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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이 말하는 진정한 기도란 무엇인가?(이승구)
언약 2016-03-12 추천 0 댓글 0 조회 1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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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이 말하는 진정한 기도란 무엇인가?(이승구)

 

 

 

칼빈이 말하는 진정한 기도란 무엇인가

이승구 교수 '기독교 고전 읽기' - 칼빈 <기독교 강요> 기도편

 

 

"늘 기도하며 힘을 잃지 않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든 기도가 원하는 대로 응답 받는 것보다 하나님과 대화하는 데 훨씬 더 많은 가치를 둘 것이다. 기도의 궁극적인 목표가 그것이다." -조지 맥도널드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의 형태와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가 '기도는 영적인 호흡이자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소중한 자신만의 좌석'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기도 자체에 혼란과 좌절을 맛본다. 예수가 가르친 기도와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도가 마치 다른 나라 얘기 같다.


예수 믿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믿기 전과 믿은 후는 전혀 다른 모습이어야 한다. 이승구 교수는 강의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구원'이나 '은혜' 그리고 '기도' 역시 예수를 믿기 전에는 전혀 상관없는 거지만 예수를 믿고 나서는 달라진다. 하지만 그건 내가 조정하여 내 안에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우리 내면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이는 '기도'와 '구원' 그리고 '은혜' 같은 측면은 우리 안에서 조정하고 움직여 하나님 뜻과 일치해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 영광이 외부에서 우리 마음으로 들어와 우리를 변화시키는 '외적인 은혜'라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 중 기도에 대한 해석이다.


기도를 해석하며 '신인협력주의'라는 좀 난해한 용어를 쓴다. 이는 기도를 "하나님이 베풀어야 할 은혜는 반드시 사람의 의지와 호응해 작용되어야 하는 성취"라고 주장하는 용어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은 천주교의 해석대로 처음에는 우리 안에서 스스로 무언가를 이루지 못하지만, 믿은 후에는 자신이 무언가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본다. 우리는 이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기독교 사상은 믿기 전이나 후나 우리 힘으로는 '구원'과 '은혜'가 시작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기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것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 후에 내려지는 단순한 '내리 사랑'과 같은 포상이자 선물이다.


이승구 교수는 "피조물들은 자연의 혜택을 받지만 그것이 주는 효과만 누릴 뿐 의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하면서 기도 자체에 그 어떤 의미 부여하기를 거부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또한 <기독교 강요>의 저자 칼빈은 "우리의 소망을 그분께 의존해야 한다"고 기도의 진실한 의미를 부여한다. 기도는 외부에서 다가오는, 그저 하나님께 의존하는 신앙의 요약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모범적인 삶에서 탄생한 기도하는 삶 자체를 누려야 한다.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이지 그저 달라고 요구하는 것, 즉 주문을 외워 무언가 이룩하고자 하는 획득은 결코 아니라고 말한다. 기도는 '인격체'로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추상적인 교제가 아닌 사람과 사람사이 인격적인 만남과 소통으로 생각하여 대화 속에서 피어나는 향기와 같은 기도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1.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하라


우리는 늘 '자신의 욕심'을 추구한다. 이는 기도에도 적용되는 필수적 요소이다. 기도의 특권을 남용하지 않기 위해 "자기 영광 위한 기도를 버리라"고 이승구 교수와 칼빈은 말한다. 자신의 간구만을 목적으로 기도하는 생각과 자세를 버려야 한다. 자기 문제만을 위해 밤낮 기도하는 일은 자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신 '자신의 문제만을 위한 기도'보다 자신의 내면에서 겸허한 자세를 취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여 대화하는 기도가 시급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기도가 바로 기도의 시작이다. 이러한 독특성이 있기에 다른 종교의 기도와는 전적으로 다른 양상을 띤다. 결국 기독교의 기도는 하나님 영광과 뜻을 위해서 노력하는 행위, 마음 그 자체이다.


2. 부족함에 대한 자각


기도는 많이 하면 할수록 좋다는 심리적 위안을 얻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있다. 중언부언하면서까지 장시간을 기도하고자 자신도 알지 못하는 '방언'을 읊조려가며 노력하는 땀을 보고 있자면 "기도를 많이 해서 스스로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흡족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행위"는 기도의 본질을 놓치고 있다고 한다. 말을 많이 한다고 기도를 더 많이 들어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기도를 안 하는 것은 더 시급한 문제이지만 하나님이 기도를 많이 한다고 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시간의 잣대를 들이대거나 기도의 결과로 선물을 받고자 하는 기도 역시 바라지 않는다.


우선 칼빈은 자신의 부족함을 일깨워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기도하고 그분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부족함을 완벽하게 알았던 종교개혁자 루터는 늘 그 문제로 하루에 4시간을 하나님과 씨름했다. 기도는 자신만을 위해 하는 것도 아니고, 장시간 기도하여 남에게 자랑하려는 '액세서리'도 아니다.


아래에서 문제 있는 기도 다섯 가지를 살펴보자.


첫 번째, 기도는 자기의 부족함을 알고 깨닫기 시작하는 의식에서 나와야 하지만 자신만의 기도에 의미를 부여해서는 결코 안 된다. 하나님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노력하려는 생각을 한다면 헛된 기도라고 이승구 교수는 주장한다.


두 번째, 유대인들의 외식하는 기도는 올바르지 않다. 유대인들은 사람에게 보이든 안보이든, 어디에 있든 반드시 매일 9시와 3시에 서서 두 손 들고 기도한다. 주로 회당과 큰 어귀에서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유대인들의 기도(마태복음 6:5)는 상(포상)을 받았지만 예수는 이들의 기도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세 번째, 몇 시간씩 자신의 만족과 안위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전혀 의미 없는 기도가 될 수 있다. 유대인들의 기도하는 마음에는 타인을 향한 매일 삶에서 하나님과의 대화를 이룩하기 위한 기도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것이 하나의 의미요 다른 하나는 그 기도로 인한 진정 자신만을 위한 기도로 변하여 퇴색되어 간다는 점이다.

기독교인들 역시 유대인들과 비슷한 양상을 띤다. 말을 많이 하면 들어줄 것 같은 심리적 보상을 노린다.(마태복음 6:7) 유대인들처럼 기독교인들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심지어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중언부언하는 기도로 시간을 때우기도 한다. '방언'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지적은 우리 같은 종교인들의 지적이 아니라 바로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지적임을 직시해야 한다. 심지어 예수는 그들의 기도를 본받지 말라는 말을 남기며 아무도 모르는 곳, 골방에서 은밀한 중에 보는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고 간구하라고 선포한다. 더욱이 그는 하나님 아버지는 은밀한 중에 사람의 마음을 보는 습성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마음의 상태에 따라 갚는다고 주장했다.


네 번째, 1568년 교황 비오 5세의 업적(?)을 일궈낸 <성무일과>라는 라틴교회 공적 기도처럼 공통된 기도의 형식대로 하는 기도는 문제다. 이는 기도하는 행위 자체를 더 높이 사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것과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한다. 기도가 마치 의무화 된다. 그러나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마음에 그 어떤 형식이 있다는 것은 기도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한다는 의미에 비춰볼 때, 진정한 의미를 퇴색한다. 이승구 교수는 "기도의 의식에는 '형식'과 '내용'이 함께 어울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보다는 예수를 의존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섯 번째, 기도에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사상을 제거해야 한다. 천주교의 기도는 마리아를 위한 기도, 성자들을 위한 기도 혹은 성자에게 부탁하는 기도, 세례명의 성인들이라고 말하는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수호성인'들에 대한 기도 등이 첨가되었다. 이는 천주교에서 말하는 죽은 '성인'에 대한 모독이 될 수가 있다. 살아있는 성인들을 위한 기도 즉 동역자와의 교류와 기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만을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진실한 목적을 상실한 결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만 기도해야 한다. 역시 죽은 자를 위한 기도는 기도의 순수성을 잃어버리는 심각한 오류에 빠지기 쉽다. 이는 살아있는 하나님을 다시 죽이는 일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다른 의미로는, 주문성을 가진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문구에서 그 자체가 갖는 효과가 있을 수 없다. 다만 예수를 향한 십자가의 공로를 통해 이룩하려는 의미가 들어 있는 기도가 진정한 기도다.


3. 우리가 붙잡아야 하는 '기도하는 마음'


첫째, 먼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둘째, 내가 기도했더라도 자신이 이룩한 생각을 지우고 기도가 '하나님의 약속'임을 생각해야 한다.


셋째,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찾고 구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내가 기도했기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길 바라며 끈을 놓치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기도하기 전 어디서든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처소처럼 그에게 우리의 기도를 의탁해야 한다.

구약에서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가 없었기에 기도에 제사적 의미를 부여하여 '성소' 혹은 '제사' 라는 예수의 보혈과 일맥상통한 상징적인 의미로서 기도가 행해졌다. 신약에 들어서는 구약에서부터 밝혀온 메시아 예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로 말미암아 기도 형태가 바뀌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치는 기도의 올바른 해석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다.

요한복음 14장 13절에서 "무엇을 구하든지"의 의미는 기도를 주문처럼 외우라는 게 아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할 때, 하나님 뜻과 부합되는 모든 것들에 해당되면 비로소 그 진가가 발휘된다는 뜻이다.

주문과 같은 신약의 기도가 이제 '언어의 미신' 같은 기도를 배제하고, 주문과 다른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구속사적인 감사에 더 치우쳐 기도하기를 하나님은 간절히 바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가르친 기도는 성 어거스틴이 말하는 진정한 기도로, 그가 칭찬한 밀라노 감독이자 설교가인 암부로스가 말하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입이시다. 그를 통해 아버지께 말한다"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마지막으로 칼빈이 말하는 기도는 '간구(solicitation)'와 '감사(thanksgiving)'하는 두 가지 태도를 수반한다. 간구는 하나님 뜻과 함께 우리 마음의 소원을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올리는 찬양 기도 후, 하나님 뜻을 필요로 하는 우리 욕구에 관한 것을 구하여야 한다. 감사는 기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 그리고 영광을 그분에게 돌려 드리는 마음의 기도다.


ACTS (기도의 네 가지 요소)
Adoration (흠모·예배): 하나님께 찬양.
Confession (고백·자백): 죄와 용서에 대한 자백과 삶의 고백.
Thanksgiving (감사): 신에 대한 감사
Solicitation (간구): 바라고 구함


Prayer is the wing where with the soul flies to heaven, and meditation the eye where with we see God. (기도란 천국을 향한 영혼의 비상들과 함께 하는 날개이며 하나님을 바라봐야 하는 눈의 묵상이다.) -Ambrose(암부로스,  A.D. 340~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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