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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8. 오후설교[성찬조별기도회]-부모가 자녀와 함께 예배드림
언약 2020-08-02 추천 0 댓글 0 조회 196
[성경본문] 신명기6:4-9 개역개정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01998(성찬모임) 6:4-9(,270)

부모와 자녀가 함께 예배드림

 

성도들이 자녀들을 품에 안고, 또 그 아이들의 손을 잡고 예배당에 들어서는 모습은 참 아름답다. 사실 한국교회에서 부모와 자녀가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는 일은 그리 익숙한 풍경은 아니다. 나 역시 나의 머리로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유아시절에 어머니의 품에 안겨 예배를 드렸을 것이라는 생각 외에 나와 우리 부모님이 함께 한 자리에서 예배를 드렸던 기억은 생소하다.

그런 내가 이제 예배인도자가 되어 강단에 선다. 지금 나의 앞에 아이들이 똘망똘망한 눈으로 (예배인도자인) 나를 본다. 그리고 말도 잘 못하면서 내 입모양을 보며 찬송을 따라한다. 부모의 손가락 따라 성경 읽는 시늉을 한다. 3, 4세가 되면 찬송소리는 더 커진다. 예배당 안에 카랑카랑 울려 퍼지는 아이들의 소리를 듣고 있으면,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 때 어른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던 것과 달리, 아이들은 예수님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며 찬송했던 모습이 생각난다(21:15-16). 유아실이 따로 있으나 부모들 중 유아실에 들어가서 예배에 참석하려는 이들은 없다. 오히려 대부분 앞자리로 오려고 한다. 아이들에게 예배를 드리는 자세를 가르치려고 그렇게 한단다. 이런 것들은 누가 가르친 것이 아니다. 부모들이 스스로 깨닫고, 그렇게 서로 지혜를 나눈다.

이 아름다운 모습은 어느 큰 교회도 감히 누리지 못하는 광경이다. 내가 감히 누리고 싶어도 맛보지 못했던 기쁨이다. 주님께 나아올 때에 자신만 아니라 자기의 자녀들을 주께서 품에 안아주시기를 바라며 나아왔던 그 부모들(10:13-16)의 마음을 우리는 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자신의 자녀들을 데리고 동일한 예배에 나아오는 것을 기쁨으로 여긴다.

 

우리교회는 부모와 자녀가 함께 예배를 드린다. 어린이예배가 따로 없다. 오전예배 후 점심을 먹고 나서 40여 분간 성경공부를 하는 것으로 모든 (주일학교)모임을 마친다. 오후에는 역시 어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린다. 믿는 가정의 자녀이든지, 불신가정의 자녀이든지 예외는 없다.

어떤 사람들은 왜 이 교회는 어린이 예배가 없느냐?”고 물을 수 있다. “목사님의 어려운 설교를 저 어린 아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 “어린 아이들에게는 좀 더 자유롭고, 간소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맞지 않느냐?”고 우려의 말을 할 것이다. 일리 있는 말이다. 곡조가 어려운 찬송과 긴 설교로 이루어지는 소위 어른예배는 아이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긴 시간일 수 있다.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성경역사와 교회역사 가운데 왜 믿음의 선진들이 이 좋은 방법, 곧 자녀들이 따로 예배드리고, 어린이들을 위한 특별한 설교를 하고, 아이들의 관심을 돋울 수 있는, 보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가미한 예배를 만들지 않았는가? 왜 아직도 많은 개혁주의교회들이 이 좋은 방법을 듣고 알고 있으면서도 시행하지 않고, 여전히 유아까지 포함한 온 가족들이 함께 언약의 교제에 나아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더 선호할까? 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우선, 부모와 자녀가 다 한 언약공동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녀들이 나기 전에 이미 부모와 한 언약 안으로 부르셨고, 한 동일한 언약의 표를 주셨다.(17:7-8, 2:39) 부모와 자녀가 한 예배를 통하여 한 말씀의 가르침을 받는다. 한 찬송을 부른다. 이것이 진정 한 말씀 안에 한 몸으로 세워진 언약공동체로서 교회의 예배이다. 아버지가 가정에 돌아와 아이에게 오늘 들은 설교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줄 수 있다. 아이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내용을 아버지에게 질문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한 교회성원으로서 아버지와 아들은 한 말씀을 이해한다. 아이가 선악을 분별할 수 있을 때까지 자라한 주의 상에 참여할 때까지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그 지혜와 키가 자라간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장성한 분량으로 더 자라간다.

또한, 창조주 하나님께서 어린아이들이 당신께 나오는 것을 금하지 말고, 용납하라고 하신다. 우리의 오장과 육부를 만드시고 눈과 귀와 입을 창조하신 분이 누구신가? 그분이 인생을 지으셨다면, 우리의 아이들도 그분이 창조하셨다. 그런데 지금 바로 그 우리의 귀를 창조하시고, 우리의 입술을 창조하신 그분이 이 어린 아기들이 언약의 교제에 나오는 것을 기뻐하시며, 그들을 안아 복주시며, 당신의 사랑을 전하기를 원하신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태교에 관심을 가진다. 조기교육의 열풍이 불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미 모태로부터 사람은 한 인격이며, 듣고 배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수태한지 6개월 되었을 때 예수님을 수태한 마리아가 자신에게 오자 주의 모친이... 문안하는 소리에 아이가 복중(腹中)에서 뛰놀았다고 증거 한다(1:41-44). 모세는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라는 3, 4년의 유아시절 동안의 가르침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택하신 아브라함의 후손, 히브리인임을 배운다(2:9-11/ , 7:21-22). 사무엘은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의 회막에서 섬겼고, 아이였을 때 희귀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삼상2:18,26,3:1). 예수님은 12세가 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은혜가운데서 지혜가 자라처음 성전에 올라가셨을 때는 성전의 선생들이 다 놀라 기이히 여길 만큼 자라셨다(2:40-52).

아버지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부가 낳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그 신부와 함께 보좌 앞으로 부르신다. 신부가 아기를 신랑의 품에 안겨줄 때 아버지는 아이가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해도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한다. 아이는 아버지의 언어를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아버지의 말속에서 사랑을 깨닫고, 가르침을 배운다. 아무도 감히 그리스도의 신부와 그리스도의 자녀가 함께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를 양육할 책임을 맡은 부모는, 또 교회의 부모들은 다만 그리스도의 자녀들을 아버지 하나님께 데리고 나아가며, 그분의 만져주심을 바라며, 그분의 말씀하심을 바라며, 그분의 복 주심을 기도할 뿐이다.

더불어, 어른들이 아이들보다 더 나은 믿음으로 예배의 자리에 나아온다고 자신할 수 없다. 물론 아이들은 지적인 능력이나 또 이해력에 있어서 어른들보다 나은 것이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어른들이 더 낫다고 할 수 없다. 어른이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깨닫는 계시의 정신(성령의 능력)이 더 뛰어나다고 자신할 수 없다.

어른과 아이의 이해력에 있어서도 그렇다. 어른이기 때문에 아이들보다 더 설교를 잘 듣고 이해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귀를 열어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나 아무리 미련한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귀를 여시고 마음을 열어주신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는다. 멜기세덱을 예로 들어보면, 아마도 성인 성도들 절반 이상이 멜기세덱에 대하여 많이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의외로 어린아이들이 더 잘 알 수도 있다. 설혹 알아듣지 못하면 어떠랴? 아기들이 아직 깨닫지 못하지만 이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부된 교회를 통하여 낳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다.

 

물론 아이들도 죄악 중에 잉태되었기에 예배 안에서 죄악된 본성이 그대로 드러날 때가 많다. 성경은 분명하게 아이들이 순진무구하지 않다고 말한다. 다윗은 시 51편에서 자신이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서 잉태하였나이다”(5)고 고백했고, ‘모든 사람이 모태에서부터 악에 거하며, 나면서부터 거짓을 말한다고 했다.(58:2-3)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순전하여 흠이 없다는 욥조차도 주께서 나로 나의 어렸을 때에 지은 죄를 받게 하셨다”(13:26)고 탄식했다.

아이들은 결코 순진무구하지 않다. 다만 그 죄악된 본성이 아직 선악을 분별하지 못함으로교활하지 않을 뿐이다. 젖먹이가 자기만족이 채워질 때까지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아주 어린 아기이지만 자기 고집을 피운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하는 아이가 젖먹이 동생에게 질투하여 해꼬지를 한다. 아주 귀엽고 순진하게 웃는 아이가 친구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빼앗으려고 싸운다.

예배의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본성상 죄악된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보다 자기 육신의 만족을 더 즐거워한다. 아이들이 예배의 자리를 피하려고 떼를 쓰거나 울 때가 있다. 부모들은 이 아이들에게 긴 시간이 힘들어서 그런가 생각하고 예배의 자리를 피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아이가 예배시간만 되면 울고 떼를 쓰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아이는 자신이 예배하지 않고 자신의 유익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예배의 자리를 피하는 순간, 이 아이에게 예배를 바르게 가르칠 수 있는(선악을 바르게 분별하는 지혜) 기회가 그 만큼 줄어든 것이다.

아이들은 처음엔 몰라서 나쁜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부모가 선악을 교정해 주면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가 자라가게 된다. 우리는 아이들이 한번 야단맞았던 일을 다시 할 때 어른들의 눈치를 보면서 한다는 사실을 본다. 이는 그 아이가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가 조금 더 자랐음을 의미한다.

참된 부모라면 아이가 스스로 선악을 구분하고,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양육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이 일은 부모와 자녀가 한 말씀을 듣고, 한 말씀 안에서 자라갈 때 가장 적절하다. 한 예배 가운데 자녀들에게 예배로 나아가는 태도를 보여주고, 한 말씀 안에서 그 말씀을 청종하는 삶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좋은 (신앙)교육이다. 교회직분자를 통해 함께 듣고 배운 말씀을 가정의 직분자인 부모가 자녀들에게 되새겨주고, 온 가족이 실천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라면 우리의 자녀들은 그리스도의 자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장성하면서 당신의 자녀답게, 즉 예수님을 닮아 가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말씀의 씨로 우리 자녀들을 낳으셨다. 그 아이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고,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며 살아가도록 양육할 어머니로서 사명이 우리 교회(4:26)에게 있다. 이 사명을 온전히 감당함에 있어서 부모와 자녀가 함께 아버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하는 것은 가장 우선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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