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10월06일 주보/칼럼(의사소통!)
언약
2024-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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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의사소통, 말이 통한다는 것은
단순히 한 가지 언어로 서로 대화를 한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교회 안에서는 더욱 그러한가보다.
종종 같은 교회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는데
교회에 따라서 성도들간에 복음에 대한 이해가 다르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해가 다른 것을 본다.
또 기도에 대한 생각이 다르고,
교회연합이나 절기, 교회 표지, 은사, 교회의 종말등을 생각하는 것등....
다 똑같은 것에 대해 말을 하는데
그 의미가 서로 다른, 너무나 다른 것을 느낀다.
그런데 서로 언어가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다른데도
서로 다른 언어로 말을 하는데도
교회 안에서 의사가 소통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다른 나라 다른 언어 다른 환경이지만
서로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의사소통이 된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하심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천하만민을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셨다.
그 방편이 바로 방언이다.
방언은 분명 하나님께서
타락한 온 세상을 흩어지게 만들었던 도구였다.
그런데 성령님이 임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 방언을 통하여 다시 세상을 하나되게 하셨다.
방언은 예루살렘성전에서 사도들의 말하는 것이
천하각지에서 모여온
모든 사람들의 귀에 알아듣는 말로 들리도록 역사했다.
서로 말이 달랐지만 하나님께서 알아듣게 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방언일 수 있고 다른 하나님의 사역을 통한 역사일 수도 있다.
어쨌든 바벨탑사건으로 혼잡하게 되었던 언어를
하나님께서 오순절 날 통일되게 하신 것이다.
이것이 신앙고백의 중요성을 말한다.
성경을 읽으면서 백 사람이 백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심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신앙고백이다.
서로 언어가 다르지만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은
성경을 보는 관점이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통일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신앙고백이다.
그러므로 신앙고백이 서로 일치한다면
아무리 다른 환경에서 다른 언어로 설교를 들어도
단순히 한 가지 언어로 서로 대화를 한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교회 안에서는 더욱 그러한가보다.
종종 같은 교회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는데
교회에 따라서 성도들간에 복음에 대한 이해가 다르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해가 다른 것을 본다.
또 기도에 대한 생각이 다르고,
교회연합이나 절기, 교회 표지, 은사, 교회의 종말등을 생각하는 것등....
다 똑같은 것에 대해 말을 하는데
그 의미가 서로 다른, 너무나 다른 것을 느낀다.
그런데 서로 언어가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다른데도
서로 다른 언어로 말을 하는데도
교회 안에서 의사가 소통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다른 나라 다른 언어 다른 환경이지만
서로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의사소통이 된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하심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천하만민을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셨다.
그 방편이 바로 방언이다.
방언은 분명 하나님께서
타락한 온 세상을 흩어지게 만들었던 도구였다.
그런데 성령님이 임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 방언을 통하여 다시 세상을 하나되게 하셨다.
방언은 예루살렘성전에서 사도들의 말하는 것이
천하각지에서 모여온
모든 사람들의 귀에 알아듣는 말로 들리도록 역사했다.
서로 말이 달랐지만 하나님께서 알아듣게 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방언일 수 있고 다른 하나님의 사역을 통한 역사일 수도 있다.
어쨌든 바벨탑사건으로 혼잡하게 되었던 언어를
하나님께서 오순절 날 통일되게 하신 것이다.
이것이 신앙고백의 중요성을 말한다.
성경을 읽으면서 백 사람이 백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심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신앙고백이다.
서로 언어가 다르지만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은
성경을 보는 관점이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통일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신앙고백이다.
그러므로 신앙고백이 서로 일치한다면
아무리 다른 환경에서 다른 언어로 설교를 들어도
동일한 신앙을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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