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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관은 결코 양보할 수 없다(변종길 교수-꼭 읽어보세요)
최성림 2014-07-30 추천 0 댓글 0 조회 1082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인 변종길 교수님이

기독교보 20051022일자에 특별기고한 글입니다.

일반독자들이 읽어도 쉽게 이해할 만큼 잘 쓴 글입니다.

우리교회가 가진 성경해석과 연구의 원리가 무엇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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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방법론)


[
성경관은 결코 양보할 수 없다
]

- 변종길 교수


신학을 연구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 하나는 하나님이 주신 계시(啓示)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이성(理性)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성경에서 출발하는 신학은 전통적인 신학이고, 인간의 이성에서 출발하는 것은 자유주의 신학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을 연구하는 방법에도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고 접근하는 방법이요, 다른 하나는 인간의 작품으로 보고 접근하는 방법이다.


성경을 옛날 호머의 오딧세이나 일리아드처럼 하나의 고대 문학작품으로 접근하는 것이 비평적 연구방법이며
, 성경은 비록 인간의 손을 통해 주어졌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고 연구하는 것이 개혁주의적 연구방법이다. 따라서 개혁주의에서는 성경의 신적 요소가 강조되지만, 비평주의에서는 성경의 인간적 요소또는 역사적 요소가 강조된다. 그래서 비평주의에서는 성경의 인간 저자(2저자)인 모세, 바울, 요한 등이 강조되지만 전통적인 개혁주의에서는 그와 동시에 성경의 원저자(1저자) 되시는 하나님이 강조된다.


#
양식비평


성경의 인간적 요소를 강조하는 성경비평 방법에는 자료비평
(문서설), 양식비평, 편집비평이 있다. 이런 성경비평의 큰 문제점은 성경의 각 권을 통일된 책으로 보지 않고 여러 '단편들로 본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양식비평에서는 원래 구전(口傳)으로 각각 독립적으로 전수되어 내려오던 단편들이 여러 단계의 전승(傳承)을 거치면서 각색, 수정, 변경되어 각각의 책들에 정착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마가복음의 경우, 이 복음서가 책 형태로 기록되기 전에 각각의 조각들로 구전되어 내려오던 단편들이 있었는데, 이것이 여러 단계의 전승을 거치면서 최종적으로 기록된 문서 형태의 마가복음에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연구방법은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무엇보다도 성경의 통일성이 파괴되고 각각의 조각들
(단편들)로 분해되고 만다. 성경은 통일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각각의 단편들의 모음에 불과하게 된다. 성경은 각각의 전승 역사를 가진 파편들의 수집물에 불과하다.


둘째로
, 그렇게 되면 성경의 저자도 사라진다. 여러 단편들이 모여서 하나의 성경책이 되었다면 그 책의 저자란 기껏해야 하나의 편집자수집자에 지나지 않게 된다. 따라서 마태복음의 경우 마태가 썼다고 말할 수 없으며, 마태는 기껏해야 여러 문서들의 편집자에 불과하게 된다. 사실 대부분의 양식비평가들은 복음서는 그 책의 배후에 있던 교회공동체의 산물로 보기 때문에 성경의 저자라는 개념은 허공에 사라지고 만다.


셋째로
, 양식비평가들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서는 원래의 예수님의 말씀과 다르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원래의 복음이 많은 변경을 거쳤다고 보기 때문이다. 곧 각 교회공동체의 상황에 따라 많이 각색되고 수정, 변경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서는 원래 예수님의 말씀에서 많이 벗어난 채색된 내용이 되고 만다.


넷째로
, 그들은 성경 기록의 역사적 사실성을 훼손하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성경 기록자들은 역사에 관심이 없었고, 오직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즉 그들 교회가 처한 삶의 정황에 따라 첨가, 삭제, 변경했다고 본다. 그러면서 그들 교회공동체는 오직 신앙에만 관심이 있었고 역사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독자들을 미혹하는 속임수에 불과하다
. 우리의 신앙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 있다. 성경의 역사적 사실성이 무너지면 우리의 신앙도 무너지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역사가 무너져도 신앙은 유지할 수 있다면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양식비평가들의 주장은 고대 기록들을 무시한 현대 신학자들의 사변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은 고대 기록에 의하면 베드로의 대변인이었던 마가가 로마에서 베드로 설교를 듣고 기록한 것이라고 말한다
(Irenaeus, Eusebius ). 좀더 구체적으로는, 베드로가 로마의 기병대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이 일어나서 로마를 떠나고 없을 때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사람들이 마가에게 와서 베드로의 설교를 기록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그런 요청을 받고 마가가 그의 이름을 따른 복음서를 기록해 주었다고 한다(Clement of Alexandria, Hieronymus ).


이처럼 고대 교부들의 구체적이고 일치하는 증언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 성경 비평가들은 자기의 사변적 추론을 따라 마가저작설을 부인하고 마가복음은 각각 단편들의 모음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비평학자들의 주장은 기독교 신앙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맞지 않다. 이러한 현상은 마가복음뿐 아니라 다른 복음서들의 경우도 그러하며, 구약성경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
편집비평


편집비평은 양식비평의 전제를 그대로 이어받아 발전시킨 것이다
. 이것은 2차 세계대전 후에 주로 독일에서 발전된 방법론인데, 단편들이 어떤 전승과정을 통해 편집되었는가 하는 것보다 기록된 성경을 전체로서받아들이면서 저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편집했는가를 살핀다. 따라서 이들은 복음서 기자를 단순한 편집자라기보다는 신학자로 보며, 복음서를 신학으로 본다. 그래서 그들은 너무나 쉽사리 마태신학’, ‘요한신학’, ‘바울신학등을 이야기한다.


마치 각각의 고유한 신학이 있고 서로 다른 것처럼 말이다
. 이러한 신학의 형성에는 각 복음서의 배후에 있는 교회공동체의 삶의 정황이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보고, 이 삶의 정황에서 각 복음서를 이해하려고 한다. 이런 편집비평은 각 복음서 사이의 조그만 특징의 차이나 관점의 차이를 침소봉대하여 마치 신학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부풀리는 잘못을 범한다.


또한 각 복음서 기자의 기록 의도를
신학이라 부르며 복음서 기자를 신학자라 부르는 것도 문제이다. 뿐만 아니라 편집비평은 양식비평의 기본전제를 다 이어받기 때문에 양식비평의 문제점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래서 편집비평에 의하면 여전히 성경의 단일성, 통일성이 파괴되고 복음서의 역사적 사실성이 훼손되고 있다.



#
이미 죽은 시체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편집비평은 그래도 좀 온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 왜냐하면 편집비평은 성경을 전체로서보고 연구하는 방법을 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가 화란에 유학 갔을 때 지도교수에게 제일 먼저 이것에 대해 질문하였다. “교수님, 편집비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지도교수는 비유를 들어 도로 필자에게 물으셨다. “어떤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놓고서 그 토막들을 붙이면 다시 살아나겠느냐?” 그러자 필자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그는 이미 죽었습니다.”

그렇다. 편집비평이 비록 복음서를 전체로서’, ‘있는 그대로 두고서연구한다고 하지만, 복음서는 각각 다른 경로를 통해 전수되어온 단편들의 모음이라는 기본전제가 변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각 복음서를 여러
단편들의 모음으로 보는 견해의 문제점이 그대로 남는다. 이것은 구약의 모세오경 연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창세기를 각각의 구두전승의 모음으로 이해한다면 창세기의 저자가 모세라는 사실은 공중에 날아가 버리고 말며, 성경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마는 것이다.



#
신앙의 토대


신학방법론은 중요하다
.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성경관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성경을 한낱 인간의 작품으로 보고서 갈기갈기 찢어놓으면 다른 어떤 것으로도 보상할 수 없다. 우리의 신앙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이 무너지면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기초가 되는 근거를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객관적 진리의 기준인 성경이 무너지면 남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나 체험뿐이다. 그런 것들은 주관적이고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다.


경건주의자들은 성경 대신 인간의 체험을 중요시했다
. ‘내적 말씀이니 내적 빛이니 하면서 인간의 체험을 중요시하다가 점점 객관적인 기준이 되는 성경을 등한시하고 약화시켰다. 그 결과 경건주의는 얼마 가지 않아서 합리주의가 자라나는 토양이 되어버렸다. 18세기 이후 자유주의 신학은 대부분 경건주의자들에게서 나왔다. 개신교 최초의 체계적인 성경비평가인 제믈러는 경건주의 목사의 아들이었으며, 근대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슐라이어마허도 경건주의 목사의 아들이었다.


어떻게 양극단인 것처럼 보이는
경건주의합리주의가 서로 만날 수 있었을까? 그 답은 바로 성경관에 있다. 경건주의자들은 처음에는 올바른 성경관의 토대 위에 체험을 추구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성경을 무시하고 약화시켰다. 그래서 그 자녀들 세대에 가면 객관적인 기준인 성경은 별로 중요치 않고 오직 내적 체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그 결과 그들은 성경을 마음껏 비평하게 되었으며, 성경이 있던 자리에 인간의 이성이 대신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객관적인 토대인 성경이 무너지고 나면 우리의 신앙도 같이 무너지고 만다
. 성경비평가들은 처음에는 창세기 첫 3장이 진화론과 맞지 않다고 하여 신화또는 설화라고 하여 그 역사성을 부인하였다. 나아가서 창세기 1장에서 11장까지의 역사성을 부인하게 되고, 그 다음에는 구약 가운데서 초자연적인 이적이나 현대인의 사고에 맞지 않는 것은 잘라내게 되었다. 신약에서도 복음서의 기록 중 초자연적이거나 이적적인 것들과 부활기사는 신화라고 하여 잘라내었으며, 또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거나메시야라고 고백하는 부분들은 후대의 삽입이라고 하여 잘라내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남는 것은 현대인의 사고에 맞는 윤리적 예수, 인간 예수의 모습만 남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구원자 예수는 없어지고 그저 윤리적 모범으로서의 예수밖에 남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구원은 무너지고 우리의 신앙도 무너지고 만다.



#
여성 안수와 동성연애


성경이 무너지면 윤리도 무너진다
. 우리의 행위는 무엇을 따라 행해야 할 것인가? 그 규범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밖에 없다. 그런데 성경이 무너지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은 인간의 이성뿐이다. 그래서 자기 생각에 좋은 대로 행하게 된다. 이것을 자율주의라 부르는데, 객관적 기준인 성경이 무너지고 나면 우리의 윤리는 결국 자율주의로 갈 수밖에 없다.

이 자율주의의 바탕인 인간의 이성은 보편타당한 것이 아니라 시대의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시대의 조류를 따라 자꾸만 윤리의 기준도 변하게 된다.

우리는 그 대표적인 예를 여성안수동성연애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20세기 말에 와서 갑자기 무슨 새로운 진리를 발견한 것처럼 야단이지만, 사실은 그들의 이성이 변하고 그들의 성경관이 바뀐 것이다. 여성안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결국 성경에 칼질을 하고 만다.

왜냐하면 성경을 그냥 두고서는 여성안수를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곧 고린도전서
14:34-36의 말씀에 대해 현존하는 모든 사본들이 다 이 부분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위치가 다른 사본이 몇 개 있을 따름이다) 이 본문이 불안정하다고 주장하면서 이 본문의 효력을 제거해 버린다. 그러나 디모데전서 2:11,12에서는 아무런 사본상의 문제가 없다는 것이 드러나자 디모데전서는 후대의 기록이라고 주장한다.


, 사도 바울의 기록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해서 그들은 디모데전서 전체를 삭제해 버리고 만다. 이러한 사실은 현대신학자들이 시대 조류에 맞는 윤리를 끌어내기 위해 성경을 임의로 삭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우리는 여성을 폄하하거나 무시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
.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여성안수 문제가 성경관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성안수를 받아들이고 나면 대개 한 10년쯤 지나면 동성연애를 받아들이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여성안수와 동성연애는 별개의 문제이며 상당한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안수는 받아들이더라도 동성연애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 여성안수를 받아들이고 나면 그 다음에 동성연애를 받아들이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왜냐하면 그 배후에 있는 성경관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여성안수를 받아들이기 위해 채택한 성경관을 따르면 동성연애도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동성연애를 명백하게 금지하고 있는 로마서
1장의 말씀은 바울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주어진 것이라고 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 그 당시 로마 시대에는 해당되었지만 오늘날에는 해당되지 않는 말씀이라고 하면 되는 것이다. 실제로 화란의 신오달측 개혁교회는 1980년의 새로운 성경관 보고서에 의해 동성연애를 전면 허용하게 되었다(필자의 상관적 진리 개념과 동성연애”, [개혁신학과 교회] 13(2002), pp.52-65 참조).


이러한 사실은 성경관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다
. 성경관은 우리의 신앙과 윤리의 토대가 된다. 따라서 성경관이 잘못되면 우리의 신앙과 생활 전부가 무너지고 만다. 성경연구 방법론은 바로 이런 성경관을 결정짓는 것이다. 성경을 오류가 없는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오류가 있는 인간의 작품으로 보느냐 하는 것은 단지 연구방법론의 차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과 생명이 걸린 문제이다. 성경관이 잘못되면 우리의 윤리가 잘못될 뿐 아니라 우리의 구원도 위태롭게 된다.


천국이냐 지옥이냐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 따라서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성경관을 양보할 수 없다. 이것은 타협하거나 관용하거나 봐줄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른 모든 것을 다 잃는다 해도 성경관 만큼은 양보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우리의 구원과 생명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변종길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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