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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분리와 일치에 대한 생각
최성림 2014-07-30 추천 1 댓글 0 조회 187

'소리나라' 이세령 목사님의 글입니다.

교회 분리와 일치에 대한 생각

주안에서!
저는 이곳에서 공부하는 동료와 함께 교회 일치와 분열에 대한 논의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배우고 얻은 결론의 긍정적인 면들이 많아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야기를 나눈 동료는 지금 저와 같은 학교에서 박사과정의 논문 마무리를 하는 바쁜 가운데 있습니다. 교회사 특히 종교개혁사, 그중에서도 부쩌와 칼빈에 대한 비교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으로 말미암는 로마교와 개신교의 분열, 그리고 그러한 와중에서 개혁가들이 생각한 교회 일치의 개념들에 대한 이해가 저의 교회 일치와 분열에 대한 생각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최근에 제가 저의 홈에 소리나라생각 난을 통해서 화란의 개혁교회 생활에 대한 글을 올리면서, 한국의 여러 목회자와 성도들이 화란 개혁교회 현실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고, 서로 교제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처지에서 분열되고, 온전치 못한 모습의 한국 장로교회의 현실에 대한 건강한 대안으로서 개혁교회를 소망하는 무리들이 많아짐을 느꼈습니다.

저는 이러한 현상을 놓고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과연 한국의 장로교회 전통이 화란식의 개혁교회를 토양으로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개혁교회의 이식과 토착화가 가능할 것인가라는 기본적인 질문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종합적인 구상속에서 실현 가능한 길을 찾아보려고 하지만 저의 기본적인 입장은 분리적 성격(성향?)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방향입니다. 이것은 이제부터 논의하려고 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두번째의 관심은 첫번째의 구체적인 내용으로서 직분개념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입니다. 개혁교회는 장로와 집사에게 안수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장로교회가 목사 뿐만 아니라 장로와 집사에게도 안수를 주는 전통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형식적으로는 목사와 장로와 집사의 동등임을 안수를 통해서 표현하지만 그러나 내용에 있어서 실제에 있어서 상하 관계의 관행을 가진 한국 장로교회 전통과, 반대로 형식은 목사에게만 안수하지만 내용과 실제에 있어서는 철저히 임기내에서는 동등하게 봉사하는 화란 개혁교회의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입니다. 사실 한국교회의 오늘의 현실에서 개혁교회상을 대안으로 내세울 때 드러나는 중요한 문제가 직분이기에 이것은 중요한 차별이 됩니다. 가족의 생계을 위한 직장과 장로와 집사직의 봉사를 평생하기에는 너무 힘이 들어서 임기제를 도입하는 화란의 개혁교회 전통과 어쩌면 평생할 수 있도록 정착된(?) 한국의 장로와 집사제도의 차이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의 문제가 생깁니다. 이러한 직분으로 표현되는 교회 정치와 질서의 차이는 수많은 교회 현상의 배후를 지배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유교 문화권을 비롯한 민족 정서를 반영하는 세속화, 물질주의, 개인주의 등으로 채색되는 분위기 속에서 교인들을 교회와 세상속에서 세워가는 중심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쉽게 개혁교회를 우리 교회 속에 이식하는 과정에 구조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여기에 세번째로 고려되는 문제가 이러한 개혁교회의 새로운 대안적 제시 속에서 충돌되는 현실을 어떻게 수용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분리와 일치라는 오늘의 주제에 접근하게 됩니다. 충돌은 진리를 구현하려는 충돌일 수도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자신이 지지하는 방식에 대한 절대성에 사로잡혀 한 쪽을 정죄하게 되어서, 감정적인 충돌로 발전될 가능성이 많이 존재하기에, 여기에는 양쪽 다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결과인 분열이라는 열매를 맺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개혁교회를 말하면서 우려하는 바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막연한 원리보다는 구체적 실상과 적용방식이 어떻게 그 사회와 성도들의 삶과 관계가 있는가를 보이면서 개혁교회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충돌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러한 충돌을 무서워하면 절대로 변화나 개혁을 지향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충돌을 해결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될 때 감정적인 소모전과 결국은 분리와 분열이라는 결과를 만들어 내게 됩니다. 한쪽은 짜르고, 한쪽은 짤리고, 한쪽은 정죄하고, 정죄당하고이러한 일이 생기지 않으면서 변화를 하는 것이 개혁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혁명과 다른 개혁의 의미는 여기에 있습니다. 화란의 개혁교회의 선조들이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 경각심을 가지고 말했던 부분도 개혁교회의 본류의 정신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서론이 길어졌지만 그러나 교회의 일치와 분리를 막연하게 시작하는 것보다는 어떤 관심에서 분리와 일치를 이해하는가의 배경을 분명히 함이 논의를 도울 것 같아 조금 설명을 했습니다. 분리의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는 역시 충돌입니다. 현실의 교회상에 대한 만족치 못하는 정도를 넘어서 심하게 말한다면 구제 불능의 상태라는 진단 속에, 무수한 노력을 다해서 교회의 변화를 애써 보았지만 오히려 문제아로 규정되는 상황 속에, 변화하기를 바라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해서 함께 얼굴을 맞대기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됩니다(제가 위에서부터 감정을 많이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현실입니다. 저는 심지어 학문의 세계에서도 어떤 관점을 가지는가에 감정의 요소가 많이 작용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즉 이런 영역에서 감정을 배제하는 것 자체가 전인격적인 살핌을 무시하게 된다는 고려이고 따라서 감정이 주된 요인이 되지 않는 균형과 원칙-성경-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면서 분리를 생각하게 되고, 새로운 교회를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노력을 하지 않고 새로운 교회를 이념적으로만 구상하고 출발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결과적으로 허무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개념은 우리의 방식이 절대적으로 아닙니다. 철저히 오늘이 우리의 현실을 안아보려는 노력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비관적 상황에서 분리가 고려되고, 혹은 분리되도록 내어버림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몇 가지의 질문을 하면서 분리의 정당함에 대한 숙고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미 분리된 수많은 교회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일의 근거를 어디에 둘 것인가? 등의 무수한 질문 군들이 생성됩니다. 먼저 오늘 토의에서 얻은 중요한 결론 중에 하나는 교회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누가 세우는가? 교회를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가? 혹은 이미 세워진 교회를 찾아가는가에 대한 논의였습니다. 주님이 이미 세워 놓으신 교회를 우리가 찾아가는 것이라는 결론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새로운 교회를 생각할 때에 깊이 고려할 부분이라는 공감입니다. 내가 우리가 교회를 세우는가 아니면 주님이 세우신 교회로 우리가 나아가는가 입니다. 역시 우리의 답은 후자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개혁교회적인 개념의 교회관 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나아가는 논의는 주님이 세우신 교회가 한 교회라면 어떻게 분리를 할 수 있는가라는 정당성의 문제가 생깁니다. 교회 역사에서 분리의 현실이 여러 번 있습니다. 종교개혁 이전에 동방과 서방 교회의 분리가 있었고, 그리고 분리는 아니지만 이단으로 정죄된 교회들도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으로 인해서 서방교회는 로마교와 개신교로의 분리를 하였고, 개신교는 이후 수많은 분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논의의 중심은 로마교와의 분리를 고려함에 있어서 루터의 일행은 로마교로부터 출교를 당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개신교가 시작될 수 있었던 출발입니다. 즉 분리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알듯이 루터가 95개 조를 항의한 것이 처음부터 분리를 목적으로 출발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인 교회의 잘못을 그야말로 항의한 것입니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출교로 이어지고 개신교의 태동으로 번져나갔습니다. 교회가 한쪽을 정죄하고 짤라 내었을 때 그 교회의 정당성이 부여되었다는 역사적인 교훈입니다. 이것은 항의를 거부한 교회가 성경의 권위에 비추어 잘못된 것을 인정치 않음으로 실제로는 루터를 정죄했지만 스스로 악을 옹호함으로 스스로를 정죄하는 결과를 가지고 무엇보다 교회를 분리하는 원인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교회의 분리를 이러한 방식으로만 가능하다는 결론입니다. 소위 짤리지 않고서는 분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분리를 선언하고 교회를 새롭게 한다는 것은 그 정당성을 얻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개척교회를 세운다는 것과 다른 내용입니다. 개척교회는 교회 설립을 허락하는 노회의 감독아래서 이루어 지기에 한 교회 내에서의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하는 현재의 문제는 한 교회의 지도와 감독을 배제한 채로 교회를 새롭게 시작한다는 역사적 선언의 정당성입니다.

이미 교회의 분리는 교회를 스스로 타락하고 온전치 못하다는 정죄를 당하는 상태이고 하나님의 심판의 상태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로마교가 루터의 일행을 정죄함으로 악을 옳다고 여기는 일을 한 것이고, 여기에 새로운 교회가 분리되어 탄생함으로 주님의 교회가 분리되는 하나님의 심판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분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상태라는 인식을 가져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남북 왕국이 분리된 경우를 비추어서 우리의 분리의 상태를 이해해 봅시다. 솔로몬의 타락과 르로보암의 계속된 정책은 10지파를 찢어서 여로보암에게 주면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것입니다.

그러나 양쪽의 국가의 중심은 여호와를 신앙하고, 약속의 땅에 대한 그리고 온 세상에 대한 복의 근원으로서의 한 언약에 서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북왕국이 먼저 철저하게 다른 길로 감으로 함께 할 수 없게 되고, 결국 역대기를 통해서 정통성을 잃어버리는 정죄를 당하게 됩니다. 다윗에게 주셨던 언약의 중심을 함께 나누기를 거부한 길로 갔습니다.

그러한 결과의 부정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로보암의 분리의 정당성을 볼 수 있습니다. 신적인 정당함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분리를 정치적으로 신앙적으로 다른 길을 감으로 유지하려는 방식에는 분리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고 마침내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상황으로 망하게 됩니다. 물론 여기 남왕국도 이러한 길을 따라가거나 더 심하게 감으로 망함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북왕국 여로보암에게 아히야 선지자가 약속했던 지속적인 왕권의 보장은 왕상11:38절에 내 종 다윗의 행함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 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 내가 이로 인하여 다윗의 자손을 괴롭게 할 터이나 영원히 하지는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이는 분리가 지속되는 근거와 의미를 말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다윗의 나라를 괴롭게 하려고, 즉 심판의 계속입니다. 분리가 심판이고, 그리고 타락한 유다를 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근거가 북 왕국 자신이 하나님의 법에 충실해야 한다는 전제아래에서 가능합니다.

여기서 오늘의 교회에 주는 교훈의 중심은 분리의 근거와 유지의 근거입니다. 정죄당하고 내어버림을 당하지 않고서 분리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단지 교회의 타락된 현실만을 가지고 분리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제기됩니다. 예배와 정치와 도덕적 삶의 타락이 심했던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자세는 오늘의 분리된 교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제 제가 속한 교단의 최근의 문제와 함께 논의를 더 이어보려고 합니다. 교단 설립자 중에 한분이신 고 한상동 목사님에 대한 평가에서 분리주의적 성향이 있음을 놓고 논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를 보는 시점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봅니다. 60년대 이후의 합동측과 합동을 했다가 환원하는 장면을 주도했다는 측면에서의 분리주의적 성향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논의는 여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다. 신사참배 가결이 있은 후 신사참배 결의를 거부하는 반대 운동을 함에 있어서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놓고서 논의가 진행되는 것입니다. 한상동 목사가 주기철 목사와 논의하는 과정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새로운 노회를 만들자는 안을 제시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목사의 거부로 인해서 이일이 성취되지 못하고 새로운 노회와 관계없는 조직적인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여기서 새로운 노회를 제안을 했다는 사실이 분리주의적 성향이라는 판단에 대한 문제입니다.

저의 입장은 신사참배 가결이라는 현실을 놓고서 반대 운동의 방향성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한 의견을 가지고 분리주의적 성향이라는 판단은 성급하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반대에도 무릅쓰고 찬성하는 이들과 함께 노회를 구성했다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논의 속에 얻어진 결론을 따라서 노회가 구성되지 않았는데 분리주의적 성향을 가졌다고 한다면 이것은 온전치 못한 추론이라는 것입니다. 결정과 구체적 구성에 이르지 못한 논의의 한 단면을 가지고 말한다면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완전주의적 교회관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도 옳지 않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해방이 되고서 교회로부터 제명을 당했을 때 즉 교회의 결정이 이루어졌을 때 이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이것은 분리주의적 성향이 아니고 분리를 당한 것입니다. 성향과 관계가 없는 수동적 결과입니다. 여기서 고신은 근거있는 출발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고신이 다른 교회들에게 주는 메시지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합동후 환원과 군사 정권시절에 가졌던 교회의 태도 등이 문제가 됩니다. 이것에서 분리적 성향 아니 그것을 넘어서서 적극적인 분리를 했음을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이러한 고신의 역사는 그 자손들인 우리에게 과제로 남습니다. 계속 분리된 교회로 있을 것인가? 그리고 여기서 더욱 분리되어 반고소 측과 계속 이러한 관계로 나아갈 것인가? 분리된 교회로 남아서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을 담당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존재할만큼 우리가 향후 세대에 역할을 했는지를 엄밀하게 반성하면서 방향을 가늠해야 합니다. 여기에 앞에서 언급한 합동후 환원과 군사정권 시절에 했던 행동에 대한 평가와 논의가 깊이 있게 시작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여기에서 나아가 우리가 이 고신교회를 부정하고 또 다시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는 분리를 어떻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제 중심에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 상처난 주님의 교회를 가슴에 싸매 안고 부지런히 개혁의 발걸음을 향해서 근거있게 노력해 봅시다. 그리고 나뉘어진 교회들과 하나되도록 실질적인 노력을 경주해 봅시다. 하나됨에는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것이 잃어버리고 낮아지는 복음적 정신의 구현입니다. 내가 손해보고, 잃어버리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은 직전에 교회의 하나됨을 위한 대제사장적인 기도를 요17장에서 하셨습니다. 잃어버림, 교회의 재산, 기득권, 명예, 모두를 잃어버리고 주님의 교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우리 교회도 다시 다른 교회들과 하나되는 일에 진취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과거의 불의를 기억하고 정리하면서도, 현재의 우리의 것과 권리, 기득권을 잃어버리고 그리스도의 하나된 몸을 이룰 수 있다면, 그리고 역사적인 구체적 모습으로 만들어 갈수 있다면 역사 속에 사는 우리의 충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한 형제와 나눈 나눔을 이렇게 정리하면서 끝을 맺으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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