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부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도 과하다 하겠느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함이도다”(고전 9:11,12)
다른 사도들의 생활과 비교하여 섬김에 있어서 전혀 물질적인 것을 원하지 않고, 또 결혼을 하지 않은 바울을 보고 그의 사도권에 대해 고린도 교회성원들이 의심을 품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자신이 이 마땅히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누리지 아니하는 이유를 밝힙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합당한 권리가 따릅니다. 사도바울에게도 이러한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방해가 될까 염려하여 이 권리를 포기하고 불편하게 지낸다고 말합니다. 특권을 사용하면 편리합니다. 부족함을 조금이라도 면할 수 있습니다. ‘포도원주인이 마땅히 그 포도실과를 먹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양을 기르는 목자가 양의 젖을 먹는 것처럼,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이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는 것처럼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바울은 이 권리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이라며 강한 어조로 “복음을 위하여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즉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 곧 복음전하는 일을 헛된대로 돌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는 스스로 이 복음을 위하여 (장막 만드는 일로써) 자비량하며 거리낌없이 복음을 드러내며 범사에 참으며 지낸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의 잠시의 편리를 위해 복음의 장애를 가져오지 않습니까? 한마디 말, 한 행동이 나의 평안 때문에 내 유익을 위하여 복음을 막히도록 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자신을 포기할 수 있는 믿음이 있습니까? 주일을 성수하는 것이나, 연보를 드리는 것이나, 시간을 드려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일에나, 신앙과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는 믿음이 있습니까? 과연 이 시간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는 명령을 쫓는 자들이 있습니까?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는 약속을 믿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요? 진실로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는 주님의 탄식이 여전히 귀를 울립니다.
주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의를 위하여 내게 있는 특권과 이익을 포기할 수 있는, 세상에 있는 지혜를 버릴 수 있는 믿음이 많았으면 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정말 우리가 받은 생명의 복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고 그 말씀을 인하여 삶이 변화되어졌으면 합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는 모습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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