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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세공(10) 장로가 장로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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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세공(10) 장로가 장로에게

2013.09.11 12:00 입력

 

글ㆍ박익천 장로 / 온생명교회 장로로, 잠실중앙교회가 4년 전 남양주시에 분립개척한 교회에서 개혁신앙을 따라 고백하고 읊조리며 섬기고 있다.

 

 

▲박익천 장로
 

 

 

고신교회와 장로

 

우리 고신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믿어야 할 바가 무엇이며, 그분의 영광을 위해 어떻게 살고 예배하며 교회를 세워가야 할 지를 ‘역사적인 개혁교회의 전통과 개혁주의 신앙’을 따라 고백하는 교회이다.

 

나아가 그런 신앙의 후예들로서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파수하고 다음 세대에 전수하기를 갈망하며, 이 책임을 완수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지혜와 능력 주시기를 간구하는 교회이다.

 

또한 이 세상에서 무슨 깃발을 흔들며 어떤 노래를 부르며 분투해야 할 지를 ‘오직 말씀’과 ‘전체 말씀’으로 돌아가서 거기에서 우리의 자태와 행보를 결정하여 사명으로 삼는 교회이다.

 

이 교회를 하나님께서는 지나간 시간 속에서 장로회(목사와 장로)를 쓰셔서 가열차게 진전시켜 주셨다. 이를 믿음의 선진들이 우리에게 대물림하여 주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코람데오의 순교적 결단으로 여주동행(與主同行)하며 일사각오(一死覺悟)로 지사충성(至死忠誠)하였고, 그 눈물의 교회를 지금 우리는 자긍스러운 유산으로 받아 대오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전통에 따르면 말씀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으며, 복음이 순수하게 전파되고 경청되며, 성례가 그리스도의 제정에 따라 집례되는 곳마다 교회가 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

 

하나님은 말씀의 설교를 방편 삼아서 우리 각자뿐 아니라 교회를 부르시고, 직분자를 쓰셔서 자기 교회를 친히 다스리신다. 그래서 칼빈은 ‘직분자는 곧 말씀의 직분자’라고 하였다.

 

목사는 말씀과 성례로써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재현하고, 장로는 선포된 말씀이 가르치고 해명하여 주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받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돌아보는 직분자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목자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말씀이 가르치는 바에 따라 이 직분을 받고 이해하며 교회를 다스리는 특권을 주신 것에 우리는 그저 감사할 것 밖에는 없다.

 

 

우리들의 자화상과 고언(苦言)

 

그러면 오늘 우리 고신교회의 장로들은 교회와 직분을 어떻게 이해하며 부르심에 응답하고 있는 것일까? 이미 수도권에서는 ‘고신’이라 표현하거나 언급하지 않는 것이 교회의 안녕과 성장에 도움(?)이 된다 하여 괜히 깃발을 흔들 필요가 없다는 분위기가 있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할진대 하물며 ‘개혁교회’ 혹은 ‘개혁주의 교회’라 표방하고 목표하면 그 험하고 힘든 길을 여간 단단히 각오하지 않고서는 안될 일이 되어 버렸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지 않는가? 고신교회는 굳이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물려받아 그것을 표준삼은 개혁교회였었는데, 이제는 개혁교회라는 별칭을 붙이고 개혁신앙으로 직분을 행하고 섬기는 것이 우리 가운데서도 별종이 되어 버렸다.

 

여기 아직 별종 축에도 끼지 못하는 장로가 내 모습이기도 한 우리 장로들을 바라보면서 지극히 원론적이지만 쓴소리 안에 작은 제안도 담아 보고자 한다.

 

 

1. 장로가 신학이 없다

 

목사도 아닌데 신학이라니 할는지 모르겠다. 감히 단언컨대 장로가 신학이 없어 교회와 직분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장로라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그로부터 나온 교리와 신조와 고백과 실천의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적용도 못하니 신학이 없다는 말이다.

 

신학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므로 목사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장로도 그리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이 마땅히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말하는 신학에서 바른 신앙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믿음이라는 선물로 주어지게 되고, 바른 신학과 신앙은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핵심이 된다. 이를 모본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직분이 장로이다. 그런데 장로가 신학이 없으니 선무당 사람 잡는 꼴이 될 수밖에 없다. 목사를 잡고, 성도를 잡고 나아가 교회마저 잡게 된다.

 

장로가 다른 것은 두고라도 참된 교회의 표지라고 하는 ‘말씀과 성례와 권징’의 올바른 선포와 시행만이라도 확실하게 붙잡고 돌아보아야 하는데 시늉만 한다.

 

신학이 없어 장로가 복음이 강설되는 자리에서 목사가 딴소리를 해도 모르고, 교회회원의 들고남에도 파수꾼이 되지 못하고, 세례의 문답이나 성찬의 감독에 대해서도 그 진정한 의미와 엄위함을 모른 채 변죽만 울려대고, 은혜의 복음으로 권징해야 하는 일이 난처하게 되어버렸다면 무엇으로 장로의 직무를 대신한단 말인가?

 

왜 이리 되었을까? 장로인 우리가 말씀으로 말하고 말씀으로 기도하고 말씀으로 교제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말씀에 목숨 걸지 않기 때문이다. 장로는 사사로운 경험이나 세상적인 지식이나 부요함으로 자체 발광하는 권위로써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을 통하여 주시는 말씀(신학)으로부터 나오는 권위로써만 전체 교회를 향한 영적인 지도와 감독이 가능한 것임을 한시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2. 장로가 심방이 없다

 

장로의 직무가 무어냐 할 때, 통틀어 ‘심방’이라 해도 지나친 것이 아닐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심방하지 않는 장로는 장로가 아니다’라는 말이다. 교회법에서 장로의 여러 직무를 살펴보아도 모두 심방과 관련한 사항이요, 심방으로써 수행이 가능한 직무들이다. 이것을 제대로 하자면 장로가 심방하지 않고서는 결코 돌봄과 감독의 목양적 역할을 감당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사도적 전통과 교훈을 계승하고 있는 장로교회에서도 교회사적으로 교인의 가정을 심방하는 일을 통해 언약적 신앙과 교제를 나누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 왔다. 그래서 장로가 되면 어떠한 희생을 각오해서라도 심방을 통하여 장로의 직분을 신실하게 감당할 것과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구하는 것이 당연지사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장로의 심방’을 하지 않는다. 어쩌다 심방한다 하지만 땜질식이며 본연의 심방과 거리가 먼 그냥 형식적인 방문이 되고 만다. ‘심방하는 장로’ 현재 우리에게서는 낯설고 새로운 짐이 되는 것 같아 일견 불편할 수 있는 과업처럼 여길지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장로가 교인의 대표로 자임하면서 많은 교회행정과 재정을 총괄하고 이런 저런 전문 사역에 헌신한다 할지라도 심방하지 않으면 그러한 것조차도 도피처가 되어 영적인 빈약함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어느덧 심방은 부목사나 여전도사의 일이 되어 버린 지 오래 되었고, 장로는 보고 받는 상급자가 되어 지시하고 그들을 그 직무로 평가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으니 장로 직무의 변형과 비틀어짐은 교회법을 다시 수정해야 할 형편까지 되었을 정도이다.

 

장로가 왜 ‘장로의 심방’을 행하지 못할까? 목사가 해야 할 일이고, 목사 같은 장로로 오해될 수 있기에? 무엇보다 시대적 상황과 여건이 심방을 가능하게 하지 못할 만큼 달라졌기 때문인가?

 

아니다. 장로가 예배를 모르고, 예배에서 나타나는 직분의 참된 의미를 간과해서 그렇고, 그래서 하나님의 찾아오심이 무엇인지를 영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에서 말씀과 함께 그의 백성에게 찾아오시고, 장로는 말씀으로 오신 하나님을 대리하여 각 가정을 심방함으로 그 말씀의 열매를 확인하게 된다. 따라서 장로가 심방하려면 먼저 자신도 예배에서 그 말씀을 온전히 받아 삼위 하나님과의 언약적 교제로 충만해야 한다. 그러할 때 그 일을 실효 있게 감당할 수 있게 된다.

 

목사가 말씀의 강단에서 말씀을 바르고 깊고 풍부하게 전파하지 않으면 목사 직분의 타락이듯이, 장로도 심방의 자리에서 말씀을 ‘지키는 것’을 보며 구원과 심판을 위하여 신령한 다스림이 없다면 다른 무엇으로 대체한들 장로 직분의 타락이라 하여도 족히 무방할 것이다.

 

당회가 무엇을 위해 모이는가? 교회와 교인을 위한 영적인 총찰로 모이지 않는가? 심방을 해야 모일 때마다 가지고 나아가 회의할 것이 있지 않겠는가? 말씀으로 돌아본 장로의 심방 결과를 당회의 탁자 위에 올려놓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다시 말씀을 기다림으로 하나님의 재차 찾아오심을 앙망해야 할 것이다.

 

 

3. 장로가 기도가 없다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교회가 가지는 권세는 천국 문을 열고 닫는 영광스러운 권세이다(마 16:19). 이 권세를 주님께서는 말씀의 직분자를 통하여 사용하시기에, 우리는 이를 받들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사명을 부여 받은 자들이다. 장로는 목사와 더불어 이 영적인 일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기에 충성된 종으로서 깨어 일해야 하는 직분자이다.

 

영적인 일이요, 영혼을 위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다만 할 수 있는 것은 이를 주관하고 다스리는 분이신 창조주 하나님께 부탁하는 일이다. 기도로써 하나님께 부탁하여 하나님의 뜻을 묻고, 성령님이 역사하여 주시는 한량없는 자비와 긍휼을 기다리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최우선의 직무요 직무의 모든 것이라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장로의 심방이 장로 직무의 꽃으로서 드러나는 것이라면, 장로의 기도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씨름하는 생명과 같은 뿌리이다. 기도하는 직분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기 때문에 기도하며 하나님 그분의 말씀에 참여한다.

 

말씀에 참여함으로 겸손해질 수밖에 없고, 그 겸손으로 성도의 발을 씻기며 돌아보기에 주님이 주시는 권위를 입는다. 이 권위로 직무하니 교회가 평안하여지고 든든해진다. 그러므로 장로가 어찌 기도하지 않고서야 이 일을 감히 받들 수 있으며 장로라 자처할 수가 있겠는가? 결단코 기도는 너무 많이 한다 할 수 없고, 기도는 언제나 부족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도 없이 장로 없고, 기도 없이 전체 교회를 돌아보는 감독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순전히 가짜다. 즉 ‘기도하지 않는 장로는 장로가 아니다’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기도하지 않는다. 기도하지 않는 심각한 질병에 걸린 장로가 되어 가고 있다. 점점 기도보다는 다른 무엇을 궁구해서 기도의 자리를 대신해 보려고 애를 쓴다. 장로가 기도하지 않으면 장로의 밑천이 드러날 수밖에 없고,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처럼 눈 먼 인도자가 되고 외식하는 자가 되어 천국 문을 닫는 ‘화 있을진저’(마 23장)의 당사자가 될 수밖에 없다.

 

어떤 종교적인 열심으로도, 돈으로 때워도, 몸으로 때워도 잠시 표 날지는 몰라도 안 될 일이다. 이것은 희한하게도 성도들이 먼저 알아챈다.

 

왜 그럴까? 장로의 신령한 내공은 다름 아닌 오직 말씀과 기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개인적인 골방의 기도뿐 아니라 교회의 공적 기도의 시간마저 어디엔가 저당 잡히고, 뻔뻔스럽게 대표기도 한번 유창하게 읽어 내려가는 것으로 기도의 모든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4. 장로가 교회의 걸림돌이다

 

근자에 회자되고 뜨겁게 달구어지는 교회의 문제와 아픔은 십중팔구 언필칭 교회의 지도자들인 장로와 목사에게서 기인한다. 교회나 직분자나 그 형편과 속을 들여다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부끄럽기는 일반이다.

 

다들 자기가 속한 교회가 좋은 교회, 참되고 거룩한 교회, 건강한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소망은 크게 다르지 않을진대 여기저기서 들리는 고통과 분열의 소리, 심지어는 배교(背敎)에 가까운 참담한 소리는 도무지 교회라고 직분자라고 차마 부를 수 없는 행태가 난무하다. 그리하여 저마다 교회개혁 직분개혁 예배개혁을 부르짖지만 그 대상은 철저히 자기 밖이다.

 

왜, 어찌하여 이렇게 가고 있는가? 여러 진단이 있겠지만 하나님의 교회를 맡은 장로단이 진리와 영(靈)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진리와 영에서 멀어진 교회는 순식간에 사탄이 침투하여 육체의 욕심을 채우고, 거기에서 나오는 육체의 열매와 일을 먹고 즐기며, 격동과 투기로 인간적인 도모들로 헛된 영광을 구한다(갈 5:16~26).

 

그러기에 교회가 진리에서 멀어지지 않으려면 말씀을 맡은 목사의 역할은 실로 중차대하다. 말씀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기에, ‘목사가 곧 교회이다’라고 해도 과히 지나친 말이 아니니, 목사의 설교는 교회를 규정하고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시금석이다.

 

따라서 교회는 좋은 목사, 신령한 목사를 가져야 한다. 좋은 목사를 가지려면 교회는 좋은 장로가 필수적이다. 역으로 ‘좋은 장로는 좋은 목사를 만들고, 좋은 목사는 좋은 교회를 세운다’. 그러면 또 좋은 장로가 생산된다. 신령한 교회는 이런 순환적인 고리를 가진 교회이다.

 

그런데 우리 장로는 이 부분에 있어서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다. 어찌된 영문인지 많은 교회들이 목사와 장로의 불화와 힘겨루기로 인해 교회적 갈등과 분열로 몸살을 앓고 있는데, 근본적인 원인과 책임은 목사를 만들어내는 장로에게 있다. 어느 목사가 처음부터 이상한(?) 길로 가겠다고 결심하고서 나서겠는가?

 

목사가 진리의 말씀만을 신령하게 전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 지지하며 후원하고 기도하는 것을 ‘만들어낸다’라고 이해한다면 장로만이 교회를 위해 할 수 있는 특권이며, 그렇게 된 목사와 동역하는 것이야말로 장로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보람이요 영광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교회를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하라 하셨고, 가장 큰 은사인 “사랑을 너희 가운데 넘치게 하라” 하셨으니, 각기 주신 은사와 직분을 존귀하게 여기며 격려와 협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글을 마치면서

 

교회 안팎으로 장로 직분의 약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장로인 우리가 스스로 자초한 측면이 대부분이긴 하나 이러다간 장로 무용론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심히 염려스럽다.

 

장로들이여! 교회를 주님의 신부로 단장하게 하고 온전케하는 최후의 보루로 다시 돌아가자. 말씀에 열복(悅服)하여 말씀만을 따라 모든 뜻을 밝히며 신행일치(信行一致)하고, 기도일관(祈禱一貫)으로써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기다리며 행보(行步)하자.

 

그리고 개혁신학과 신앙을 이어받고 전파하며 전수하는 일에 흔들림 없이 가담하자. 이 점에서 본 글은 우선적으로 자성(自省)과 개혁의 대상인 필자를 향하여 해대는 쓴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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