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대 불용(讚揚隊 不用)
최성림(예전에 쓴 글)
지난 해 모(母)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친구와 통화를 했다. 내가 교역자로 교회를 떠나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그리고 그 친구는 직장이 창원으로 정해지는 바람에 멀리 떨어지게 되었고, 근 15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뒤에 통화를 한 것이다. 연락처를 알 방법이 없었는데 아는 선배를 만나 어찌어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선배인 누나의 연락처를 알게 되고, 그렇게 연락처를 알아내어 전화를 한 것이다. 결혼을 해서 대전에 살고 있는데 대전에서 꽤 유명한 감리교회에 출석한다고 했다. “왜 감리교회를 출석하느냐?”고 질문을 하였는데 그 친구의 답이 무엇이었을까?
부산엔 가끔씩 내려 오냐고 하니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많이 뜸해졌지만, 누나와 형이 아직 부산에 살고 있기 때문에 명절 때는 꼭 내려간다고 했다. 부산에 내려오면 당연히 모교회인 온천교회로 출석할 것을 생각하고 부산에서는 어느 교회로 출석하냐고 하니 동래중앙교회를 출석한다고 했다.(형의 집은 만덕-불신자-이고, 누나의 집은 용호동이다)
처음 내려왔을 때 온천교회에 출석했다가, 그 다음엔 누나가 출석하는 고신측의 모(某)교회에 출석을 했지만 별로여서, 동래중앙교회를 한번 출석해 봤는데... 참 좋아서 그 이후로 계속 간다고 했다. 뭐가 그렇게 좋았느냐고 한 후 나의 마음은 무너져 버렸다. 그 교회의 성가대 찬양이 너무나 웅장하고 감동적이라는 것이다. 대전에 있는 교회 역시 성가대가 크고 웅장하며 그 장엄함이 좌중을 압도한다고 자랑을 했다.
1. 기존 예배에서 찬양대의 찬양은 동문서답이다.
대부분의 교회가 예배에서 설교 본문을 위한 성경 봉독이 끝난 후 찬양대(성가대)찬양을 한다. 그럼 성경봉독과 설교 사이에 찬양대가 찬양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직까지 그 이유를 명확하게 답하는 성도나 목사를 만난 적이 없다. 아무도 이유를 모르는 체 성가대 찬양을 한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며 문제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예배순서를 계시하시지는 않으신다. 그러나 예배의 정의, 예배의 개념, 예배의 원리와 그 성격은 계시되어있다. 그래서 각 교회들이 어떤 예배순서를 구성하든지 그 순서에는 분명한 의미와 목표가 있어야 한다. 또 누가 그 순서의 이유를 물으면,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의미가 없는 순서는 예배자에게 공허할 뿐이다. 그러나 성경봉독과 설교 사이에 찬양대의 찬양은 별다른 이유가 없어 보인다.
예배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맺은 약속을 확인하며 갱신하는 언약식이다. 이 언약의 예배는 하나님과 전체 회중 사이에 대화이며 교제이다. 그렇다면, 어찌하든지 성경봉독 후의 찬양은 하나님께서 말씀 주심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찬양대는 이 순서에 성경 봉독과 전혀 상관없는 자신들이 준비한 찬양을 드린다. 이것은 언약과 대화와 교제의 관점에서 볼 때, 동문서답하는 꼴이다. 우리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합당한 무엇을 기대하시는데, 우리는 그 하나님을 한쪽 옆으로 세우 놓고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꼴이다.
더욱 큰 문제는 오늘날 기존 교회의 찬양대는 예배를 장식하는 ‘악세사리’처럼 여겨진다. 찬양대가 있고, 노래를 잘 부르면 그 예배가 화려해지는 것 같고, 풍성해지는 느낌을 받지만, 찬양대가 없고, 혹 있다 하더라도 찬양대의 노래 실력이 형편없으면 모두가 실망하는 분위기다. 그래서 너도나도 실력 좋은 지휘자를 초빙하여, 좋은 찬양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물론 그 노력과 정성은 가상하지만, 여전히 찬양대의 순서에 대한 분명한 예배신학이 없다. 이 점에서 우리는 찬양대가 결코 예배의 분위기를 장식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님을 배워야 할 것이다. 예배의 시작에서 왜 찬양대가 송영을 해야 하는가? 왜 기도 후에 찬양대가 노래를 하는가? 또 예배의 마지막에 왜 찬양대가 송영을 하는가? 여기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면 찬양대의 역할은 그저 예배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2. 찬양대의 두 가지 문제점
어떤 목회자는 찬양대가 회중을 대표하여 찬양한다고 말한다. 또 어떤 이들은 ‘찬양대 찬송을 통해 회중이 은혜를 받는다’고 말한다. 이 말은 바른 표현일까? 그러나 둘 다 심각한 문제가 있다.
먼저 ‘찬양은 결코 은혜를 주거나 끼치는 방편이 아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속의 은덕들을 말한다. 즉 죄 용서와 의롭다 하심, 하나님의 자녀됨, 거룩하게 하심, 영화롭게 하심, 영생, 천국 등 이런 것들이다. 이 은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희생사역을 통하여 얻으신 것이며,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하여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이때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방편은 말씀과 성례이다. 반대로 찬양은 이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표하는 방편이다. 그러니 찬양을 통해서 은혜를 받았다거나 찬양을 통해서 은혜를 끼친다는 말은 찬양을 은혜의 방편으로 생각하는 심각한 잘못이다. 찬양은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 사람이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찬양대가 회중을 대표하여 찬양한다는 말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 어떤 찬양집회 인도자들은 예배 안에서 목사나 회중을 대표하여 예배를 인도하고, 기도하듯이, 찬양대도 회중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찬양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배에서 목사가 회중을 대표하는 것과 찬양대가 회중을 대표하는 것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사실 예배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섬기는 분은 언약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대제사장으로서 한편으로 하나님을 대신하시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를 대신하신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시기에 하나님께서는 예배인도자로서 목사를 통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그리스도의 사역을 대신하게 하신 것이다(성찬에서 집사와 장로의 역할도 그러하다). 목사가 성경을 읽을 때, 설교를 할 때, 손을 들어 복을 선포할 때, 이는 하나님을 섬기시는 그리스도의 일을 받는 것이다. 또 목사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 그것은 회중을 섬기는 그리스도의 일을 대신하는 것이다. 그러나 찬양대는 그렇지 않다. 즉 찬양대가 예배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을 대신하는 일을 할 필요가 없다.
3. 레위지파의 찬양대
찬양대가 처음 조직한 것은 다윗인데(대상23:1-6). 다윗은 당시 레위인 3만 8천 명 중 4천 명을 찬양대로 세워 그들을 24개 반열로 조직하여 봉사하게 했다. 곧 구약시대의 찬양대는 레위지파 중에서 선택되었다. 레위지파는 하나님께서 성전봉사를 위하여 택한 지파이며 이스라엘자손의 모든 초태생을 대신하는 자들이다(민8:16) 그러므로 레위지파는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성전에서 봉사하며, 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속죄하는 일을 맡은 사람이다.
그러나 신약 시대는 더 이상 성전도, 레위지파도 없다. 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구약의 성전제도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안에서 성취되었다. 전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또 대신하여 하나님께 헌신되어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지파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주는 그림자였다. 레위지파의 사역 역시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는 더 이상 건물 성전에서 봉사하는 특별한 지파가 없다. 도리어 모든 성도가 다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봉사하는 자가 되었다. 그래서 신약에는 찬양대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고, 다만 전 회중이 시편과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노래할 것을 명하고 있는 것이다(엡5:19, 골3:16).
그래서 개혁교회는 처음부터 찬양대(성가대)를 구성하지 않는다. 따라서 당연히 예배 중에 찬양대의 특별한 순서도 없다. 개혁교회가 찬양대를 조직하지 않는 이유 중에 하나는 중세 로마 교회 때문이다. 즉, 로마교회는 교황 그레고리안 때부터 그가 고안한 곡들만을 예배 때 부르도록 했는데, 처음에는 회중이 찬송을 부르다가 점점 사제들과 회중이 교송을 하다가 나중에는 사제들만이 찬송을 부르게 되었다. 중세의 찬송은 사제들로 구성된 성가대의 몫이었다. 결국 중세후기로 갈수록 회중이 예배에 참여하는 일은 모두 없어지고, 회중들은 라틴어로 진행되는 사제들의 미사행위를 구경하는 관람자로 전락하였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하나같이 예배에서 찬송 행위를 회중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데 동의했다. 예배 중에서 찬양은 어떤 특별한 사람들이 차지하는 행위가 아니라 전체 회중의 몫으로 돌려져야 하기에 루터파 교회를 제외한 다른 개혁교회들은 아예 성가대(찬양대)를 조직하는 것을 반대해 왔던 것이다.
4. 성경봉독 후의 찬양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자. 성경을 봉독한 후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곧 바로 설교를 들을까? 하나님께서 창조와 구속에 관한 복음의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 주셨다. 타락 이후 오랜 역사를 거치는 과정 속에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을 어떻게 구속하셨는지 그 애절한 사랑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냥 무관심한 채 지나칠 수 없다. 우리는 당연히 찬양을 드려야 할 것이다. 이 찬양은 앞의 두 찬송(개회, 감사 찬송)과 다르다. 이 찬양은 먼저 봉독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아멘”이요 다음에 선포되어질 설교가 우리에게 은혜와 축복이 되기를 기도하는 찬양이다. 참으로 우리는 이 찬양을 통하여 그 봉독된 말씀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에 대한 신앙고백을 한다. 또 이 말씀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임을 고백한다. 그래서 봉독된 그 말씀은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시는 말씀이 되도록 간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그렇게 행하신 구원의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의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여기에 가장 합당한 찬송은 시편이다. 시편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에 대한 찬송의 보고(寶庫)이다. 시편찬송은 가장 합당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의 표현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물론 다른 성경본문을 선택해 노래하는 것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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