고하였기에 몇몇 성도들은 작은 선물과 카드를 작성해 주기도 한다.
이 후에도 그 아이와 부모는 다과를 준비하여 그 아이를 안아보고 사진을 찍으려는 성도들과 즐겁게 교제하며 여느때보다 많은 대화를 서로 주고 받는다. 한 아이로 인해 모두가 즐거운 하루가 되는 것이다.
한국의 교회와 약간이라도 다름을 발견했는가? 물론 문화와 교회마다의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재로 필자의 한국에서의 교회를 떠올리면 조금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 상대적으로 존재한다.
무엇일까? 한국에서는 그 아이와 그 부모만의 기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을 많이 느꼈다. 물론 한국의 성도들도 축하를 해주기는 하지만 조금은 수동적인 느낌을 버릴 수 없다. 광고도 없기 때문에 마음으로 미리 축하를 준비할 수도 없고 아이의 조부모가 같은 교회의 회원이 아니라면 다른 친척들의 축하도 기대할 수 없고 심지어 아이의 아버지가 신자가 아니면 그 어머니 혼자 아이를 안고 세례를 받는 경우도 있어 더욱 안타까울 때도 있다. 세례식이 끝나도 아주 가까운 이들을 제외하고는 그 아이의 세례식에 대한 관심은 그 순간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기로는 한 아이가 태어난 그날 보다 처음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세례를 받고 가시적으로 하나님의 양자로 받아드려진 그날이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 죄 중에 잉태되어 하나님 앞으로 가는 그날까지 범죄하기를 쉬지않는 육신의 첫날 보다 비록 우리가 그러할지라도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기로 작성하심을 보여주신 그날이 더 중요하다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참고로 개혁교회 대부분의 신자들은 아이가 태어난지 2주정도만에 산모는 몸을 추스리고 아이를 가능하면 빨리 하나님 앞으로 데려가 인쳐짐 받기를 애쓴다. 물론 억지나 무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로 그것이 가능할만한 신체와 환경을 가지고 있다.
주위에 세례를 받은 아이가 있는가? 그 아이와 부모와 성도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감사하기를 바란다. 우리의 위로와 기쁨은 세상의 성공과 축적된 부에서 오지 않고 바로 이 순간 이 자리에서 나온다. 놓치지 않고 누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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