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교회 예배질서의 일치를 위한 연구모임(07.8.27-29)에서 제가 시편찬송에 대해 발표했던 글입니다.
사실 2004년 제 1회 교사모 말씀수련회 핸드북에 실기 위해 썼던 글인데 핸드북에는 요약해서 실었고 우리 카페에 어딘가에 이 원고보다 짧은 글이 어디 있을 거예요.
이건 이번 모임에서 발표를 위해 다시 손을 본 것입니다.
예배에서의 시편찬송
교회는 하나님의 예배공동체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매일매일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거룩한 산제사', 곧 영적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롬 12:1-2). 더욱 교회는 매주의 첫날(주일)에 함께 모여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공적으로 예배’해야 합니다(행20:7, 요4:24).
교회가 하나님 앞에 모이는 예배(공예배)는 [하나님의 찾아오심]과 [인간의 드림]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찾아오심으로써 가장 대표적인 예배순서는 [설교와 강복(降福)]입니다. 그리고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드림]으로서의 가장 중요한 순서는 [찬송과 봉사(자비의 사역-헌금)]입니다. 그래서 개혁주의 교회의 예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찾아오심]으로서의 [설교-강론]과 [인간의 드림]으로서 [찬송]1)입니다. 특별히 공예배의 [설교]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공예배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두 요소, 곧 [설교]와 [찬송]은 언제나 성경에 근거한 것이어야 합니다. 설교가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이는 설교자의 잡변에 불과하듯이, 찬송 역시 성경에 근거하지 않을 때 그것은 [세상적인 풍월]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의 신앙고백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1장 1항은 “하나님을 섬기는 합당한 방법이란 [하나님에 의해 제정되었고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의해서 제한된 것]으로 인간의 상상이나 생각 또는 성경에 제시하지 않은 방법으로 하나님을 경배할 수 없다”고 기록하면서 5항에서 예배에 대하여 말하기를 “성경봉독과 건전한 설교와 함께 [은혜의 마음으로 시편을 찬송하는 일]”이라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공예배]에서 인간이 드리는 찬송은 [시편]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대교리문답(108-110문답)과 소교리문답(50-52문답)은 이 예배와 관계된 것을 제 2계명과 연결하고 있다. 곧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방법 외에 어떤 인간적인 것도 예배에 사용될 수 없고 만약 인간이 고안한 것으로 예배를 드릴 때에는 이것이 우상숭배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우리의 온전한 고백이라면 오늘 교회가 공적 예배에 나아감에 있어서 ‘시편을 찬송하지 않고’ 인간이 고안한 여타한 유사한 것들로 예배의 찬송으로 삼아 노래하는 것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노래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적 예배에서는 오직 시편찬송만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편찬송과 성경
하나님께서는 구약교회에 시편 찬송을 사용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날에 다윗이 아삽과 그 형제를 세워 위선 여호와께 감사하게(psalm to thank)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 행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할찌어다 그에게 노래하며(Sing unto him) 그를 찬양하며(sing psalms unto him-kjv) 그 모든 기사를 말할찌어다”(대상16:7-9, 참, 시105편)
신약교회에게도 역시 공예배(언약의 교제) 가운데 불러야 할 찬송을 [시와 찬미]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5:19)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3:16)
오늘 교회 안에 찬양사역자라 이름하는 분들 중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을 강조하기 위해 이 본문을 읽으면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각각 다른 것으로 설명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 시(Ψαλμ??;프살모스)는 시편(Psalm)를 일컫는 것이며, 찬미(?μνο?;휨노스)는 야웨를 찬양하기 위해 불렀던 찬송(Hymn)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령한 노래(?δα?? πνευματικα??;오다이스 프뉴마타이스) 역시 시편의 ’송영‘(Ode)2)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는 다 성경의 시편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공예배에서 교회가 불러야 할 찬송은 [시편찬송]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편찬송과 성경역사
교회가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할 때 이 말은 우선적으로 [인간중심]의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중심]의 예배를 말합니다. 곧 하나님의 원하시는 방식대로의 예배가 [참된 예배]인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드림]으로서 가장 큰 요소인 [찬송]에 관하여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곧 찬송 역시도 인간의 감정이나 경험이 아닌 [삼위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성령의 영감을 받은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그것을 인정하며 노래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구약의 교회에서부터 찾을 수 있습니다. 아담은 자신의 갈비뼈를 취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교회를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 <참>엡5:21-33)고 하나님의 역사를 찬양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야웨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며, 대적 애굽 군대를 수장시키는 역사를 보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역사를 노래하며 찬송했고(출 15:1ff) 모세는 가나안 땅의 입구에서 이스라엘백성들로 하여금 이 놀라운 하나님의 구속역사(출애굽의 역사)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래로 이 구속을 가르쳐 부르게 했습니다(신31:22). 사무엘의 어미 한나는 야웨께서 그녀로 수태케 하셨을 때 ‘야웨께서 행하실 이스라엘의 구원’을 보고 그 구원을 미리 노래했습니다(삼상 2:1ff)
그리고 다윗을 통하여 구약교회인 이스라엘의 제사의식(예배)가 회복되었을 때 다윗과 레위인들은 많은 시편을 통하여 온 이스라엘로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이끌었습니다.(대상25:1ff)
우리는 구약의 교회역사를 보면서 교회가 타락했을 때 이스라엘 안에 찬송과 노래가 사라지지만 교회가 말씀을 통해 회복될 때에 그때 항상 찬송이 회복된다는 사실을 눈 여겨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대하 23장, 29장, 32장, 스 2장, 느 7장)
그리고 타락한 구약교회를 교회를 새롭게 하시기 위하여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찬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렸고(마26:30=막14:26,)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날마다 성전에 모여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눅 24:53)
그래서 초대교회는 모임 중에 오직 시편찬송을 불렀고(행 2:47, 히2:12, ...) 사도들은 교회들에게 시편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명하였습니다(엡 5:19, 히13:15, 약 5:13...) 특별히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14:15),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24)라고 말합니다. 15절 본문을 직역하면 ‘내가 영으로 한 시편을 찬송하고 또 내가 마음으로 한 시편을 노래하리라’가 됩니다. 26절도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한 시편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사도들은 교회들에게 시편으로 찬송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시편찬송과 개혁자들
그래서 개혁자들은 처음부터 예배의 개혁에 있어서 말씀의 회복뿐 아니라 ‘찬송의 회복‘을 생각하였습니다. 예배 중에 시편이 아닌 세속적(개혁자 칼빈의 표현을 빌리자면)인 찬송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AD 4세기 후반 교회사적으로 중세교회가 시작될 때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개혁자들은 교황주의자들에 의해 부인되어 왔던 시편찬송을 예배에 있어서 오직 성경이라는 원리 아래로 회복시키고자 ‘세속적인’ 찬송을 축출하고 시편찬송(시편, 성경에 나타난 찬송들)만을 부르도록 하였습니다.
쯔빙글리와 칼빈, 그리고 존 낙스 등은 라틴 찬송을 교회 안에서 완전히 배제함으로 교회의 찬송을 예배의 신성한 도구로 채택했다고 합니다.3) 우리는 이런 역사를 통하여 교회의 역사가 성경역사와 동일한 패턴으로 나아가는 것을 봅니다. 곧 교회 안에 세속적인 원리들이 가미되고 예배가 세속화될 때 교회는 타락합니다. 구약교회인 이스라엘 안에 하나님을 찬미하는 참된 찬송이 사라짐으로 교회의 타락을 보여주었듯이, 교회가 타락할 때 참된 하나님의 찬양이 사라지고 인간의 귀를 유혹하고, 또 감정을 자극하는 세속적인 찬송이 중세교회를 지배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네바의 칼빈과 파렐은 ‘시편찬송을 부를 것을 규정한 예배규정이 의회에 의해 거부되어 추방되었지만 이를 철회하지 않았으며, 칼빈은 자신이 다시 제네바로 돌아갔을 때 성만찬과 함께 공예배의 회복의 한 일환으로서 시편찬송을 제정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후 제네바 시의 공예배 시에는 오직 시편찬송만이 불려지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은 칼빈의 고집스럽고 융통성이 없으며, 교법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상의 찬송은 오직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시편찬송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찬양을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받으실 만한 찬양을 드릴 수 없다고 칼빈은 생각한 것입니다.4)
시편찬송 채용의 기준
개혁자들이 예배에 사용한 시편들을 채용한 기준은 오늘 교회가 참고할 만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시편 찬송의 도입을 지지하며 가졌던 원리들과 신앙고백적인 관심이 두루 나타납니다. 곧 개혁자들이 시편찬송을 채용하는 데는 서로 약간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을 살피면서 교회 예배의 개혁에 있어서 공적 예배에서 찬송이 가지는 중요성을 알았기에 시편찬송을 도입하는 일에는 일치된 의견을 내 놓았던 것입니다.
* 쯔윙글리
쯔윙글리는 로마교회의 미사에서 찬송과 관련하여 나타내 보이는 외적인 경건의 과시에 대해서도 반대하면서 ‘생각도 없이 가사를 노래하고 또 라틴어로 된 가사를 미신적으로 노래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노래하고 있는 노랫말을 알지도 못한다면, 그들은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드릴 수 없고, 단지 동료 앞에 자신들의 행위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참된 마음이 없이 단지 보상만을 바라보고 행해지는 합창 혹은 언설과 같은 교회 예식은 명예를 위해서나 아니면 이익을 위해서 행해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는 골3:16의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말씀을 단체 예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적인 예배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물론 그의 찬송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약간은 극단적이긴 하지만, 당대 교회의 정황을 살핀다면 이해할 만합니다. 더욱 그가 모든 예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스며들어야 한다고 한 점을 비추어 볼 때 그의 강조는 예배에서 찬송을 배제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교중의 찬송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쯔윙글리에게 있어서 참된 예배는 사람의 입의 표현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서 드리는 것입니다.
* 마틴 루터
실상 루터는 예전을 개혁하는데 주저했습니다. 이러한 루터의 태도는 루터파 교회의 예전이 다른 개혁교회들과 다르게 발전하는 것을 통해 여실히 나타납니다. 교회개혁에 있어서 루터의 첫 번째 관심은 다른 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설교의 회복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되지 않을 때에, 누구도 찬송을 하거나 낭독을 하거나, 심지어 함께 해서도 안 된다”고 했고 “노래의 은사는 말씀과 음악으로 즉, 음악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에게만 허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루터는 사람들의 경험이나 책에서 노랫말을 끄집어내는 것을 찬동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루터에게는 성경만이 공적인 예배의 찬송의 중요성을 결정하며, 성경만이 시편과 찬양을 편찬하는 유일한 기준이었습니다.
더욱 특별한 것은 루터는 모든 설교가 복음에 계시된 대로 정확하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해야 하듯이, 찬송 역시 구세주를 선포해야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루터가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의 빛에서 시편을 해석하고 설교했다는 사실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는 시편을 가지고 찬송하는 것을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이것은 시편 46편을 해설한 찬송 ‘내주는 강한 성이요’에 잘 나타납니다.
더불어 그는 시편뿐 아니라 다른 성경에 나타나는 계시, 특별히 신약의 계시에 기초한 찬송들을 만들어 부르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공적 예배에서 마리아 송가(눅1:46-55), 사가랴의 송가(눅1:68-79), 시므온의 송가(눅2:29-32)를 운율에 맞춘 노래로 만들었고, 니케아 신경 역시 성경 본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완전한 복음의 본질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곡조를 만들어 부르도록 했습니다.
어쨌든 루터에게 있어서 공적 예배의 찬송은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에 의한 하나님의 구원 메시지이어야만 했습니다. 찬송하면서 일어나는 어떤 감동들도 그 찬송이 담고 있는 성경 본문에서 나와야만 하지, 찬송하는 그 자체로부터 나와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런 찬송에 대한 그의 고백은 “시편찬송은 선행의 헌물이 아니라 오히려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감사의 제사이다”는 표현에서 드러납니다.
또한 찬송에 대한 루터의 이런 입장들은 그로 하여금 교육적인 기능을 할 수 있는 찬송의 필요성에 생각하게 했는데 그는 찬송을 통해 성경말씀을 성도들의 입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이런 의미에서 찬양이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에 하나님의 말씀을 심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고전 14:26)
또 루터는 당시 교회 안에서 불려지던 라틴어판 운율시편은 대부분 성도들이 이해할 수 없음을 생각하여 독일어로 된 새로운 찬송집을 만들어 성도들로 하여금 성경본문을 가까이 접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루터의 사역은 그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게 된 중심과 일치합니다. 그는 자신이 시편찬송집에 대해 말하기를 “오로지 가장 단순하면서도 누구나 다가 아는 공용어로 찬양하는데 익숙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순수하면서도 부르기 쉬워야 하며, 더 나아가서 시편을 가능한 더 분명하고도 더 친밀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5)고 했습니다.
또한 그는 시편을 찬양시로 번역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재량권을 주어야 하는데, 의미는 그대로 유지하되, 지나치게 문자에 매이지 말고, [오히려] 다른 적합한 단어로 번역하는데” 동의했습니다.
시편이 음악으로서 찬송으로 불려질 때에 가사의 메시지가 수반되어야 하며, 찬송 가사는 가능하면 자구적으로 번역하되 필요하다면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중심이었습니다.
* 마틴 부처
공적 예배의 찬송에 가장 비중 있는 영향을 미친 사람은 마틴 부처입니다. 그는 개혁교회가 공예배에서 사용한 독일어로 된 첫 번째 찬송집(1523년 스트라스버그)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1525년에 만든 독일예배서에는 운율에 맞춘 시편찬송뿐 아니라, 십계명과 사도신경과 주의 기도문에 리듬을 주어 부를 수 있게 했습니다. 스트라스버그에서 출판된 그의 시편 찬송가는 개혁(주의)교회의 시편 찬송들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루터와 마찬가지로 찬송은 교중들에게 덕을 세우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고전 14:1-6을 해석하면서 그는 공예배는 “교회의 덕을 세우는” 방식으로 행해져야 한고 말하면서, ‘성도는 피차 신령한 노래로 화답하면서, 서로를 세울 수 있도록 추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사실상 교중의 찬송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시는 분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교리문답과 마찬가지로, 찬송 책은 믿음을 교훈하는 방편이어야 합니다.”라고 밝힙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스트라스버그 찬송집은 교회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학교에서도 교육에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으며, 안에는 교회의 예전들과 신앙고백(신조들)들, 그리고 주기도문 찬송을 비롯해 교육에 필요한 여러 문서들이 첨부되어 있습니다.6)
* 존 칼빈
칼빈은 예정론의 특성을 강조하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예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선택하시는 빛에서 예배를 생각했습니다. 달리 말해서 “참된 예배란 하나님께 복종하는 행위이며,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앞에 다른 신들을 있게 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에 따라 예배를 생각했습니다. 이에 따라 “찬송은 택자의 모임인 당신의 교회에 의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제사이며, 그러므로 찬송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이지, 결코 설교에 비해서 부차적이거나 아니면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옛 언약에서와 마찬가지로, 새 언약에서도 찬송은 예전의 본질적인 행위이며, 또 설교와 성례 사용을 예배하는데 다른 방식으로 기여하는 것이다. 찬송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즉 참된 송영의 특별한 드림이다”고 했습니다.
칼빈은 로마교회의 미사와 성가에 대하여 '찬송은 성도가 청중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모든 택자의 의무‘라고 밝히며, “개혁신앙은 모든 성도가 영적인 직분을 가지고 있음으로 기도와 구제와 찬송은 예배에 가담한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드려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칼빈은 찬송에서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면서 ‘복음 설교가 성령의 조명하심에 의해서만이 행해 질 수 있듯이, 공적 기도와 찬송 역시 성령님의 사역으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고 강조하며,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성령님에 의해 일으켜진 참된 믿음으로부터 이므로, 참된 찬송 역시 성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할 때”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찬송은 이런 방식으로서만이 예배의 본질적인 부분이 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몸에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시편찬송에 대해 칼빈은 운율에 맞춘 시편에 대해서 최고의 가치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칼빈이 “시편만을 고집하는 외골수”는 아니었습니다. 다른 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칼빈은 단지 하나님에 의해서 영감을 받은 시편과 사람이 만든 작품을 분명하게 구분했습니다.
그의 제네바 시편찬송가(Genevan Psalter)에서(1543년), 그는 “시편은 우리를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자극하고 또 그분을 찬양하도록 한다. 또 그분을 사랑하고 경외하고 존경하고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그분의 사역을 묵상하도록 만든다… 아무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제외시킨 채로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것으로 찬송할 수 없다..... 우리는 성령께서 그를(다윗) 통해서 만드시고 말씀하신 다윗의 시편들보다 이 목적에 더 낫거나 더 적합한 노래를 찾을 필요가 없다.... 우리가 다윗의 시편을 부를 때에, 우리는 친히 성령으로부터 온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우리의 입에 넣으시어서 마치 그분이 친히 당신의 영광을 높이도록 우리에게 찬송하라고 하신 것처럼 찬송하여야 한다”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칼빈이 운율에 맞춘 시편을 귀하게 생각한 이유는 성경의 통일성 때문입니다. 즉 구약의 하나님 백성들에게 주어진 시편은 신약의 하나님 백성들에게도 주신 것이며, 계시의 역사 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옛 언약과 새 언약 둘 다의 본체이시기에, 그리스도를 노래하는 시편은 신약 시대의 교회에서도 영구적인 가치와 역할을 할 것임을 말합니다.
다른 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칼빈은 반주할 목적으로 가사를 다른 페이지에 옮겨다 놓는 것을 지지했지만 가사를 혼란하도록 흩어놓거나, 대치시켜 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곡은 완벽할 정도로 단순한 선율이어야 하고, 가사는 각 음절에 하나씩만 적어놓고, 반주 없이 혼성으로 찬송할 수 있도록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칼빈은 1543년판 제네바 시편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충고했습니다. “찬송은 가볍거나 경망스럽지 않아야 하고, 오히려 중후하고 위엄이 있어야 한다.…또 식당에서나 가정에서 오락하는 사람들이 만든 악보와 하나님과 그분의 천사의 임재에서 교회에서 부르는 시편 찬송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곡은 완만해야 하고… 제목에 맞게끔 중후함과 위엄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제네바시편 최종판(1562년)은 네덜란드의 페트루스 다테인(Petrus Datheen)에 의해서 화란어로 번역되었고, 1573년에는 독일어로 번역되어 위그노와 독일의 개혁파교회 등에서 불리어 원어(프랑스어)보다도 현재 개혁교회진영에서 다른 언어들로 더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즐겨 부르게 되었습니다.7)
시편찬송과 우리교회
실상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 '시편찬송에 대하여'에 보면 "하나님을 공적으로 찬송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회중에서 함께, 또 개인적으로 가정에서 시편을 찬송할 것이다"라고 정하고 있고 그래서 개혁주의교회는 오직 "시편찬송"을 성경적인 찬송가로 고백하며 간직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 안에는 시편찬송을 부르는 교회들을 찾기가 너무나 드물고, 도리어 대부분의 교회들이 그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없는 교회연합의 차원에서 만들어진 ‘통합찬송가’8)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이가 아는 것처럼 현재 한국 개신교의 대부분의 교단이 사용하고 있는 통합찬송가의 곡 중에 90%가 복음송(Gospel song)입니다. 그 중에서도 19-20세기 초반의 미국 대부흥 운동 때 불신자들을 위한 전도집회를 위해 작시된 것들이 대부분이며, 더욱 이때에 대부흥 운동은 주로 유아세례를 부정하는(언약의 이해가 없는) 침례교회와 아르미니안을 주장하는 감리교회가 주축이 되었던 것입니다.
복음송은 인간의 감정을 신앙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계시가 아닙니다. 사람이 고안해낸 것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엄격한 의미에서 제 2계명을 범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이렇듯 복음송 위주의 찬송가를 가지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교회연합을 강조한 나머지 자칫 하나님 앞에 합당한 예배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 의해 나타난 현상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시편찬송이 아닌 인간의 감정이나 체험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찬송을 부르자고 말하는 이들의 주장이 성경을 통해서 명백하게 반대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속을 받은 은혜에 대하여 우리의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하나님을 찬양한다면 이는 정말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공예배에서 시편만을 찬송으로 고백할 때 신약의 구속역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분의 고난, 죽으심과 부활 승천과 같은, 성령하나님의 강림에 관한 노래를 부르는 데는 상당한 제한이 따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교회 안에서 시편찬송을 완전히 몰아내고 일반찬송으로 가득한 통합찬송가를 공예배의 찬송으로 선택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 수긍하기 힘든 처사입니다.
시편찬송의 회복을 위하여...
지난 2000년 한국교회는 온 교회가 연합하여 하나의 찬송으로 통일하자는 취지아래 새로운 통합찬송가를 만들겠다고 공언했습니다. 비록 교단별 이해의 차이와 이권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난 마찰 때문에 현재까지 실현되지 않고 있지만 이 시도는 해볼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의 진행을 보고 있노라면 교회는 다시 한번 개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통합찬송가’를 만드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예배용 찬송가를 만드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교권과 이권의 문제만 협의되고 있기 때문입니다.9) 이 찬송가출판의 더 큰 문제는 이 찬송가는 그야말로 ‘신학의 혼합주의 양상을 띨 전망이라’는 것입니다(즉, 현재 있는 찬송가보다 더 개혁주의 전통을 떠나 시편찬송이 줄어들면 줄어들었지, 시편찬송이 더 실릴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입니다).10)
만약 시편찬송만으로 [신약의 구속사역]을 노래하는 일에 큰 제약이 있다면 우리는 능히 신약에 나타난 구속에 관한 본문에 운율과 음조를 넣어 찬송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개인의 체험이나 구속의 은혜에 대한 감격을 노래하는 곡들을 우리는 공예배가 아닌 [교회의 기도회]나 [성경공부모임], 더 나아가 자신의 [일상생활] 속에서 마음껏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가 공예배의 설교를 통하여 [영감된 하나님의 양식]을 먹는다면, 그 하나님의 영감된 양식을 먹은 [영적인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감된 찬송, 곧 시편찬송]을 부르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인간의 감정이 아무리 뛰어나고 또 감동적일지라도 인생을 지으신 [성령하나님의 영감]만 하겠습니까? 친히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당신을 드리신 그 말씀]만 하겠습니까?
이런 시점에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현재 구성된 (통합)찬송가 편찬위원회가 지금 교단별 이견과 이권다툼으로 인하여 난항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찬송가 개편작업을 다시 한번 신중하게 생각하면서 시편찬송의 중요성을 깨닫고 한국교회의 시편찬송회복의 길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온 교회가 참된 공예배의 찬송으로서 시편찬송(성경말씀을 기초한 찬송)의 회복을 위하여 기도하고, 또 그 날이 속히 오기를 소원한다면 머지않은 날에 한국교회의 모든 공예배에서 [시편찬송]이 예배의 찬송으로 불려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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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1) 일반적으로 현대의 사람들은 찬송(찬양)을 노래로 여긴다. 그러나 성경은 [삼위하나님의 작정하심과 섭리하심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모든 것]을 찬송이라 말한다. 물론 여기에는 노래도 포함되어있지만 기도나 순종, 더 나아가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는 것도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이 된다.
2) 조금 더 설명을 한다면 예배 중에 시편의 말씀을 음악에 맞추어 낭독하는 것.
3) 우리는 개혁자 마틴 루터의 찬송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찬송의 배경이 바로 시편 46편(정확하게는 시편해설)이다.
4) 칼빈의 경건[크리스챤 다이제스트] pp.181~188. ‘칼빈이 번역한 찬송가’
5) 루터의 저작들,vol.49, p.69.
6) 개혁교회의 시편찬송가에 교회의 신앙고백과 교리문답, 그리고 표준예식서가 포함시킨 것은 부처의 영향이다.
7) (i) 기도나 구제와 마찬가지로, 찬송은 복음 설교에 기여합니다. 찬송하는 그 자체로는 은혜의 방편이 아니며 또 하나님의 말씀에 아무 것도 덧붙일 수 없습니다. 성경을 음악 형태로 반복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신자들의 입술에 두는 것입니다.
(ii)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의 입술에 둠으로, 시편을 찬송하는 것은 성도의 믿음을 진작시킵니다. 찬송은 성도들이 마음과 입으로 성경에 전념하도록 도움으로, 성도들을 가르칩니다. 참으로 성령님께서 찬양의 시편을 부를 때에 역사하십니다.
(iii) 시편과 찬송은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셨다는 지식을 고백하고 확신을 견고하게 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iv) 그러므로 성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으로 노래해야 합니다. 예배에서 다른 요인들이 그 분의 이름으로 드려지듯이, 찬송에서도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합니다.
(v)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찬송한다는 것은 오로지 성령님의 능력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참된 기도가 성령님의 사역이듯이(롬8:15-27), 그분 또한 성도들이 피차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화답할 때에 성도들의 마음을 주장하십니다(엡5:18-20).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리는 것은 죽을 인생의 활동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vi) 시편이 성령님에 의해서 영감 받은 책이기 때문에, 구약의 시편은 찬송을 위한 최상의 자료를 제공해줍니다. 찬송들은 다른 영감된 성경에 기초를 두고 있고(십계명, 주의 기도, 시므온의 송가와 같은 찬미들), 이들(사도신경) 가까이에서 따르는 찬송들의 신중한 선정 또한 보편 교회에 속해 있는 것들입니다. 성경으로부터 취하여 온 것이 아닌 노래들은 영감된 시편과는 다른 범주에 있습니다.
(vii) 송영의 행위로서 찬송은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의 공적인 예배 시에 본질적인 것입니다.
(viii) 찬송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편과 찬미를 방편으로 삼아 교회가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15에서 “그[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라고 말씀합니다.
8) 이 찬송가는 지난 1983년 한국찬송가공회(1981년 조직)가 처음으로 만들어낸 찬송가로 이전에 보수적인 교단들이 사용하던 [새찬송가]와 조금 더 자유로웠던 [개편찬송가]를 합하여 만든 것으로 그 동안 예배용 찬송가로 부적합하다는 지적을 많이 받아왔다.
9) 이번에 한국교회가 내어놓은 통합찬송가의 사용을 두고 교단별 이견이 심각했는데 .
① 곡 선정에서 '교단별 균등 안배'를 원칙으로 삼았는데 그것이 지켜지지 않음.
② 찬송가공회와 기독교서회 간의 찬송가출판권 다툼
③ 찬송가 발행대표(임원) 선출을 놓고 일어난 교단간의 불화
④ 찬송가 선정에 대한 교단간의 신학적인 이견
⑤ 찬송가판매 이권을 노린 각 기독출판사 간의 물밑 다툼 등이 그것이다.
* 결국 이 통일찬송가의 사용에 대해 교단별로 이견이 나타난 이유는 예배용 찬송곡 선정과 같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각 교단, 출판사들의 이권문제 때문이었다. 이는 교회의 속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10) 소위 '통합찬송가'에 수록된 645곡들 중에 시편찬송은 10곡 내외에 불과하다. 실제로 이 찬송가의 곡을 선정하는 일에 가장 주안점을 둔 것은 ①교단별 곡 선정 안배와, ②국내작곡(시)가의 곡 비율향상 등이 고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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