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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집사직 제도에 관한 연구
언약 2014-07-28 추천 2 댓글 0 조회 1462

여집사직 제도에 관한 연구

                                               허순길

 

1. 동기

 

오늘날 개혁주의 교회는 여성직분의 수용 문제에 대해 가부간의 분명한 답을 제시해야할 입장에 있다. 이 문제는 지난 여러 해 동안 나타난 여성의 사회적 입장의 급속한 변화와 상당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20세기말에 여성해방운동은 우리들의 가족, 교회 및 사회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개혁중의 교회들은 교회생활에서 여성의 위치에 관하여 토론을 하게 되었다. 교회란 사람들이 없는 고도(孤島)가 아니라, 세상 가운데 존재하고 있다. 교회에 속한 많은 여성들의 사회적 입장이 향상되고 있으며, 지난날보다 이들의 교육적 배경이 개선되었기 때문에 이따금 지도자적인 자리에 나아가게 되었다. 성경의 가르침이란 어떤 한 시대와 문화에 매여 있는 것이라는 새해석학(New hermeneutics)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성경 가운데 어떤 내용은 매 낡고, 그대로 지지하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여성직분을 교회에 받아들였다. 어떤 교회는 여성에게 장로나 목사직분은 허용하지 않으면서, 여집사 직분제도만을 수용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 여집사직의 도입이 여장로와 여목사제도를 받아들이는 첫걸음이 된 경우가 더러있다. 그런고로 여집사직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교회에 수용될 수 있는 것인지 살펴보는 것이 매우 필요하게 되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성경으로부터 절대권위를 가지시고 말씀하고 계신다.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 하나님은 모든 종교적 논쟁과 모든 개인적 의견에 대한 최고의 판단자가 되신다. 성경은 신앙의 생활의 유일한 규칙이다. 그런고로 교회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경청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영구한 효력을 가지게 된다. 성경이 특수한 시대를 향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모든 시대에 사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그의 계시로 주어진 것이다. 그런고로 성경을 문화적인 상대적 산물로 보는 새 해석학은 거부되어져야 한다. 성격 속의 어떤 규정들이 영구한 것인지 일시적인 것인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허용하는 바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이 논문의 목적은 여집사 제도가 성경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것인지를 연구하려는 것이다. 이 문제가 분명하게 되어야 하는 것은, 어떤 개혁 교회들은 이미 이 제도를 받아들였고, 다른 교회들은 받아들이기를 주저하거나, 혹은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집사

 

1) 성경에 없는 여장로제도

성경은 교회직분이다 정치에 대한 법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의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 문제에 있어서 그의 교회를 무지 가운데 전적으로 내버려두시지 않으신다. 교회는 성령과 말씀으로 재창조함을 입은 백성들로 이루어진 새 공동체이다.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그의 제자들을 불러 교회의 터가 되게 하신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오른편에 놉이심을 받게 되었을 때에 친히 그의 교회에 직분자들을 주셨다. 그의 영이신 성령님은 사도들을 인도하여 그의 교회를 세우시고, 또한 이 세우신 교회를 인도하고 다스리기 위해 직분자들을 불러 세우셨다. 사도행전과 서신들은 이 역사의 흔적을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성경은 장로직에 관하여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11:30, 14:23, 20:17-35, 딤전3:1-7, 5:17, 1:5-9) 그리고 이 직분 임직에 대한 분명한 명령과 요구조건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런데 중세 때에 교회는 교권체제의 등장으로 성경적인 직분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개혁주의 교회는 성경에 따른 직분을 드디어 회복했다. 개혁주의 교회들 간에 장로직에 관하여 다스리는 장로와 가르치는 장로의 기능에 관해 어느 정도의 의견차이가 있지만 그 직분의 확실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견해 차이가 없다.

 

장로직에 관한 선명한 규정 중의 하나는, 이 직분이 남성에게만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직책이 교회에 권위를 행사하고, 권징으로 시행함으로 신자들을 교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한 성경의 교훈이다. 성령께서 바울을 통해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가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 할 지니라고 말씀하셨다.(딤전 2:12) 물론 이 교훈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여자란 절대 침묵 속에 살아야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지 않다. 이는 여자가 교회에서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거나 징계하는 자리에 서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자들이 교회에서 기도를 할 수 있고, 예언도 할 수 있었다.(고전 11:5) 그러나 이 침묵에 관한 교훈은 그 시대 에베소의 특별한 문화 때문에 디모데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이 교훈은 창조의 질서를 따라 주어진 것임으로 영구적으로 효력이 있다. 그러므로 이 교훈은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효력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이유를 밝혀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어 빠졌음이니라고 했다.(딤전 2:13, 14)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일찍이 하신 말씀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었다. 어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시험하여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고 물었다. 이 때 주님은 옛 창조의 법을 언급하시면서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 찌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 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찌니라고 대답하셨다.(19:36) 태초에 하나님은 사람을 그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사랑가운데 하나가 되게 하셨다.(“나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 그러나 이들 각각의 역할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었다. 남편은 인도하는 의무를 가졌고, 아내는 그를 돕는 베필로서의 역할을 맡았다. 이 다른 역할의 작용은 결혼 생활에서 뿐 아니라, 교회 생활에서도 필요했다. 그래서 우리들의 결론은 장로직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교회의 남자들에게만 한정된다는 것이다.

 

2) 집사직책은 자비의 사역에서만 한정되지 않음.

성경은 집사직에 관하여는 장로직에 관해서보다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않다. 집사를 교회의 직분으로 분명하게 말하는 곳은 단지 두 곳뿐이다. 디모데전서 3:813은 장로직분과 함께 집사직분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의 자격을 말하고 있다. 빌립보서 1:1은 감독 다음에 집사를 언급하고 있다. 성경에서 집사직분에 관한 충분하지 못한 증거 때문에 교회역사에서 여러 서로 다른 견해들이 나타났었다. 감독교회정치 체제를 주장하는 교회들은 집사를 말씀을 봉사하는 직분으로 보아왔다. 예를 들면, 영국 국교회에서 집사는 목사를 의미한다.

 

초대교회에서 집사의 기능은 무엇인가? 그 기능이 장로직 만큼 분명하게 기술되어 있지는 않다. 디모데전서 3장으로부터 가르치기를 잘하여야 한다.”는 것 외에는 감독의 자격과 거의 같은 자격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런고로 집사직분의 기능이 무엇이라 분명하게 정의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오랫동안 개혁교회는 그 직책을 기독교적 자비의 사역과 사람들의 물질적인 궁핍을 돌보아 주는 것으로 이해했다. 사도행전 6장에 나타나는 일곱 사람들이 거기서 집사라고는 전혀 불려지고 있지 않지만은 이들에게서 집사직의 기원을 보아 왔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집사의 직책을 기독교적 자비를 베푸는 일로 이해해온 것이다. 그러나 근래에 개혁주의 교회 진영에서 집사직의 기능에 대한 다른 견해들이 제시되었다. 이 견해의 주장은 그 일곱 사람들은 오늘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과 다른 단순한 자비사역에 봉사하는 집사직분이 아니고, 정상적인 교회 교제생활을 돌보기 위해 세움을 입은 사람들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개혁주의 학자들은 종종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언급하면서 집사직의 자비의 봉사를 증거하려 노력해 왔다. 이 점에서 바빙크의 말은 매우 주목할만한 것이었다. “그는 가르치는 직분을 통해 가르치시고, 장로직을 통해 인도하시며, 집사직을 통해 그의 양무리를 돌보신다, 그리고 그는 이 세 직분을 통하여 우리들의 가장 큰 선지자, 우리들의 영원한 왕, 우리들의 자비로우신 대제사장이 되심을 보여주신다.” 이 직분관에 따라 대부분의 개혁주의 교회는 오랫동안 집사직의 봉사영역을 궁핍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로 엄격히 제한시켜 왔다. 그러나 금세게 사회보장제도가 잘된 나라에서 이런 일에 대한 집사의 봉사의 필요성이 점차 줄어들었고, 물질적인 자비의 사역에 별 관계를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고로 이들은 전보다 더 넓은 영역에서 그들의 봉사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집사직의 봉사는 대부분의 개혁교회에서 아직도 궁핍한 자를 돌보는 자비의 영역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집사의 봉사 영역은 궁핍한 자를 돌보는 기독교적 자비보다는 확실히 더 넓다. 왜냐하면 집사”(diakonos)라는 말이 이나 돕는 자를 의미하고, 이 말은 교회내의 궁핍한 자들을 물질적으로 돕는 것 이상의 넓은 의미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집사는 교회내의 성도의 교제가 더 잘 되어 지도록 하는 일을 돕거나, 목사의 목회사역을 돕거나, 주일에 교회의 집회를 돌봄으로 교회를 섬길 수 있다. 그런고로 집사의 봉사를 가난한자들을 물질적으로 돌보는 것만으로 한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3) 집사와 장로의 차이

우리들이 제시하는 다음 문제는 집사직과 장로직의 차이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집사들이 가르치는 기능을 갖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가르치기를 잘하며하는 요구조건이 감독에게서만 발견되고, 집사에게서는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딤전 3:113) 그러나 사도행전에 나타난 일곱 사람들 가운데 스데반과 빌립은 설교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앞서 언급한대로 이들이 원래 집사로 세움을 입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집사가 빌 1:1에 감독 다음에 언급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집사가 감독과 함께 교사였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장로들이 교회에서 집사들과는 뚜렷하게 구별된 공식적인 모임()을 이루고 있었다는 한 가지 사실은 매우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이 장로의 회(presbyterium)를 형성했었고, 이 회가 디모데를 직분자로 세우기 위해 안수를 했다.(딤전 4:14)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렀을 때에, 집사들은 부르지 않고, 장로들만을 불렀었다. 이들에게 행한 그의 고별사의 내용은 양무리들의 감독자요, 전해진 복음의 수호자들이었던 장로들에게만 합당했다. 장로들은 교회 안에서 권위있는 취임예식을 집행하고, 권위있는 가르침과 교정적 권징을 시행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집사가 이런 권위적 행위에 관련된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집사(diakonos)”라는 말은 섬기는 사람혹은 ”, “봉사자를 의미한다. 그런고로 집사는 참으로 그 말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교회를 섬긴 종들이었다. 모든 신자는 사랑과 봉사의 명령 아래 살고 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섬기는 자이다. 왜냐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섬기로 오셨기 때문이다.(10:45)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사랑의 공동체요, 섬김의 공동체이다. 주께서는 교회 안에 섬기는 생활에 주도적 여갈을 할 직분을 가지기 원하셨다. 그래서 그는 집사직분을 세우셨다. 집사의 원형은 그리스도였다. 그러니 집사는 섬기는 역할에 있어서 교회의 대변자로 볼 수 있다.

 

3. 여집사

 

이제 우리는 묻게 된다. 집사가 권위적 성격을 가진 가르치는 행위와 권위를 행사하는 권징 시행에 관련하지 않고, 단지 봉사에만 관련하게 된다면, 교회생활에서 여집사를 세울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가? 성경에 이에 대한 어떤 증거가 있으며, 역사에 그런 어떤 흔적을 찾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성경은 여자들이 교회생활에서 봉사활동에 관련했었다는 적극적인 증거를 주고 있다. 디모데전서 3:11, 로마서 16:1, 디모디전서 5:316), 사도행전 6:16은 이에 대한 주요 증거 장절이다.

 

1) 디모데전서 3:11여자들”(gynaikes)

디모데전서 3:11에 언급한 여자들이 어떤 분드리었는가를 밝히기 위해 상당한 논쟁이 있어 왔다. 오늘날의 많은 주석학자들은 그들이 여자봉사자들(여집사)이었다는 결론을 내고 있다. 이는 집사직에 필요한 자격요건들을 서술하는 가운데 그 여자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에 특별히 주목한 때문이다. 이 여자들이 누구일까? 여기 쓰인 희랍어는 그저 아내들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의 의미는 문맥을 잘 고려함으로 짐작을 할 수 있게 된다. 주석가들은 이 허위에 대한 여러 가지 번역과 의견을 제시고 있다. 감독들과 집사들의 아내들, 집사들의 아내들, 여집사들, 집사들()과 유사하나 이들과는 구별된 여자들의 무리 등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여자들이 감독과 집사들의 아내들일 수는 없다. 이 보다는 집사들의 아내일 가능성이 더 있다. 그렇지만 이 경우에도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된다. 바울이 집사들의 아내들에 관하여 말하려 했다면, 왜 그가 여자들이란 말 앞에 그들의라고 하는 소유대명사를 사용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바울은 이 소유대명사를 사용하는 대신에 이 여자들을 감독들과 집사들과 병치시켜 새롭게, 이들과 유사한 종류의 사람들을 의미하는 방법으로, “여자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여자들이 이와 같이라고 말했다. 이 말의 중요성은 감독들(2)과 집사들(8), “여자들도 이와 같이”(11)라고 말하고 있다. (감독들, 집사들, 여자들)사이의 관계가 매우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또 주복할 만한 것은 헬라어 원문에 집사들을 소개하는 문장과 여자들을 소개하는 문장이 각기 자체의 동사를 가지고 있지 않고 감독에 관해 서술하기 위해서 이미 사용된 동사(dei = must be)를 가정하고 있다. 집사들과 여자들에 대한 자격요건은 하나하나 병행적이다. 그래서 문맥과 셋(감독, 집사, 여자들)과 여인들과 집사들에 대하여 요구되는 자격 요건간의 병행으로부터 그 여자들은 집사들의 아내가 될 수는 없다. 이들은 집사들과 유사하거나, 집사의 사역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진 여자들의 무리일 것임이 틀림없다. 결국 이 여자들은 절대적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는 없으나 여집사였던지, 아니면 적어도 집사들의 보조자(assitent-deacons)들이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2) 로마서 16:1에 나타난 교회의 일꾼뵈뵈

성경에 여집사직분의 개념에 대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어떤 다른 장절이 있는가? 여집사에 대한 개념을 성경 한 장절로 확정지을 수 없다. 한 성경책의 내용은 언제나 다른 성경책의 빛 아래에서 읽고 이해해야 한다. “성경을 해석하는 유일한 법칙은 성경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어느 성경 한 구절이 내포하고 있는 참되고 완전한 뜻에 관해 여러 가지 의미가 잇는 것이 아니고 하나밖에 없다. 그러므로 무슨 의문이 있을때는 더 분명하게 말한 다른 성구를 통해서 살펴 이해해야 한다. 언제나 성경의 일치성이 있다.“

 

성경에 집사직 제도에 대한 방향을 가리키는 다른 장절들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로마서 16:1로서 뵈뵈라는 여자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a servant, diakonos)"으로 불려지고 있다. 여기 우리말로 일꾼으로 번역된 헬라어 디아코노스(diakonos)"라는 말에 관하여는 주석학자들 간에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 그런고로 성경 번역은 다양하게 나탄나고 있다.(AV; servant, RSV; a deacones, NIV; a servant [footnote에는 deacones), 한국어 성경; 일꾼) “디아코노스란 말은 단순하게 일꾼, , 섬기는 자, 봉사자 혹은 직분으로서의 집사를 의미할 수 있다. 그 의미는 문맥을 따라 결정되어져야 한다. “디아코노스란 말이 성경에서 직분의 명칭으로 사용된 적이 없으면, 로마서 1:1에 있는 디아코노스는 단순히 일꾼 혹은 봉사자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어희가 분명한 직분의 명칭으로 쓰여진 적이 있다.(딤전 3:8, 1:1) 만일 뵈뵈가 남자였다면 이를 집사직분으로 주장하는데 아무런 의문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뵈뵈가 여자였기 때문에 다른 의견들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허휘는 직분을 가리키고 있음을 감지하게 한다. 왜냐하면 이미 앞에서 논의한 대로 디모데전서 3:11에 언급한 여자들이 여집사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편지의 휴대자로 믿어지는 뵈뵈는 그녀와 교회와의 관계로 인해 로마교회에 소개되고 있으며,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과거의 봉사 때문에 천거되었다. 뵈뵈는 교회에서 특별한 직책을 가져왔음에 틀림이 없다. “디아코노스라는 어휘가 아직 집사 직분을 가리키는 전문적인 용어가 될 수는 없다. 이것은 단순히 지역교회를 위해 그녀가 행해 온 정규적 봉사에 의해 이해될 수 있다. 정착된 집사직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 결과적으로 이 어휘가 후에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썼을 때, 디모데전서 3장에서 직분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처음으로 분명한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디아코노스라는 어휘는 이미 직분의 명칭으로 주형되고 있었음이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그것이 직분 명칭이었다면 왜 바울이 남성 명사 “diakonos"를 사용하고, 여성명사 ”deacones"를 사용하지 않았느냐? 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 시대에는 여성명사 “deacones"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집사의 남성명사가 남녀 양쪽을 위해 다 사용되어졌으므로 여성인 뵈뵈의 경우우에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뵈뵈는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집사)으로서 공식적인 자격으로 로마에 있었다. 그녀는 어떻든 확실히 여자 일꾼이었다.

 

여집사직이 초대교회에 소개되었다는 것을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디모데전서 3:11과 로마서 16:1이 긍정적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나아가 주님께서 영적인 은사를 받은 여자들을 그의 교회건설을 위해 사용하신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이런 방향에 대해 적극적인 생각을 갖게 한다. 바울이 많은 여자 동역자를 가지게 된 것은 매우 흥미스런 일이다. 예를 들면 바울은 브리스길라, 유도키아, 신디케드를 언급하고 있다.(16:3, 4:2) 그의 봉상는 상당수의 여자들이 동역자로 가담했었다. 그의 봉사에서 여자들의 역할이 무엇이었을까? 누구도 이에 관하여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 성경으로부터 자세한 정보를 찾아보아야 한다. 브리스길라는 그의 남편과 함께 그의 집에서 아볼로를 가르쳤다는 증거가 있다.(18:2428) 그러나 이로 인해 그녀가 공식적인 의미에서 장록 혹은 교사로 행동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왜냐하면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이런 종류의 직분은 여자들에게 금지되었기 때문에 신약에서 다스리는 여장로나 가르치는 여장로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딤전 2:1114, 고전 14:3335) 그렇지만 여자들이 주어진 은사를 가지고 선교사역이나 교회건설에 봉사를 했다는 것은 바울의 동역자중의 여자들을 보아 안전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3) 디모데전서 5:9와 사도행전 6:1에 나타난 과부들

사도시대에 여집사가 있었다는 기능성은 위에 든 성경부분에 언급된 과부들에 대한 해석으로 말미암아 강도를 더하게 된다. 이 양 성경부분에 나타난 과부들은 여집사의 방향으로 향하게 만든다.

 

(1) 디모데전서 5:9과부

디모데전서 5:9의 과부들에 관하여서도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들을 물질적으로 핍절한 과부들로 본다. 그러나 칼빈은 이들을 여집사로 보고 있다. 그는 로마서 12:8과 디모데전서 5:910의 해석을 따라 두 종류의 집사를 소개했다. 그는 첫째로 로마서 12:8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고 한 말씀을 따라 구제를 하는 집사를 언급한다. 둘째 종류의 집사는 가난한자와 병든자를 돌보는 데 헌신하는 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언급한 과부들이 이 종류의 집사에 속한다고 말한다.(딤전 5:910) 여자들은 가난한자를 돌보는 일에 헌신하는 이외의 어떤 다른 공직을 메울 수 없다. 우리들이 이를 (이것이 수용되어져야 하기 때문에) 받아들인다면 가난한자들에 대한 업무를 집행함으로 교회를 섬기는 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직접 돌아보는 자들인 두 종류의 집사들이 있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것은 칼빈이 과부들을 교회내의 공적 직분인 여집사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여기 언급된 과부들이 어떤 류의 여자일꾼을 의미한 것인지 문맥으로부터 분명하다. 바울은 5:3에서 참 과부인 과부를 경대하라고 명령한다. 5장 전장의 문맥속에서 이것을 주의 깊게 읽으면, 여기 경대하라는 말이 과부를 경제적으로 돌보라는 뜻이 아닌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16절이 과부를 경제적으로 돌 볼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경대하라고 말하지않는다. 나아가 바울은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아라고 명령한다.(17) 또한 18절에 장로를 경제적으로 돌볼 것을 말하고 있으나, “경대하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915절에 바울은 나이 육십이 덜되지 아니하고, 명부에 올리게 될 과부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이것은 확실히 경제적인 도움을 위한 것이 아닐것이다. 왜냐하면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는 육십이 덜된 과부들만이 경제적인 도움을 받게 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이상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이 절들에서 바울은 과부들을 경제적인 도움으로 경대할 것을 명령하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다. “경대하라는 말은 경제적으로 도움 이상을 의미했다. 참된 과부들은 경대를 받을만한 분들이며, 이들이 명부에 오를 수 있다. 참과부인 과부들은 나이 육십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이들은 자녀들을 소유하고 그들의 형제자매들에게 도움을 받고 있는 자들과 구별된다.(35, 16) 이 참 과부들은 경제적 문제와 관련되지 않고 특별한 직책과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명부에 올린다는 말이 특별히 이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명부에 올린다는 헬라어 칼레게스다이모집한다.”, “지명한다.”를 의미하고, 부름을 받고 특수한 직책을 위해 구별되어진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다. 결과적으로 9절에서 우리는 특수한 직책을 위해 임명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 과부들의 직책이 무엇이었는가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에베소 교회가 벌써 봉사하는 과부 제도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이에 대하여 부언할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3절은 그 직책이 교회건설을 위해 집집에 돌아다니는 것이었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다.

 

디모데전서 5장에 나타난 과부에 대한 교려를 마치면서 이 과부들이 디모데전서 3:11에 언급된 같은 여자들, 아니면, 그들과 유사한 여자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들은 3:11에 그 여자들의 남편에 관한 아무 언급이 없기 때문에 같은 무리의 여자들에 속한 것으로 생각되어질 수 있다. 그 여자들(3:11)과 참 과부들(5:3) 양자가 다 항구적인 직책을 위해 임명되었음이 확실하다. 바울이 왜 같은 편지에 두 번이나 이들을 언급했는가 의문을 던질 수 있다. 그러나 사도가 같은 유의 사람들에 관하여 두 번 언급한 것을 이사앟게 여길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3:11에서 그는 그 자격을 다루었고, 5장에서는 교회 내에서의 상소 관계성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는 3장에서 감독의 자격을 다루고, 5장에서는 이들을 배나 존경해야 할 것을 다루고 있다. 결과적으로 늙은 과부들(5:19)은 집사 일을 돕기 위한 여자들로 임명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한가지 매우 분명한 것은 어떤 과부들(여자들)이 교회생활 건설이란 직책을 수행하기 위해 임명되었다는 사실이다.

 

(2) 사도행전 6:1에 나타난 과부들

교회생활의 건설을 위한 과부들의 봉사가 예루살렘교회에서 생소한 일이 전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주석가들이 거기 언급된 헬라파 과부들을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는데 빠진 분들로 보고있다. 그러나 또 다른 주석가들은 매일의 구제(daily ministry)의 봉사로부터 소홀히 여김을 받은 자들로 간주하고 있다. 이 과부들을 둘러싼 문맥으로부터 후자가 더 바른 주해인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점은 1절에 언급된 매일의 구제(The daily ministration)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달려 있다. 이 말이 NIVRSV에서는 매일의 분배”(The daily distribution)로 국어로는 매일의 구제로 서로 달리 번역되어 있다. 이 말이 매일 가난한 자 돌보는 일을 의미하는 것일까? 당시 과부들이란 일반적으로 가난하고 경제적인 도움을 필요로 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지는 않았다. 욥바에 있는 도르가다비다라고 불린 주의 제자였다.(9:3645) 그녀는 언제나 선행과 구제하는 일을 많이 하였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속옷과 겉옷을 보이며 울었다. 이 이야기를 주의 깊게 살펴 보면 그녀가 과부들을 위해 옷을 만들었다고 말할 수 없다. 거기 이런 증거가 전혀 없다. 또한 도르가는 그 과부들 중 한사람이었는지 모른다. 이 과부들은 가난한자들과 주의 제자들을 위해 속옷과 겉옷을 만들므로 함께 선행을 해 왔을 수 있다. 물론 이는 그 과부들이 부자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단지 과부들이 항상 가난하지는 않았고 구제를 받고 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우리들이 전장의 문맥으로부터 1절을 읽을 때 헬라파 과부들이 구제에 등한히 여김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지 못하다. 사도행전 2:454:35은 모든 삶이 자기 필요를 따라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돌연히 한 무리의 과부들이 구제 받는데 소홀히 여김을 당하게 되고, 빈곤 속에 살게 되었다고 듣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저 첫 교회에 민족차별이 있었다고 생각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다이 주의 교회 안에 그런 흔적이 전혀 없고 모두가 마음을 같이 하였고, 일치성을 보였었다. 그런고로 헬라인들의 원망은 그들에게 속한 과부들의 구제물품을 받는데 소홀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터져 나왔다고 말하는 것은 합리적이 아니다. 헬라인들의 원망의 이유는 다른 것에서 찾아야 한다.

 

매일의 구제라고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는 말은 매일의 봉사”(the daily ministration)라고도 번역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매일의 봉사는 매일 가난한자를 돌보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어떤 다른 것을 의미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열두 사도들이 모든 제자들을 불러 일곱 사람을 택하도록 말한 것이 우리들의 주목을 끈다. 사도들은 그들이 공괴”(=식탁에서 섬기는 일, to serve table)를 담당하기 원했고, 자기들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전하는 것에 전무하기를 원했다.(2) 이로서 우리는 그 문제의 요지가 공괴(식탁에서 섬기는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2절에 있는공괴(식탁봉사)”로부터 1절에 언급한 매일의 봉사는 새로운 뜻을 얻게 된다. 이 새 의미를 받아들인다면 헬라사람들의 원망의 원인이 그들 과부들이 물질적인 공급을 잘 받지 못한 때문이 아니고, 매일 식탁에서 섬기는 일에 동참하는데 소홀히 여김을 받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초대교회가 매일 집에 모여 식탁에서 음식을 함께 먹은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사도행전 2:46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라고 한다.(5:42절에도 저희가 날마다라고 한다.) 매일 식탁에서 떡을 뗀 것은 교제(성례적)의 식사를 의미했으며, 동시에 이는 핍절한 자들을 위한 식사이기도 했다. 그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빠르게 성장해 갔고, 열두 사도들이 충분하게 구제품을 나누어 줄 수 없었으며, 매일의 식탁 봉사만을 할 수도 없었다. 이들은 날마다 성전과 집에서 모임을 가졌고 고제의 식사를 하였다. 믿는 자들은 그 수가 많기 때문에 한 집에서 모임을 갖지 않고, 많은 집 많은 장소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래서 사도들은 도와주는 자들을 분명히 가져야 했다. 매일 모이는데서와 식탁에서 봉사하는 일에 어떤 히브리 과부들은 보조자들로서 교제의 식사를 하는 일에 관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봉사에 헬라인 과부들이 간과되고 소홀하게 되어졌다. 그 때에 과부들이 어떤 자격을 가졌었는지 분명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들이 날마다 모이고 교제의 식사를 하게 되었을 때에 적극적인 봉사를 했다는 사실이다. 이 과부들이 디모데전서 5장에 언급한 참과부(여집사?)의 기원이 되었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 과부들이 날마다 베푼 상에서 어떤 자격으로 봉사했는지 말하기는 어렵지만, 여자들이 영적 은사를 받았고 주의 교회의 번영과 건설을 위해 사용되어졌다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런고로 이 과부들은 날마다 베푸는 식탁을 도운 자들이었고 일종의 여집사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4. 역사적 증거

 

이 논문에서 여자들이 사도적 교회의 교회생활에 능동적으로 연루되었음이 확실하였다. 여집사에 대한 어느정도의 증거를 살펴보았다. 이 사도적 관행이 초대기독교회에 계속되었다. 그 흔적을 초대교회사에서 발견하게 된다. 트라얀(Trayan) 황제가 비드니아(Bythnya)에 보낸 로마 시장 폴리니(Pliny)는 그의 편지에서 여집사(deacones, ministrae)”라고 불려진 두 여자 종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 두 여자들은 여집사(deaconesses)로 불려졌기 때문에 교회의 직분에 관련되었음이 분명하다. 5세기까지 여집사의 흐넞이 바력노딘다. 4세기에 유명한 설교자 크리스톰(Chrysostom)의 편지에서 여자 집사인 부유하고 믿음 있는 올림피아스(Olympias)가 발견된다.

 

종교 개혁시대에 칼빈은 여집사직을 도입했다. 이미 언급한 대로 칼빈은 디모데전서 5장에 언급한 참과부를 여집사로 보았고, 핍절한 자들을 돌보기 위해서 여집사들을 세웠다. 유럽대륙의 개혁교회들이 그 예를 따랐고, 이 직분이 17세기 이후 차츰 사라졌을 때까지 유지되었었다. 화란 개혁교회가 피난 중에 모였던 웨이셜 회의(The convent of Wezel, 1968)는 여집사 직분을 도입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화란인들이 피난에서 돌아온 후 1578년에 암스텔담의 교회는 여집사 직분을 도입했었다.

 

5. 결론

 

이 연구로부터 여자들이 교회 봉사에 적극 가담하게 되었고 제외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여자들도 남자들과 꼭 같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었고(3:2628, 고전 12:27) 그리스도의 몸을 봉사하기 위한 은사를 받았었다.(고전 12:427) 그러나 결혼생활에서와 같이 교회생활에서도 남녀간의 역할의 차이가 있다. 여자들이 남자에 대한 권위적 역할이나 행동을 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이것은 분명한 성경의 교훈이다.(딤전 2:1114, 고전 14:3336) 이 교훈에 의하면 공적으로 징계를 하거나 설교를 함으로 남자들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장로직은 여자들에게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적 자비를 베푸는 봉사와 교회의 안녕을 위한 보조적 활동은 할 수 있다. 이 논문에서 언급한 대로 교회를 위한 여자들의 봉사에 관하여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무엇이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도시대에 여집사(딤전 3:11에 여자들과 롬 15:1의 뵈뵈)와 여성 협조자들이 있었다는 것(딤전 5장의 참과부들과 행 6장의 과부들)을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디모데전서 5장의 참과부들과 행 6장의 여집사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들은 다른 여자들(여집사들)과는 다른 범주에 속했던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상대적으로 엄격한 규칙이 이들에게 적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육십이 덜되지 아니하고, 재혼하지 않는 자들, 그러니 이는 항구적인 직분인 듯) 그러나 이 차이가 여자들이 교회생활 건설에 사용되어졌다는 사실에 대하여서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오늘의 교회에 여집사 제도를 도입해야 하는가? 혹은 도입해도 되는가? 하는 것이다. 장로직 제도는 주의 명령의 문제이기 때문에 교회에 꼭 있어야 한다.(13:23, 1:5) 그러나 집사직은 장로직분과는 다르다. 성경에 집사를 세우라는 명령이 없고, 단지 집사직이 있었음과 그 자격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집사직분을 세우는 것은 올바른 일이고, 교회의 의무로 보인다. 왜냐하면 성경에 감독들과 집사들이 나란히 적혀있을 뿐 아니라(딤전 3:213, 1:1) 이 직분들이 사도시대 교회의 직분이었기 때문이다. 여집사의 경우는 이 두 직분과는 다르다. 초대교회에 여집사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 직분은 원리적으로 남자집사와 같이 교려해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제도는 명령의 문제가 아니고, 또 남자 집사직처럼 분명하지도 않다. 여집사 직분을 인정할지라도, 남자 집사직분과의 관계에서 그 위치를 결정하기는 어렵다. 봉사영역에 있어서도 지도권이 필요하기 때문에 여집사는 남집사들의 협조자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사실을 고려할 때, 집사직의 문제를 접근할 때는 매우 조심할 필요가 있다.

 

여집사직을 세우는 일은 교회의무의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그 이유는 성경에서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존재에 대한 매우 적극적인 증거가 있고 많은 여자들이 교회의 안녕을 위해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런고로 어느 교회가 여집사직을 도입하게 될 때, 그것이 비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장로직과 집사직, 남자 집사직과 여자 집사직간에 분명한 구별은 있어야 한다. 성경에는 장로를 장립한 분명한 증거가 있다. (딤전 4:14, 14:23) 그러나 집사 장립에 대한 분명한 증거는 없다. 여집사에 관하여는 남집사에 관해서 보다 그 증거가 분명하지 않다. 그런고로 남집사직분과 여집사직분간의 구별이 어떤 점에서든지 있어야 한다고 보여진다. 한국 교회는 오래 전에 여집사 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나 남집사와 여집사 간에 분명한 구별이 있다. 남집사는 장로의 회(presbyterian)에 의해 안수를 받음으로 장립을 하였고, 여집사는 이와 같이 장로회의 안수로 장립하지 않았다. 장립된 남집사직은 항구적인 것이었고, 여집사직은 일년임기의 임시적인 성격을 띈 것이었다. 여집사들은 남집사들의 보조자로 간주되어 온 것이다. 이 제도는 새 해석학의 영향 때문이 아니고, 효과적인 교회의 생활과 건설을 위해 성경의 교훈을 따라 도입된 것이었다. 한국 교회의 여집사 제도는 성경적인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주님의 교회는 사도적인 교훈과 전통 속에 살아가고 있다. 변하는 세계 속에서 이들을 보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교회가 특별한 역사적 호나경 속에서 만들어진 전통에 너무 굳게 매여있게 될 위험이 있다. 성령의 조명아래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연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교회생활을 지속적으로 개혁해 나가는 것이 교회의 의무이다. 정착된 관습의 변화에 대한 필요성이 있을 때, 혹은 성경적인 원리를 따라 교회의 번영을 위해 더 나은 길이 발견 될 때, 교회는 그 전통적 관습을 버리고 단호한 걸음을 내어 디딜 수 있어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 개혁주의 교회는 전통의 수호자가 되기 위한 열심 가운데서 종종 약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교회의 여집사 직분문제에 있어서도 이것을 말할 수 있다. 이 직분을 세우라는 주의 명령이나 절대적인 증거는 없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이 방향을 가리키고 있고, 적극적인 증거를 주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성경을 따라 교회생활의 건설을 위해 여자들을 사용하는 것이 주의 교회의 복리를 위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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