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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언약교회의 성찬에는 누가 참여하나요?
언약 2016-03-07 추천 0 댓글 0 조회 462

 개혁정론 기획기사 중에서(제목을 클릭하시면 링크됩니다)

 

[성례에 대하여] ‘울타리가 없는 성찬’과 ‘울타리가 있는 성찬’

 

 

 



임경근 목사
다우리교회 담임목사
고려신학대학원 외래교수

교회를 방문했는데 마침 성찬을 시행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빵과 포도주를 집어들게 된다.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어느 교회에서든 방해받지 않고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 성찬 참여의 기준은 본인인 셈이다. 이런 성찬을 ‘울타리가 없는 성찬’(unfenced communion)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어떤 교회는 성찬 참여를 아무나 하지 못하도록 제한한다. 그 교회의 성도에게만 성찬 참여 자격을 주기 때문이다. 교회, 곧 당회가 성찬 참여 기준, 회원 기준을 정하고 판단해서 결정한다. 이것은 ‘울타리가 있는 성찬’(fenced communion)이라고 부른다.

한국 교회가 시행하는 성찬은 이 두 가지 중에 ‘울타리가 없는 성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 전통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종교 개혁가들은 어떤 입장을 택하고 있을까? 정통 장로교회는 어떤 입장을 견지할까? 이 글은 종교 개혁과 정통 장로교회는 ‘울타리가 없는 성찬’이 아닌 ‘울타리가 있는 성찬’을 택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1. 교회 회원과 자격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은 세례를 통해 교회의 회원이 되며 예수님이 제정해 주신 성례인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

“세례는... 수세자를 유형교회에 엄숙하게 가입...”(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8장과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65문. 이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WC,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WLC)

그러므로 세례를 받은 자는 누구나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런데 세례를 받기만 하면 무조건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종교 개혁 이후 교회는 두 가지 성찬에 대한 두 가지 형태를 취했다. 하나는 ‘울타리가 없는 성찬’이고 다른 하나는 ‘울타리가 있는 성찬’이다. 한국교회는 대부분 울타리가 없는 성찬의 형태를 위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세례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성찬에 참여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한다. 그런데 종교 개혁 교회는 세례를 받았다고 무조건 자동적으로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고 보지 않았다. 교회의 당회는 누가 성찬에 참여하고 참여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결정하고 시행했다. 이런 종교 개혁 전통은 한국 교회에 이어지지 않았다. 울타리가 있는 성찬을 얘기하면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문제에 대해 근원적으로 하나 씩 살펴보기로 하자. 

2. 성찬과 참여자격

1) 성찬이란?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바대로 빵과 포도주를 주고받음으로써 그분의 죽음을 나타내 보이며 기억하는 성례이다. 이 성례를 합당하게 받는 자는 믿음으로 그분의 몸과 피에 참여하여 그분의 모든 은덕을 받아 영적 양식을 받아먹고 은혜 안에서 성장한다(WSC 96문). 성도는 성찬에 참여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누림으로 성숙해질 수 있다. 그래서 성찬을 말씀과 기도와 함께 은혜의 방편(방법)이라 부른다.

2) 참여 자격

(1) 성찬 참여에 합당한 경우

세례를 받아 교인(교회의 회원)이 된 사람은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고신헌법 정치 3장 24조 1항). 세례교인은 성찬을 통해 은혜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세례를 받고 성찬에 참여하는 자가 자동적으로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로마 천주교식으로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전혀 유익이 되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단번에 드린 화목제로서의 속죄를 모독하는 것이다. 또 개신교회 성찬에 참여한다고 무조건 성찬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합당하게 성찬을 받는 자들’(WC 29장 7항과 WLC 170문)이 은혜를 누릴 수 있을 뿐이다.

그러면 ‘합당하게 성찬을 받는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 성찬에 참여하는 자를 말한다(고전 11:28). 그들은 주의 몸을 분별하고 먹고 마시는 자이다(고전 11:29). 즉 성찬 참여자는 성찬에 참여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살펴야 한다(WLC 171문). 과연 자신이 성찬에 참여할 합당한 준비가 되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자신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에 대해, 자신들의 죄와 부족함에 대해, 자신들의 지식과 믿음과 회개와 하나님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과 모든 사람에 대한 긍휼과 잘못한 이들에 대한 용서의 진실성과 분량에 대해, 그리고 그리스도를 향한 자신들의 갈망과 자신들의 새로운 순종에 대해 스스로 살펴야 합니다”(WLC 171문).

자신을 살펴본 결과 “성찬에 임할 합당한 준비가 되었는지 의심”이 들 경우에는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자신의 부족과 죄를 깨달은 자는 더욱 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가 필요함을 인식하고 성찬에 참여해야 한다(WLC 172문). 이렇게 자신의 부족과 결핍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고 악을 떠나기를 원한다면 오히려 성찬에 참여해 은혜를 누려야 한다. 바로 이것이 성찬의 깊은 의미이다.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자는 도덕적으로 완전한 자가 아니라,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죄 용서를 의지하는 자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것은 성도들에게서 용기를 모두 빼앗으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죄가 하나도 없는 사람만이 주님의 만찬에 참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완전하다거나 의롭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아직도 죄와 부족한 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 죄에 대해서 진심으로 후회하며 회개합니다...”([다우리교회 성찬예식문] 4쪽).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만들 당시에도 성찬 참여를 위해 준비하면서 자신을 살피다가 죄 지은 것이 있으면 성찬에 참여하지 않는, 경건한 척하는 교인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두 성도가 서로 싸웠다. 그런데 한 성도는 성찬에 참여하고 다른 성도는 성찬에 참여하지 않았다. 성찬에 참여할 준비가 덜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잘못되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정말 죄를 지었고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오히려 성찬에 참여해야 한다. 성찬에 참여하지 않은 그 사람은 같이 죄를 짓고도 성찬에 참여한 다른 사람을 파렴치하다고 비난할 것이다. 성찬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수준 높은 경건이라고 자랑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죄에 대해 진심으로 아파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회개하는 사람들을 위해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172문에서 친절하게 ‘영적인 성장을 위해 성찬에 참여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네덜란드에 있는 어떤 지역의 교회는 성찬이 있는 날에 40% 정도가 참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현상은 성찬의 근본의미를 잘못 이해한 결과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72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의심하는 자들이 아니라, 성찬에 참여할만한 ‘합당한 준비’가 되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는 자(의심하는 자)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다. 즉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에 대한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자신이 성찬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 없다는 뜻이기 때문에 반드시 성찬 참여 전에 자신을 살피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의미가 있고 성찬의 은혜도 있기 때문이다.

(2) 성찬 참여에 합당하지 않은 경우

세례를 받은 사람은 교회의 회원으로서 마땅히 성찬에 참여할 수 있지만 성찬 참여가 허락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성찬 참여에 합당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 이런 사람은 세례를 받고 성찬에 참여하기는 하지만 영적으로 전혀 유익을 얻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성찬에 ‘합당하지 않게 참여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대해 죄를 짓게 된다. 여기서 ‘합당하지 않게’라는 말은 ‘합당하지 않은 방식으로’(NAS, “in an unworthy manner”)라는 말이다. 성찬 참여자의 인격이 흠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 방식에 문제가 있는 자를 말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이 없거나 마음 속에 회개하지 않는 죄를 품고 있거나 혹은 성찬에 대한 적절한 이해나 지식 없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 11:27-29).

‘합당하지 않게 성찬을 받는 자’는 ‘자기를 살피지 않고 성찬에 참여하는 자’인데, 결국 그것은 ‘주의 몸을 분별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 것’이니 죄이다. 그들은 성찬에 참여해 영적 유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죄를[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성찬이 은혜의 방편이기 때문에 무조건 참여할 자격이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신앙고백을 하고 세례를 받은 자라도 성찬에 참여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어떤 경우인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는 두 가지 경우를 말한다. 하나는 무지한(the ignorant men) 사람의 경우(WC 29장 8항)고 다른 하나는 사악한 자들(the wicked men) 혹은 수치스런(the scandalous)일을 한 사람의 경우(WLC 173문)이다.

“무지하고 사악한 자들은 이 성례로 외적 요소들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들은 요소들이 표하는 바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부당하게 접근하여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함으로 자신의 심판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무지하고 불경한 자들은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즐기기에 합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성찬상에 앉을 자격도 없으며, 여전히 무지하고 불경한 채로 있으면서도 이 거룩한 신비에 스스로 참여하든지 참여를 허락받는 것은 그리스도께 큰 죄를 범하는 일이다”(WC 29장 8항).

“문 173 믿음을 고백하고 성찬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이에게 성찬을 못 받게 할 수 있습니까?
답: 비록 믿음을 고백하고 성찬에 참여하기를 원한다 할지라도, 무지하며 수치스러운 일이 드러난 이들은, 그들이 가르침을 받아 변화되기까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교회에 맡기신 권세로 성찬을 못 받게 할 수 있으며 또한 못 받게 해야 합니다”(WLC 173문).

첫 번째, ‘무지한 경우’는 복음의 진리(교리표준인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이에 준하는 신앙고백이 없는 경우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복음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지식이 없는 경우나 혹은 바르지 않은 거짓 교리를 믿고 있는 경우일 수 있다. 죄인을 구원하는 십자가의 능력을 부인하거나 혹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는 경우이다. 또 성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거나 잘못된 지식을 갖고 있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화체설 혹은 기념설 등). 예를 들면 성찬식에서의 빵과 포도주가 자기 속에 들어 있는 온갖 죄와 질병을 없애줄 것이라고 미신적으로 믿는 경우이다. 이런 사람은 성찬에 참여시키지 않는 것이 옳다.

이 경우는 먼저 복음의 진리를 신앙교육을 통해 가르쳐(WLC 173문. “그들이 가르침을 받아”) 올바르게 신앙고백을 하도록 한 후에 성찬에 참여시키는 것이 그의 영적 유익을 위해 좋을 뿐만 아니라 그가 죄를 짓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다. 복음과 성찬에 대한 바른 믿음과 이해를 가진 자만이 성찬에 참여할 때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복을 누릴 수 있다.

두 번째 경우, ‘사악한 자들’ 혹은 ‘수치스러운 일을 한 자들’은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부인하거나 대적하는 자들이다. 혹은 그런 죄를 지어 교회의 권징 아래 있는 자들을 말한다. 교회는 죄를 범한 자들을 사랑의 법, 곧 권면과 징계를 통해 그들을 구원해야 한다. 교회의 권면과 징계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가르침을 받은 후 변화가 된(WLC 173문. “변화되기까지”) 후에야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 그래야 성찬에서 은혜를 누릴 수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성찬에 참여하면 할수록 더 큰 죄를 범하게 될 뿐이다.

3) 울타리가 없는 성찬과 울타리가 있는 성찬

그리스도의 교회에는 현재 성찬의 종류가 두 가지이다. ‘울타리가 없는 성찬’과 ‘울타리가 있는 성찬’이다. ‘울타리가 없는 성찬’을 주장하는 교회는 ‘성찬이 주님의 것이기에 세례를 받고 주님의 교회의 회원이 된 자는 누구든지 참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국교회는 이런 입장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성찬에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물론 세례를 받은 자에게만 허락된다. 그런데 활짝 열어 놓았기 때문에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빵과 포도주를 받아도 아무도 막을 수가 없다. 이런 울타리가 없는 성찬을 지지하는 교회는 성도의 양심이 참여 여부를 결정한다고 본다. 이런 관점은 아르미니우스를 따르는 자들(Arminianists)이나 혹은 루터교회의 교회질서를 따르는 자들(에라스투스를 따르는 자들)이 주장했던 것이다. 용기가 있는 사람은 쉽게 성찬에 참여하지만 소심하거나 우울한 사람의 경우 성찬에 참여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성찬에 참여할 자는 개체교회의 회원으로 적절한 믿음과 행위를 나타내며 그 교회의 질서를 따라 살아가는 자이다. 고린도교회도 지역교회로서 악한 사람이 있었고 그들을 권징을 통해 내쫓아야 했다(고전 5:13). 이것이 지역 개체교회에 맡겨진 책임과 의무이다. 그래서 각 교회는 성찬에 합당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성경 해석을 통해 결정해야 할 의무가 있다. 고린도교회는 지역 개체교회로서 성찬에 참여할 자와 그렇지 않은 자에 대한 조치를 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울타리가 없는 성찬’은 교회가 취해야 할 방법은 아니다. 왜냐하면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것을 성경이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성찬을 관리함으로 성도의 영적 복지를 책임진다. 그러므로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의 성찬은 ‘울타리가 있는 성찬’이다.
 
종교개혁 교회는 성찬에 아무나 자유롭게 참여하지 못하도록 문을 활짝 열지 않고 닫았다(제네바 요리문답 368-373문, WC 29장 8항, WLC 173문). 성찬 참여는 반드시 신앙고백을 한 신자에게만 허락되어야 한다. 그러니 세례가 첫 번째 문인 셈이다. 세례 받은 자는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데, 문제는 세례가 세례답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사실 때문에 세례 받은 자에게 무조건 성찬 참여를 열어둘 수가 없다는 것이다. 교회는 성찬에 참여하는 자의 신앙고백과 삶을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 교회의 질서와 규율이 필요하다. 교회는 성찬을 감독해야 할 의무가 있다. 교회의 당회는 바로 이것을 감독하는 중요한 역할을 책임지고 있다. 이 역할을 감당하게 되면 ‘울타리가 있는 성찬’을 하게 된다. 특별히 종교개혁 당시 대부분의 시민들이 로마 천주교회의 세례를 받은 입장이었다는 것을 고려해 본다면 더욱 더 그렇다. 로마 천주교회의 세례는 이름만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될 뿐 그 의미를 알지 못하고 미신적으로 행했다. 성찬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신앙을 인정할 수 없다. 단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을 다시 반복해 세례를 주지는 않는다. 로마 천주교회로부터 온 자들은 신앙고백을 다시 배우고 고백해야 한다.

오늘 한국적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울타리가 있는 성찬’은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한국 교회는 ‘울타리가 없는 성찬’을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례와 성찬의 의미에 대해 무지한 교인들을 성찬에 참여시키고 있는 것은 교인에게 죄를 짓도록 만드는 것이다. 더구나 한국 교회가 한두 시간의 교육 후에 너무나 쉽게 세례를 주는 것도 문제이다. 한 마디로 교회의 문턱이 너무 낮다. 복음과 신앙고백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가운데 세례를 받았으니 ‘무지한 경우에’에 속하고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또한 죄 가운데 지속적으로 거하는, 드러난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해 교회가 권징을 행하지 않고 성찬에 참여하게 함으로 죄를 먹고 마시도록 하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3. 한국교회의 현실

1) 신앙고백과 교리교육의 부실

한국 교회가 수적으로 급성장을 이룬 것은 교회 역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지만 어두운 면이 없지 않다. 그것은 믿는바 신앙고백과 교리가 약하다는 것이다. 믿음의 겉모습과 외양(대형교회와 건물, 수많은 예배, 다양한 행사와 일)은 화려해 보이지만, 믿음의 내적 내용(신앙고백과 교리)은 부실하고 가난하다. 큰 문제이다. 교회에서 신앙의 교리를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참담하다. 수많은 이단들이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고 쉬 넘어간다. 교인들은 어린 아이와 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2) 문턱이 낮은 교회

한국 교회의 문턱은 매우 낮다. 혹자는 교회에 문턱이 있거나 높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만 교회에는 문턱이 있어야 한다. 누구나 교회에 와서 복음을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교회의 문은 활짝 열려 있어야 하지만 적당하게 세례를 주거나 아무나 성찬에 참여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한국 교회는 지금 이단들이 마음대로 출입하고 거짓 목자들이 활개를 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한 마디로 문턱이 너무 낮다. 교회 모임에 쉬 들어갈 수 있고 심지어 성찬에까지 참여할 수 있다. 이것은 교회의 세속화의 지름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교회의 거룩성이 담보될 수 없다. 교회의 대표적인 문턱은 ‘세례’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교회는 세례를 너무 쉽게 베푼다. 교회에 출석한지 1년이 되면 1-2시간 교육한 후 문답을 받고 세례를 준다. 더 나아가 ‘성찬’에 누구나 참석할 수 있다. 심지어 아이들이 성찬식에 빵을 집어 먹어도 귀엽다고 봐주는 분위기다. 심지어 가슴에 안고 있던 개에게 빵을 하나 집어 주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를 바르게 세우는 것은 어렵다.

3) 성례의 부실

한국 교회가 세례를 받기 전 교리교육을 부실하게 함으로 그 다음 단계도 부실하게 된다. 교회가 연쇄부도사태를 맞고 있는 셈이다. 곧 성례의 바른 의미가 상실된다. 세례는 하나의 세리머니(ceremony)로 전락해 버렸다. 더 이상 예배 때마다 소중한 언약의 표와 인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다. 유아세례가 돌 축하 행사하는 것처럼 바뀌고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믿는 부모인 우리에게뿐만 아니라 자녀에게도 주어졌다는 것을 표하고 인치면서 얻는 영적 유익은 없다. 세례가 언약의 표와 인이라는 것을 아는 한국 교인이 얼마나 될까? 또 세례는 미신으로 변해 버렸다. 로마교회적인 세례관이 은연중에 교회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성찬도 마찬가지이다. 성찬에 참여함으로 자신의 더러운 죄와 질병이 깨끗하게 치유될 것을 기도하는 목사나 성도들의 기대는 미신의 수준을 넘어 심각한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것이다.

4. 한국 교회를 위한 대안

종교 개혁가들은 성찬의 영적 의미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로마교회가 성찬을 우상숭배로 바꿔 버렸고 츠빙글리가 성찬을 기념(행사) 정도로 생각했지만 칼뱅은 성찬의 영적 의미(영적 임재설)를 강조했다. 한국 교회는 성찬을 통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영적 체험을 하도록 적극 애써야 한다. 성찬은 지나가는 하나의 행사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믿는 성도에게 주시는 은혜의 귀한 방편이다. 그러므로 성찬을 잘 알고 행한다면 큰 은혜를 누릴 수 있다. 그렇게 성찬을 시행하려면 한국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

1) 작은 교회의 장점을 살려라!

성찬이 제대로 이루어지도록 하려면 작은 교회가 유리하다. 작은 교회가 안타깝게도 대형교회를 흉내내거나 따라가고 있다. 그러나 작은 교회는 장점이 많다. 특별히 성찬을 잘 행함으로 영적 유익을 누릴 수 있다. 성찬에 울타리를 치기도 쉽다. 누가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찬에 참여하지 못할 때 그가 성찬의 소중함과 귀중함을 알게 되고 사모하게 될 것이다. 성찬과 신앙과 삶을 연결하기 쉽다. 작은 교회는 규모가 작기 때문에 교인의 영적 보호와 돌봄을 위해 당회의 역할이 쉽다. 울타리가 있는 성찬을 행하기가 훨씬 쉽다는 뜻이다. 

2) ‘울타리가 있는 성찬’, 자주 하는 것이 좋다!

한국 교회는 울타리가 없는 성찬을 시행해 가능한 많은 사람이 참여하도록 하고 있긴 하지만, 성찬의 횟수가 일 년에 3-4번 정도이니 실제로 은혜의 방편을 너무 적게 사용하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교회가 울타리가 있는 성찬을 시행하지만 성도들의 참여 횟수를 늘릴 수 있다. 그 방법은 성찬의 횟수를 늘이는 것이다.

로마교회는 예배가 있을 때마다 성찬을 한다. 개신교회가 종교개혁을 할 때 로마교회의 우상숭배적인 성찬을 피하다 보니 일 년에 3-4번 성찬을 하고 있다. 칼뱅 자신도 일 년에 3-4번밖에 성찬을 하지 못했지만 본인은 매 주일 성찬을 하길 원했다. 최근 한국에도 매주 성찬을 하는 교회들이 생겨나고 있다. 바람직한 일이다. 모든 교회가 바로 이렇게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성찬의 횟수를 늘려 간다면 울타리가 있는 성찬이지만 은혜를 더 많이 누리는 성찬이 될 것이다. 필자의 교회는 1년에 성찬을 6번 시행하고 있다. 두 달에 한 번인 셈이다.

3) 큰 교회에서도 울타리가 있는 성찬이 가능하다!

큰 교회는 울타리가 있는 성찬이 옳다고 여기더라도 현실적으로 시행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주일 예배를 몇 부로 나눠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교구별로, 구역별로 예배에 출석하지 않고 각자 자기가 편한 시간에 참석하다 보니 교인들의 영적 생활을 감독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들의 예배 출석 현황을 파악하기도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는 울타리가 있는 성찬을 행하기 어렵다.

그러나 큰 교회가 울타리가 있는 성찬을 행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목사나 장로가 담당하고 있는 교구별로 특정 예배 시간을 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3부 예배를 하는 교회는 1-5교구는 1부 예배, 6-10교구는 2부 예배, 11-15교구는 3부 예배에 참석하도록 하는 형식이다. 이렇게 바뀌면 교구 성도의 영적 관리가 가능해 진다. 이렇게 바뀌면 우선 교인이 좀 불편해 할 것이다. 편한 시간에 예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인이 교회의 영적인 감독과 보호를 받게 되니 이런 방식이 교인에게도 결국 좋다.

이런 여건이 조성되면 울타리가 있는 성찬을 시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성찬에 참여하지 말아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파악해 목사와 장로가 감독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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