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교회 <7>
고재수 : 화란 개혁교회의 교육선교사로 파송되어 고신대학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올림픽 경기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한국과 마찬가지로 화란 신문에도 스포츠가 흥미 있는 뉴스중의 하나로 취급되고 있다. 특히 어떤 종목이든지 괄목상대할 만한 실력으로 플레이하는 프로선수들의 모습은 신문의 여러 페이지에 걸쳐 대서특필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화란에는 이런 류의 기사를 전혀 취급하지 않는 신문도 있다. 바로 개혁교회에서 발간하는 신문이 그렇다. 프로스포츠에 관한 기사를 그 신문에서는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사실 처음에는 이 화란개혁교회의 신문에 스포츠 면조차 없었다. 하지만 요새는 (매일은 아니지만) 매주 두 번씩 스포츠뉴스를 싣는다. 그 보도대상은 주로 아마추어 스포츠에 관한 것이다. 또 스포츠 세계의 여러 가지 경기와 사건이 다루어지고 평가되는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런 기사들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역할을 한다. 우리 사회에 스포츠가 있는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포츠에 관심이 많다. 그러나 기독교인이라 해서 스포츠를 평가할 능력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를 모르는 것이다. 그때 이 신문은 독자들이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스포츠에 접근하도록 큰 도움을 준다.
그렇다면 올림픽 경기는 어떤가? 물론 신문에 서울올림픽의 국제적 의미와 정치적 의미에 대한 글도 많이 나왔지만 필자의 이 글은 서울올림픽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올림픽 그 자체에 대한 것이다. 1988년은 올림픽이 열리는 해인데 화란 개혁교회 교인들은 이 올림픽에 대해 무슨 정보를 받고 있는가? 결국 이 문제는 우리 신자들에게 실제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기독교인으로서 현대의 올림픽경기에 참여할 수 있거나 아들이나 딸을 거기 참가하도록 허락할 수 있을까? 화란 개혁교회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살펴보자.
헬라시대의 올림픽
확실히는 모르지만 올림픽은 B.C.776년경에 처음 실행되었다고 한다. 그 대회는 헬라의 올림피아 지방에서 4년에 한 번씩 개최되었다.
처음에는 한 종목만 있었지만 나중에는 다른 여러 종목이 추가되었다. 그것은 달리기, 레슬링, 복싱, 5종 승마 등이었다.
올림픽의 한 종목에서 우승한 사람은 상으로 야자나무 가지와 올리브나무의 면류관(월계관)을 받았다. 또 그의 훌륭한 승리에 대해 시인들은 시를 만들었고 조각가는 그의 석상을 조각했다. 본래는 다른 것보다 영광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후에는 우승한 사람은 고향에서 많은 선물과 돈을 받았고 어떤 직위까지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올림픽에서 우승한 사람은 유명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부자가 되었던 것이다.
올림픽 경기는 온 헬라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온 나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올림피아로 모여들었다. 헬라의 도시들은 서로 빈번히 싸웠지만 올림픽 경기 때만은 전쟁을 중단했다. 도시와 부족사이에 휴전한 가운데 모든 사람들은 올림픽에 참여할 수 있었다. 또 올림픽경기는 상업적인 면에서도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선수들 외에 구경꾼들도 많이 모였으므로 상인들의 가세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서 활발한 거래가 이루어졌다.
이 헬라의 올림픽의 성격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두 가지로 요약해서 말할 수 있는데, 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과 또 하나는 인간을 찬미하는 것이었다. 올림픽은 올림피아 산에 살고 있다는 제우스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제사장들은 제우스에게 제물을 바쳤다. 그 제단에는 행렬성가가 울려 퍼지기도 했다. 또 승리자를 찬미하는 시는 우선적으로 제우스에게 감사의 뜻으로 바쳐졌다. 헬라 올림픽은 궁극적으로 종교적 절기였던 것이다.
그 대회의 두 번째 성격은 인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다. 시인은 인간의 훌륭함, 인간의 용기, 그의 능력, 그의 지도력을 찬미했다. 조각가는 인간의 아름다운 몸을 영구한 것으로 만들었다. 또 승리자들이 고향으로 돌아올 때 우리들은 그를 우상처럼 떠받들었다.
올림픽 경기는 시작 이후 1,000년 이상 계속되어 오다가 기독교인이 된 데오도시우스(Theodosius)황제에 의해 금지되었다(AD.394). 그것을 금지한 주된 이유는 이 경기의 종교적 성격 즉 제우스가 숭배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 있었다.
또 다른 이유는 스포츠 투기장에서 구경꾼의 즐거움을 위해 기독교인이 죽임을 당했던 점이다. 또 부도덕, 즉 나체로 연습하는 것과 동성애도 중요한 금지 이유가 되었다.
올림픽 부활의 목표
그 후 1,500년 동안 올림픽 경기가 열리지 않다가 1896년에 처음으로 근대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이 올림픽 경기의 부활은 프랑스의 쿠베르탱(Pierre de Coubertin) 남작의 공헌이 컸다. 쿠베르탱은 수년 동안 줄기찬 반대를 무릅쓰고 그의 꿈을 이룩하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그 결과로 1894년 파리에서 올림픽 회의가 열렸다. 거기서 1896년에 그리스 아테네에서 올림픽 경기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1896년 13개국 약 300명의 참가자들이 아테네에 모였다.
쿠베르탱이 올림픽을 부활시키고자 한 동기는 그럼 무엇이었는가? 아까 지적한 대로 헬라 올림픽은 두 가지 성격을 가진 것인데 그것은 제우스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과 인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쿠베르탱은 그 첫째의 종교적 동기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로 근대 올림픽은 종교적 성격을 갖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올림픽 경기는 참되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두 번째의 성격, 즉 인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그대로 남아있다. 쿠베르탱은 교육학적인 면에서 올림픽 경기를 부활시키려고 했다. 당시 그의 눈에는 불란서 청소년들이 비활동적이고 게으른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들이 확실한 목표를 가짐으로서 게으름을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불란서의 청소년들은 세상에서 앞설 수 있기를 그는 원했다.
교육자로서 쿠베르탱은 청소년이 문제를 이기고 절도 있고 오래 참는 버릇을 가짐으로서 자기 게으름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여기에 그는 훌륭한 수단으로서 스포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쿠베르탱은 청소년들에게 그들의 최소한의 목표로서 국제적인 스포츠 곧 올림픽을 제창하기에 이르렀던 것이었다.
쿠베르탱의 이 꿈은 인본주의에서 발생된 것이 분명하다. 그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선하다고 믿었다. 어른들은 청소년들의 속에 있는 좋은 성격이 나타나도록 애써야 하는데 인간의 선함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으로 스포츠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자기의 노력과 자기의 훈련을 통해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올림픽 경기에서도 선해진 인간의 모습을 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많이 훈련을 받은 선수도 부패한 존재일 수밖에 없으며, 스포츠는 고스란히 그 모습을 보여준다. 스포츠 그 자체는 인간을 개량 할 수 없다. 오늘날 올림픽에 대해 읽고 듣는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오늘날의 올림픽 경기
올림픽이 처음 개최된 후부터 그 경기의 성격은 크게 변질되어 왔다. 오늘날 뚜렷이 정착된 특징 중 운동선수들의 프로화이다. 처음 쿠베르탱은 선수들이 아마추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그들은 주업으로서가 아니라 취미로 스포츠를 하는 자들이어야 했다. 사실 그 당시에 스포츠는 일상생활을 위해 일할 필요가 없는 부자만이 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모두 사람들이 스포츠를 여가선용으로 즐기는 만큼 일류선수들은 대부분을 프로화해 버렸다. 또 올림픽 경기의 참가자들은 특별한 훈련원에 오래 있으면서 특별훈련을 받는다. 정부는 그들의 훈련을 위해 예산을 짜고 막대한 재정을 투자한다. 그들이 국제스포츠 행사에서 승리한다면 큰상을 받고 연금도 받게 된다. 참된 아마추어가 거의 없어졌기 때문에 서울 올림픽에는 처음으로 프로테니스 선수가 참가하게 된다.
두 번째는 국수주의 표면화를 들 수 있다. 쿠베르탱의 계획은 불란서 청소년들이 다른 나라 선수들과 경기를 함으로써 자극을 받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는 이 기회를 취하여 자기 자신을 영화롭게 하려고 한다. 어떤 나라의 한 선수가 이기면 온 나라가 기뻐한다. 물론 그것이 잘못되었거나 탓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사실 국가는 올림픽에서 승리함으로써 자신의 우월을 증명하고자 한다. 한 나라의 승리자가 다른 나라보다 많다면 그 나라가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처럼 소련과 동독은 올림픽을 통해 공산주의가 다른 정치체제보다 더 나은 것임을 입증하려고 애쓴다. 반대로 미국은 자기 나라의 정치적 경제적 체제가 가장 좋은 것임을 많은 승리자를 통해 증거 하려고 한다. 또 보다 적은 나라들은 가능한 한 많은 승리자를 훈련시킴으로써 국위를 선양하려고 싶어 한다.
이처럼 올림픽 경기는 인간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나라를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올림픽의 문제점
올림픽 경기는 또 다른 문제를 안고 있다. 이 문제는 주로 대부분의 인류 스포츠가 갖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중 하나는 선수의 건강을 손상시키는 일이다. 선수들 중 호르몬을 사용하는 일은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예를 들어 체조선수들 중에는 성장을 막기 위해 약을 먹는 사람이 있다. 사람의 근육은 어렸을 때 유연하지만 어른이 되면 점차 굳어진다. 그 결과로 그들은 어렸을 때 할 수 있는 운동을 나중에는 더 이상 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여자 체조선수들에게서 그런 현상은 잘 나타난다. 올림픽 챔피언은 체조의 경우 15살의 아이들이 보통이다. 4년 후 다시 참여하면 그땐 문제가 달라진다. 잘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또 역도에서 남자들은 근육을 크게 하는 호르몬을 사용한다. 어떤 종목을 여자선수들은 보다도 더 강력한 근육을 갖기 위해 남성 호르몬을 복용한다고 한다. 이처럼 스포츠 때문에 몸은 만신창이가 되는 것이다.
또 어떤 종목에서는 이유가 좀 다른데 에서 건강에 위협을 받는다. 그런 스포츠는 그 목표가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그것은 특히 복싱에 해당되는 것이다. 복싱의 목표는 상대선수가 더 이상 싸울 수 없도록 그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심할 경우에는 잘못 맞아 죽기도 한다. 매년 복싱경기에서 이런 사고가 발생하고 있다. 또 많은 복싱선수들이 후에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일도 있다.
이런 스포츠의 세 번째 문제점은 주일성수이다. 다른 대부분의 스포츠처럼 올림픽도 일요일에 계속된다. 이 문제로 올림픽에 항의한 지는 오래되었다. 즉 1900년의 파리 올림픽에서 미국선수들은 주일날에 경기하지 않게 해 줄 것을 부탁했지만 진행자들은 듣지 않았다. 그때 미국 선수 중 몇 사람은 주일날 경기에 참여하지 않았고, 그 중 한 사람은 거의 확실한 금메달을 놓쳤다. 오늘날에는 주일날에 계속 경기하느냐 하는 문제가 더 이상 거론되지도 않고 있다. T. V. 때문에 올림픽은 주일을 가장 중요한 날로 삼는다.
결론
사람들이 누구나 운동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또 여러 선수들이 그들의 실력을 꾸준히 향상시키는 것을 볼 때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올림픽 경기의 이론과 실제는 기독교인의 참여문제를 놓고 볼 때에 대단히 곤혹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화란 개혁교회의 성도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올림픽 참가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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