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보 한세공

  • 개혁교회자료실 >
  • 기독교보 한세공
한세공(12) 신학의 꽃인 예배 회복을 소망하며
언약 2019-01-16 추천 0 댓글 0 조회 652

한세공(12) 신학의 꽃인 예배 회복을 소망하며

 

 

 

▲강현복 목사

 

 

 

# 너무나 일상적이고, 진부하여 시든 예배

 

신자는 예배에 묻혀 살아갑니다. 주일오전예배, 오후예배, 수요예배, 금요예배, 새벽예배, 전도회헌신예배, 청년회헌신예배, SFC헌신예배, 어버이주일기념예배, 광복기념예배, 부활절연합예배, 개업예배, 회갑기념예배, 추도예배, 입관예배, 하관예배, 발인예배 등등. 이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의 의미를 이해할 수도 없으며, 나아가 바른 예배를 드릴 수도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예배는 삼위 하나님과 그 분의 하신 일에 대한 경배이지 인간 역사에 대한 회고가 아닙니다. 온 교회가 공적으로 드리는 주일예배 외에 다른 것들은 집회와 경건회 혹은 기도회일 따름입니다. 예배는 무엇인가를 기념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사람의 행적과 관련된 모임은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추도식, 입관식 등은 무슨 무슨 기념식이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다양한 종류의 예배는 예배와 집회를 구분할 수도 없는 부작용을 낳습니다.

 

종류도 다양하지만 예배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가히 충격적입니다. 예배를 구성하는 요소에 있어서도 그러하지만 예배하는 신자들의 모습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세례와 성찬은 일 년에 두 세 번이 고작이며, 십계명과 신앙고백은 시나브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습니다. 죄의 공적 고백과 사죄의 선언은 외계에서 온 듯이 취급당합니다.

 

신자들은 주일 낮 예배에 출석 도장을 찍듯이 스쳐 지나갑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며 그 은혜에 감격하여 드리는 찬송도 기도도 기계처럼 행합니다. 지루한 설교 시간에 주보는 조간신문을 대신하다 못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의 도화지가 됩니다.

 

은혜의 방편인 말씀과 성례와 기도의 본질이 너무나 속화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행하신 구원의 노래가 말씀의 핵심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육적인 복과 종교심을 자극하는 수단처럼 변질되었습니다. 매년 기독교보 주요 기사로 등장하는 군에서의 집단 세례는 성례의 진정한 의미를 왜곡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성찬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행하신 전(全) 구속역사를 눈으로 보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주님의 죽으심만 생각나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방인처럼 중언부언 하지 말며,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주님의 권면이 신자들의 기도에서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진 느낌입니다. 이는 선배 개혁자들의 피를 헛되게 하는 꼴입니다.

 

 

# 잘못된 처방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디를 어떻게 개혁해야 할지 고민에 고민이 이어집니다. 결과, 두 종류의 해결책이 제시되었습니다. 하나는 예배를 간소화 하는 작업이고 다른 하나는 즐겁고 역동적인 예배로의 전환입니다.

 

예배를 간소한 한다는 것은 예배의 시간과 주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한 시간을 넘긴 예배는 당회의 중요 이슈가 되었고, 분열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순서를 대폭 줄이고 설교 시간을 극히 제한하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한 두 곡의 찬송과 간략한 기도, 이어지는 간결하면서도 짧은 메시지. 헌금도 예배 중이 아니라 예배의 장소로 들어오면서 입구에서 자발적으로 큰 통에 넣습니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흥미진진한 예배를 위해 주로 악기가 동원되었습니다. 요란한 악기 때문에 사람의 목소리는 점점 길을 잃고 있음에도 말입니다. 지루한 설교 대신에 재미있는 간증과 예화가 신자들의 귀를 즐겁게 합니다. 불신자들이 참여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 어떤 이들은 이것을 문화 충격을 최소화 한다고도 함 – 예배를 드립니다. 소위 열린예배가 등장합니다.

 

안타깝게도 이는 잘못된 처방입니다. 우리는 개혁자들의 후예답게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책에 우리의 심안(心眼)을 뜨게 할 진리와 영혼의 보고(寶庫)가 있습니다.

 

 

# 예배의 기초와 본질 – 언약

 

예배의 사전적 의미는 ‘엎드려 절하다’입니다. 예배는 그 분의 백성들이 삼위 하나님께 절하는 행위입니다. 백성들은 무엇 때문에 절합니까? 생명의 길을 열어 가르치신 삼위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인간의 끊임없는 반역에도 불구하고 삼위 하나님께서는 친히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실로 하나님은 그러한 대로 그러합니다(출 3:14). 그러나 인간 스스로는 예수님께서 언약의 완성이심을 믿음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여자의 후손이요, 제사장 나라를 건설하실 분이심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분이 율법의 완성이며, 친히 성전이 되시고 그 백성들이 이제 성전이 된다는 진리도 인간 스스로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윗과 같은 왕으로 강림하셨고, 그 분이 친히 자기 백성을 모으시며, 그 분의 피 흘림이 구원이 된다는 것을 스스로 믿을 수 있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오직! 진리의 성령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실 때에만 이 모든 것들이 이해되고 수납됩니다. 그러니 예배는 믿음을 기초로 합니다.

 

예배가 믿음을 기초로 한다는 것은 예배로 초청된 이들이 교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공회인 교회가 영광의 하나님 앞에 교회로 모인다는 것은 예배 공동체로 선다는 뜻입니다. 예배는 교회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교회는 예배를 통해 그 정체성을 확증합니다. 시내산 앞에 선 교회는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 받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수납함으로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가 예배의 자리로 부름 받을 때,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만천하에 드러냅니다. 예배는 교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행위입니다.

 

시내산 앞에 선 교회에게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교회는 이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해야 합니다. 그러나 광야교회는 이 사명을 온전히 감당치 못했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통하여 죄를 깨닫습니다(롬 3:20).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입니다(갈 3:24). 율법은 하나님 사랑이요 이웃 사랑으로 요약됩니다(마 22:37-40). 인류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이 법을 온전히 지킬 이가 없습니다(롬 3:10-12).

 

그러나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법을 온전히 지키셨습니다. 진실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습니다(롬 10:4, 롬 8:3,4). 예수님께서는 완전하고 온전하게 하나님을 사랑하셨고 이웃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선언할 수 있습니다(롬 13:8).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을 감사함으로 받을 때에 신자도 예수님께서 이루신 율법의 완성에 참예하게 됩니다. 그러니 믿음은 율법을 폐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웁니다(롬 3:31).

 

교회는 예배 중 십계명을 읽고 죄를 고백합니다. 죄 아래 있는 인간의 비참을 깨닫고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갑니다. 사죄의 선언을 통해 죄인 된 교회가 그리스도로 옷 입습니다. 짐승의 피가 아니라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교회로 하여금 의인 되게 합니다.

 

예배는 죄 사함의 기쁨으로 인해 교회로 하여금 환희에 차게 합니다. 실로 예배는 죄로부터 해방된 이들의 축제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성전이 되셨고, 교회 역시 성전 되었음을 생각할 때 더욱 분명합니다. 성전은 죄 사함과 구속의 현장입니다. 이는 그림자입니다(히 8:5). 참 성전이신 예수님은 옛 성전에서 이루어질 죄 사함을 친히 선언하셨습니다(마 9:2, 눅 7:48). 예수님은 참 성전이 되셨습니다(요 1:14, 2:19-21). 참 성전이신 예수님은 동시에 화목제물이 되셔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된 것처럼 예수님의 피가 언약의 피였습니다(히 9:22, 마 26:28).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언약의 피가 갖는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는 표입니다.

 

교회는 예배를 통하여 그 분의 몸을 먹고 마심으로 사죄의 은총을 누림과 동시에 삼위 하나님과 연합되었음을 자랑합니다. 먹음은 연합을 의미합니다. 구약 성경이 규정하는 음식규례(정하고 부정한 것들)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엇과 연합되었는지를 가르치는 표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교회가 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을 즐기는 것이며 성도와 성도의 연합을 즐기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성찬은 거룩한 식사이기에 영혼의 양식입니다. 예배는 생명의 양식을 배불리 먹는 왕궁의 잔치입니다.

 

삼위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믿음의 내용입니다(롬 4:19-21). 뱀을 저주하시면서 사람에게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나라를 약속하신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율법과 성막을 통하여 그 언약을 더욱 구체적으로 계시하셨습니다. 다윗에게 왕권을 약속하셨고, 친히 부자(父子)관계를 선언하셨습니다(삼하 7:14).

 

옛 백성들이 실패하자 새 언약을 선언하셔서 성령님을 약속하셨습니다(렘 31:31-34).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하시면서 예배가 ‘성령과 진리’로 드려져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요 4:23). 이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입니다. 실패한 자기 백성들을 위한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징표였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참 예배를 드리는 새로운 공동체의 출현을 가능케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성령님의 주도아래 이루어집니다. 언약이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어짐과 같이 예배도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을 통해 베풀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성령님의 임재가 가득찬 예배입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기에 하나님의 구속을 밝히 드러내십니다. 특별히 말씀 사역자의 설교를 통하여 그리하십니다. 이 면에서 예배는 삼위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속역사를 재현하는 장입니다. 예배에는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찬양과 경배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합니다. 삼위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고 그 구원을 재현하며, 갱신합니다. 교회가 언약 공동체이기에 성령님 안에서 언약을 갱신하는 최상의 행위가 예배입니다.

 

언약은 교제와 만남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범죄하여 나무 사이에 숨은 아담을 찾아오신 하나님. 갈대아 우르에 있는 아브람을 찾아오신 하나님. 그 백성을 시내산으로 부르신 하나님. 다윗을 부르시고 택하신 백성을 부르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자기로부터 단절된 자기 백성을 만나 교제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요 17:3). 이 앎은 삼위 하나님과 자기 백성의 연합입니다. 곧 교제관계의 형성입니다. 이 교제와 만남이 언약이라는 방편을 통해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언약적 만남과 교제의 재연입니다. 예배는 구속주 하나님과 그 백성들의 만남과 교제의 역동성이 살아있는 현장입니다.

 

 

# 예배의 회복을 소망하며

 

신학은 삼위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그 분과의 교제입니다. 이제 우리는 아테네나 로마의 연극장이 아니라 성령님 안에서 하나님을 말합니다. 곧 예배 안에서 하나님을 알고 말합니다. 예배야 말로 신학의 꽃입니다. ‘예배의 개혁 없이 교회의 개혁’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 전통을 선배 개혁자들로부터 물려받았습니다. 말씀과 성례가 중심된 예배입니다.

 

또한, 우리의 헌법은 이 면에 충실합니다.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공동체이다”(고신 헌법 예배지침 1장 1조).

 

교회를 예배 공동체로 규정한 헌법은 예배에 대해서도 바른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예배의 본질은 언약적이다. 언약의 쌍방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다. 하나님께서 예배에 기여하시는 부분이 있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배에 기여하는 부분이 있다. 예배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복, 말씀 등과 같은 요소들이 있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드리는 찬양, 기도, 헌금 등과 같은 요소들이 있다.”(고신 헌법 예배지침 2조 2항).

 

이 예배 규례가 우리의 교회들을 저 하늘 보좌에 앉으신 왕에게 나아가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왕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식탁으로 그 백성을 부르시며, 대제사장의 기도로 그 백성들의 기도를 돕고, 참 선지자가 되셔서 진리의 말씀을 그 백성의 귀에 들려주십니다. 그러기 위해 올바른 직분의 봉사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목사와 장로와 집사의 섬김이 온전한 예배를 가능케 합니다. 참 예배는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충만하며, 그 분의 구속과 그 분 자신을 즐김입니다.

 

글·강현복 목사(포항 샘터교회) / 조금은 보수적인 도시 포항에서 성경적인 성도, 성경적인 교회를 꿈꾸는 이들과 더불어 개혁주의 교회를 세워가고 있다. 

자유게시판 목록
구분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다음글 한세공(11) 바람직한 장로상 실현을 위해 언약 2017.06.07 0 872

607802 부산 동래구 명륜동 4-8번지 3층 동래언약교회 TEL : 051-558-4890 지도보기

Copyright © 동래언약교회. All Rights reserved. MADE BY ONMAM.COM

  • Today7
  • Total85,855
  • rss
  • 모바일웹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