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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선택할 때 살펴보아야 할 바른 목회자상(죤 맥아더)
언약 2014-12-11 추천 0 댓글 0 조회 1245

*  몇주 전까지 본교회 장재혁성도님이 교회성도들이 참여하는 밴드에 올린 글로서 미국 Grace Community Church의 담임으로 40년을 목회하신 죤 맥아더 목사님의 강연 동영상 자막글을 타이핑한 것이라고 합니다.

* 제목 외에 단락을 나누고 소제목을 붙인 것은 편집자가 임의로 한 것입니다. 양해 바랍니다

교회를 선택할 때 살펴보아야 할 바른 목회자상(1)

여러분은 아마 제 나이쯤 되면 하고 싶은 일 모두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여러분께 진심어린 말 몇 마디를 하고 싶습니다.

저는 죄와의 영적 싸움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나이가 꽤 있기 때문에 그 점을 잘 알고 있죠.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도 알고 정하고 거룩한 마음과 하나님을 높이고 경외하는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도 압니다. 입술을 지켜 사납고 해로운 말, 빈정대고 고통스런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도 알고 그 싸움에서 지기도 하고 수년간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도 압니다. 인생에서 가장 친밀한 관계인 아내, 자녀, 가까운 사람과의 사이에서 경건함을 갖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실망을 안김으로 인해 느끼는 영혼의 아픔을 빈번히 비참한 맘으로 감내한다는 것의 의미도 압니다. 로마서 7장의 “내가 원하는 것은 행치 않고 원치 않는 것을 행함”의 삶이 무엇인지 알고 공공연한 죄와 은밀한 죄를 짓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압니다. 마땅히 해야할 바를 행치 않고 중요하고 필요한 바른 일을 내버려둔 채 하찮고 사소한 일들에 마음을 빼앗긴 죄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영적 싸움도 압니다. 저 또한 그런 싸움을 해왔고 그러한 싸움을 하는 사람들을 도울 만큼 오래 살았습니다. 저는 78살의 노인의 임종을 지키며 침상에 기대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천국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저를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난 포르노 그래픽을 이겨내지 못했어요” 세상에, 78살 노인이…. 결코 좋은 대답이 아닙니다. 20대 초반이나 할 소리를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죄와의 사투는 기나긴 싸움입니다.

주님과의 동행은 기쁨이며 삶에서 주의 손길을 느낌은 흥분되며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며 목소리 높여 이렇게 찬양하는 이유인데 “은혜의 삶을 사세요 우리가 누리는 이 은혜의 삶이요” 그것은 깊고 풍성한 큰 기쁨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현실인 내 안에 내재된 죄,세상,육과 마귀와의 전쟁이 있습니다. 여러분에 대한 제 근심의 마음은 여러분이 출석하는 교회와 출석하고자 하는 교회에 대한 것입니다. 제가 요즘 교회들의 상태에 많은 염려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거룩케 하는 목자에게 양육받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여러분이 홀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함께 모여 서로 사랑하며 선행을 증진하고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을 거룩케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기적으로 끊임없이 반드시 공급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목회를 희망하는 이 시대의 목회자들에게 그런 점을 찾기가 힘듭니다. 그 점을 알지도 못하죠. 어떤 분들은 불신자들을 즐겁게 해줘야한다고 생각하죠. 많은 분들이요. 다른 분들은 서있는 코미디언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구요. 목회자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재점검해 볼 필요가 있는데 잘못된 목회자를 만나면 아주 위험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거룩케 하는 목자에게서 양육받으셔야 합니다.

독립교회가 가진 위험성

요한일서 5장을 펴시죠 이 본문으로 말씀을 시작하겠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목회이론과 예들이 존재함을 아실 겁니다. 그중에 이상한 것 하나는 독립교회들의 확산입니다. 한편으로는 잘못된 교단의 구습을 끊어버린다는 좋은 점과 구원받았다는 말만 늘어놓는 대신 정죄에 대한 말씀을 전할 수 있으니까요. 그 점을 이해하고 왜 수많은 독립교회들이 존재하는지도 이해합니다.

독립교회의 폐단이 몇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독립교회 목사의 독단성입니다. 외부의 어떠한 통제 권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책임감있게 붙잡아 줄 수 있는 성숙하고 경건하고 연륜있는 분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유분방하게 돌아가는 기업환경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는데 목회에 적합하다 생각하는 이런 저런 일들을 하고 그 결과들은 다양성의 관점으로 이해하죠. 과거에 대한 경시와 전통에 대한 업신여김이 존재하죠. 교회는 난관에 봉착하고 그런 마음가짐으로 교회를 개척한 목회자는 갈 바를 잃고 방향감각을 상실하죠. 어떤 목회자를 원하는지부터 수많은 선택에서 교회의 사역들이 마비가 되고 말죠. 사람들 뿐만 아니라 목회 방식 까지도요.

아주 기본적 질문으로 되돌아 갈 필요성을 느끼는데 목회자란 어떠해야 하나요? 목회자의 소명은 무엇인가요?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벧전5:1) 베드로 사도는 동등한 수준에서 우월한 수준으로 옮겨갑니다. 베드로는 장로로서만이 아닌 사도로써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변화된 모습을 보았습니다.

2절에 보시면 내가 원하는 것이 이것이니 장로로서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일입니다.

목회자는 세상 문화를 위해서도 이웃의 변혁을 위해서도 도시의 변화와 기타의 것을 위해서 부름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간접적인 것일 뿐입니다. 목회자는 구속사역을 위해 택하신 백성을 위해 하나님의 양무리를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비유적으로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양무리를 갖고 계신데 제게 말씀하시길 “맥아더야 내 양무리를 돌보렴 양들을 잘 돌보는 것은 네 책임이란다.” 히브리서 13장 17절을 보면 하나님의 양무리를 돌봄에 있어 청산할 것이 있는 자처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성령의 은사를 입었고 교회에서 예비되어지고 훈련받았습니다. 위대한 목자이신 주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았고 한가지 사명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라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 주님께서 네게 맡긴 무리들요.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벧전5:4)

영원한 상급의 약속은 목회자가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는 충성도에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 여러 군데를 살펴볼 예정인데요 아주 분명한 말씀들인데요. 요즘은 그렇지 않은 것 같은 말씀들을 상기시켜 드릴텐데요.

사도행전 20장 28절에서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 밀레도로 온 에베소의 목회자들에게 말하길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위험을 감안하라는 말입니다. 양떼 돌봄의 책임이 목회자의 생명 안위와 직결된다는 것입니다.

“네가 네 자신과 네 가르침을 살피라”(딤전4:16) 말씀과 유사하죠. 자신의 삶을 경계하고 지키며 순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며 하나님의 양무리를 사수하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목회자로 부름받은 이유이며 성령께서 하나님의 양무리의 감독권을 맡기셨다는 말입니다. 맡은 양무리의 소중함을 아시겠습니까? 주의 보혈로 사신 무리라는 뜻입니다.

직무 중 하나는 양무리를 보호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사도행전 20장 29절에서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양무리를 돌봄에 있어 외부의 유해 영향으로부터 양떼를 보호하는 것도 목자의 임무입니다. 그들이 타도시의 목회자일수도 TV나 라디오 사역자일수도 기독교 서점에 책이 진열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목회자는 교인들을 타락케하는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반드시 지켜내야 하고 외부의 여러가지 유해한 파괴적 영향으로부터 교인들을 반드시 보호해야 합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내부에서 조차 그런 자들이 일어나는데 어그러짐의 무리가 교회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목자의 사명

1.양무리를 말씀으로 먹이는 것 2.양떼를 지키고 보호하는 것

사도행전 20장 31절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그 과정에서 바울은 말하길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돈 때문에 사역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같은 말을 합니다. “더러운 이들을 위하여 하지말고”(벧전5:2) 목회자는 양떼를 먹이고 감독하는 자요 목회자는 양무리를 지키고 보호하는 자입니다.

목회자가 지향해야 할 곳은 어디인가요? 에베소서 4장, 아주 친숙한 성경구절이죠 목회사역의 기초와 정의를 이해하는 관점에서요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엡4:11)

목회자는 어떤 일을 해야 하나요? 목회자의 의무는 무엇인가요?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2)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 성도를 성장시키는 것, 사역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4:13) 한 목회자의 사역 평가는 등록 교인수도, 출석 교인수도 아닌 교인들이 얼마나 그리스도를 닮은 성도들인가에 달린 것입니다. 그것이 단 하나의 평가 기준인 것입니다.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렀는가? 교인들을 그렇게 만들기 위한 단 하나의 연장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어떠한 사역을 막론하고 평가 기준은 교인들의 성숙도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목회자에게 맡겨주신 교인들에 대한 사역은 기나긴 여정의 일입니다. 평균적으로 목회자는 2년에서 2년 반동안 한 교회에서 목회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 목회자들의 교인들에게서 과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17장으로 가보죠. 이 단순하고 기본적인 목회자들의 책임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더 살펴보죠. 주 예수께서 목회자인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일까요? 주께서 보혈로 구속하신 교회를 향한 바램은 무엇일까요? 그에 대한 답은 요한복음 17장, 혹자가 말했듯 신약의 거룩함의 정수라고 불리는 장이죠.

12절은 예수께서 아버지께 간구하는 기도 내용의 시작입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예수님 자신을 일컫는 말이죠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제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17:12-15)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양무리를 위해 하나님께 구한 것을 아시겠나요? 악으로부터의 보호를 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마6:13)

위대한 목자, 목자장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영적으로 안전하기를 바라십니다. 자녀의 거룩함과 정결함을 원하십니다. 한마디로, 주님 닮기를 소망하십니다. 주께서 기도한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하였사옵나이다.”(요17:16)

여기에 그와 그의 자녀를 위한 주님 기도의 절정이 있습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이것이 주님의 명령입니다. 목회자는 큰 목자를 따르는 작은 목자이고 큰 목자의 바램은 그의 자녀들의 거룩케 됨입니다. 죄로부터의 분리, 사탄으로부터의 분리이며 곧 주의 말씀을 통해서 말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18-19)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전 인류를 통해서 오직 주 만이 그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으로 거룩해져야 합니다. 주님도 자신을 거룩케 하셨습니다. 그 말은 주께서 그의 완전함을 유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의 거룩하신 완전함을요. 우리를 거룩케 하시기 위해서요. 주께서 우리의 거룩케 됨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의 거룩케됨을 위해 일하셨습니다. 우리의 거룩케 됨을 위해 중보하셨습니다.

목회자의 책임과 관심

목회자로서 저는 지역사회도 세상 문화도 거리의 사람들도 저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들을 즐겁게 할 필요도 머리를 써서 그들을 끌어올 필요도 없습니다. 불신자들의 행복과 만족과 즐거움을 위해 교회를 재정립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저의 책임은 아주 단순한 것입니다. 위대한 목자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의 말씀을 통해 그의 양무리의 거룩케 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의 소명입니다. 하늘에서의 저의 상급이 크고 작음은 그 일에 대한 저의 충성심에 달렸습니다.

교회란 예배드리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예배의 정수는 순종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일날만 예배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예배드리는, 거룩케 되는 삶을 위해 힘씁니다. 끊임없는 순종 안에서 예배적 삶이 나타납니다.

예수께서 “내가 나를 거룩케 하오니” 무슨 의미일까요? 거룩케 됨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진리였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나는 오직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것을 행하고 그분이 보이신 것을 하며 아버지의 뜻을 이루나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합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것이 성화이며 그것이 우리의 지향점입니다. 언젠가 영광에 휩싸여 우리 역시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합한 삶을 살 것입니다. 아직 그날이 오진 않았지만 지금도 우리는 주님 닮은 순종을 향해 매진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릭이 말한 온갖 매체들이 쏟아내는 쓰레기들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서글픈 현실은 세상은 더욱 더 강력해지고 교회는 세상에 도망쳐 나오는 대신에 세상을 향해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세상과 최대한 똑같은 모습이 되어간다는 말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르기 위함이라지만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거룩함을 경시합니다. 교회의 의무와 책임인 그것을요.

야고보서 3장 1절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목회란 심각하고 두려운 사역입니다. 목회자 자신이 심판받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분명한 것에 다시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다시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를 더 알려드리면 성경은 믿는 자를 위해 쓰여진 책입니다. 놀라우신가요? 성경은 믿는 자를 위해 쓰여진 책입니다 아마 이런 생각해보신 적 없으시겠죠? 성경은 불신자들을 위해 쓰여진 책이 아닙니다.

자! 여러분의 교회가 불신자 초청잔치 같은 행사를 계획한다면 이런 말들을 하겠죠. “성경 강해를 할 수는 없어. 좋아하지도 듣고 싶지도 않아 할거야. 불신자들의 마음을 사려면 다른 뭔가를 그들이 원하는 스타일의 뭔가를 해야해. 그들 취향의 음악과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를 전해야해. 불신자들은 한시간 가량의 성경 강해를 들어본 적이 없을 테니까”

네! 그 말이 정답입니다. 성경은 믿는 자를 위해 쓰여진 책입니다. 성경은 거듭난 주의 자녀를 위해, 성경은 주님의 택한 백성과 구속된 자들,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중의 한 가지

여러분의 인생 중에 가장 중요한 결정들 중 하나는 믿고 따를 목회자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집이나 차를 구매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닌 여러분의 현재와 미래에 영향을 끼치는 중대한 결정입니다. 여러분의 영생과도 직결됨은 말할 것도 없구요.

왜 이 한가지의 결정이 이렇게 여러분 인생에 방대한 영향을 미칠까요? 목회자가 여러분의 영성을 책임지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는 관점과 해석 능력과 이해의 폭과 삶에서의 적용과 이 영원한 진리의 선포 형성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의 성경적 영적 우선 순위가 여러분에게도 흘러 스며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하나님과 성도들에 대한 사랑은 여러분 목회자의 그분들에 대한 사랑을 반영해 줍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목회자가 반드시 지녀야 할 성경적 관점의 영적, 실질적 자질을 살펴보았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은 성경이 믿는 자들을 위해 쓰여진 책이라는 생각에 힘을 실어주는 성경의 한부분입니다. 여러분도 친숙한 14절 말씀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하나님의 성령의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성경인데 그분이 저자입니다.

실제로 14절 중반부터의 말씀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그는 영적으로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로 2장의 끝을 맺습니다.(고전2:16)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성경을 말하는데 성경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생각을 정확하게 말해주는데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배우고 이해하는데, 영적인 우리는 영적으로 모든 것을 분별하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성경을 거부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찌해야 할까요? 교회가 불신자들을 만족시키는 것은 하나님 자녀들의 필요를 제하여 버리는 것인데 세상의 하수구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익사시키는 동안 그들의 목자들은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을 보십시오. 여러 성경구절들을 찾아보고 있지만 하나님 말씀보다 더 확실하고 좋은 것이 있나요? 아주 결정적입니다.

4복음서를 제 목회인생동안 많이 설교해 왔는데 저는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에서 40년 넘게 설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마태, 누가, 요한복음을 설교했고 현재는 마가복음을 하고 있습니다. 45년 목회중 25년을 복음서를 가지고 설교한 것이 됩니다. 전 복음서의 말씀들을 아주 좋아합니다.

4복음서를 설교하면서 깨달은 점 한 가지는 교인들은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never, never, never) 하나님께 반응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거듭나기 전까지는요. Amen!

예수님은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사이죠. 가장 위대한 설교자죠.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요7:46) 누군가가 불신자들과 올바른 목회를 할 수 있다면, 예수님은 가능하죠. 누군가가 문제의 현안이나 쟁점을 안다면, 끝내주죠! 심지어 예수는 “그는 누구의 이야기도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이죠. 누군가 사람들의 생각을 안다며, 예수께선 그러셨죠 주께선 사람들의 생각을 정확히 아셨죠. 그런데 예수께선 길을 알고 계셨지만 사역이 다 끝날 때 쯤엔 갈릴리지역에 몇 백명의 신자들과 예루살렘에 120명의 신자들이 있었을 뿐 온 백성이 일어나 예수를 처형했죠, 살해했죠.

여러분이 어떻게든 세상의 적대감을 잠재울만큼 능력있다고 생각한다면 예수께선 그렇게 하신 분이 아니셨죠. 예수는 비탄에 잠겨 죄악과 완악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어제 아침 마가복음 3장에 대해 설교했는데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막3:5) 요한복음 8장 43절에 있듯이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너희는 너의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그 진리에 서지 못하고”(44절) 영적으로 마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44절) “내가 진리로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45절)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46-47) 여러분, 성경을 불신자들에게 가르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딤후4:2) 이 말씀은 하나님의 양무리를 말씀으로 먹여 양떼를 거룩케하는 책임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럼 복음전파는요? 복음전도는 어쩌란 말이죠? 장담하지만 복음전도의 능력은 삶의 거룩한 변화에서 나오고 세상에서 그러한 삶을 살고 변화된 모습의 거룩한 이유의 선포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신뢰할 만한 입술에서 나올 때 이뤄집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를 거룩하게 만드는 단 하나의 필수적인 진리의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은 받아들여지고 믿어지고 적용되어지는데 여기서 예수가 말씀하신 것처럼 오직 참된 교회에서만요. 참된 교회 밖에서 진리는 노여움과 증오의 대상이 됩니다.

여러분들 이해를 도와드리죠.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에 왜 이런 적대감이 있는 걸까요? 왜 이런 강경하고 보편적인 반대가 있는 걸까요? 그에 대한 답은 비그리스도인들은 선천적으로 사탄처럼 기질적으로 거룩한 진리에 적대감을 갖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들을 하나님께 대적하는 자들이라 불렀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대적하는 자들이므로 성경을 대적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위격, 하나님의 뜻을 말이죠. 그들은 구약의 유대인들조차 하나님의 진리와 계시를 노여워하고 증오하고 거부하여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예수는 사역의 마지막에서 아주 놀라운 이야기를 하십니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인데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에 갔다가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을 얻으려 종들을 보내는 데 농부들이 종들을 때리고 능욕하여 되돌려 보내죠 그래서 주인은 자기 아들을 보내는 데 아들을 죽이죠(막12장)

이 비유는 선지자들과 메시야를 대하는 이스라엘의 태도입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손과 그들의 추종자들에게 모든 선지자들의 피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살육했다는 말인가요?

증오의 징후는 심지어 하나님의 계시를 수호하는 자들에게조차 나타납니다. 타락한 인간 마음속의 지배적, 압도적, 불가항적 죄악의 힘이 성경에 대해 비정상적이고 이상한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요8장45절의 놀라운 말씀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이 말씀은 뒤집어보면 “내가 거짓을 말하면 믿었으리라”는 말씀입니다.

불신자들이 가득한 성공적 교회를 원한다면 그들에게 거짓을 전하십시오. 하지만 그 교회는 목사가 진리를 선포함과 동시에 교인들이 목사를 강대상에서 끌어내리거나 교회를 떠날 것입니다. 꾸며진 말씀으로 선천적이며 죄악된 적대감을 물리치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들은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이며 눈 먼 자들인데 고린도후서 4장의 말씀처럼 세상의 신에 의해 이중으로 눈 먼 자들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생각과 사탄의 생각은 선천적으로 일치하죠.

하나님이 아니라요. 믿는 이들조차,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우리 안에 죄된 습성이 남아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여전히 일정부분의 타락성이 남아 아주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에 대한 지속적 적의로 표출됩니다.

목사가 설교하고 외쳐야 할 것

40년간 목사로서 제가 30년간 가르친 사람들이 큰 죄와 불법한 행위에 빠지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뭐가 잘못된 것일까요? 구원받는 자들 안에 남아있는 죄의 지속적인 현실이 여전히 성경에 대한 적개심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죄에 대해 계속해서 설교하고 교인들에게 높은 수준에 이르라 외치고 새로운 방식, 또다른 방식, 참신하고 색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동일한 교인들에게 40년동안 설교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사형선고나 다름없습니다. 지루해 죽겠네, 뭐 색다른 것 좀 하면 안되나? 교인들을 어떻게 설교에 집중하게 만들건가요? 매주, 매년, 수십년간 말이죠.

어떻게 성경말씀에 귀 기울이게 할건가요? 목회자는 성경이 보여주는 동일한 진리의 다양한 성경 구절들과 부분들의 장대한 다채로움에 접근해야 합니다. 모든 측면과 각도에서 성경에 접근해야 합니다. 성경이 그러하듯이요. 그리함으로 아주 잘 아는 것이라도 새롭게 제시되는 것입니다.

죄와의 사투는 끝이 없습니다. 해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요. 우리는 로마서 7장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19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24절) 내 죄에 몸서리가 쳐지는 도다. 때로 천국을 생각할 때면, 근래는 예전보다 더 많이 생각하는데 제 마음을 끄는…. 궁극적인 것들은 진주로 된 문들과 투명한 순금의 거리들과 네모 반듯한 정사각형의 새로운 예루살렘 성입니다. 또, 보석으로 된 주춧돌에 굴절되어 보좌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임재의 영광스런 완전한 나타나심도 보고 싶습니다. 정말 멋진 것 같거든요!

바울과도 긴 대화를 정말로 나누고 싶구요. 하나님과 일대일 대화를 나누는 줄보다는 바울 쪽이 더 짧을 것 같아서요. 물론 하나님과 일대일 대화를 나누고 싶구요. 천국이 진짜로 제게 가장 매력적인 점은 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래 살면 살수록 죄와의 싸움에서 더욱 더 지치게 됩니다. 자신의 죄 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죄와도 싸워야 하니까요. 목회자로서 짊어지고 가야하고 도와야 하는 일이죠.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목회자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매를 다섯번 맞고 세번 태장으로 맞고 파선하고 이러한 모든 육체적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고린도후서 11장 28절에 보시면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바울의 심정을 이해하고 저 또한 그런 삶을 살아왔습니다. 때로 사람들이 제게 말하길, “예전처럼 재밌는 사람이 아니야” 그렇겠죠! 삶이 예전만큼 재밌지만은 않으니까요. 목회생활을 오래하면서 쌓인 경험들은 그리 재밌지만은 않습니다.

여전히 제 유머감각이 살아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말합니다. 교회 사무에 짓눌린다는 말이 아닙니다. 목회자로서 양떼 돌봄의 열정을 말함입니다.

그 마음을 정의하길, ”누가 약하면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29절) 목회의 피로(疲勞), 목회하며 지치는 것은 교인들의 마음을 그리스도 닮음에 이르게 하는 것과 교인들의 온갖 실패들과 모든 연약함과 삶의 힘든 투쟁들을 다루는 것입니다.

가끔 저희 교인들에게 그 일들을 감당도 못하는데 그것들을 하느라 기진맥진 할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제 삶의 모두를 교인들이 하나님 같아짐에 힘쓸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거기에 못 미친다는 것도 알고 몇몇 분들은 불필요할만치 힘들지만요. 드릴 말씀은 여러분이 천국 가서 완벽해지면 전 여러분께 다가가 인사 건네지 않을텐데 완벽한 상태의 여러분을 못 알아 볼테니까요.

목회자의 역할이 나타내는 효력

바울의 근심은 교회였지 교회 행정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거룩함이었죠. 목회의 부정적 측면이 있습니다. 굉장히 부정적이죠. 저는 이 부정적인 면의 자각을 지니고 아주 오랜 세월 목회를 해왔습니다.

마태복음 18장 6절에 나와 있는데 이것을 끝으로 설교를 마치려 합니다. 준비한 것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를 했네요 적어놓은 건 다 못하고 말이죠.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아기들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아기들은 믿을 수 없죠. 아이 같은 순수한 믿음을 가진 자들을 말함이죠 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으니까요.

마태복음 18장의 명설교입니다. 종종 간과되는 마태복음의 말씀 중 하나인데 우리 주 예수께서 믿는 자들의 순수함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죠. 우리는 아이처럼 자신을 낮춰야 하고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죠. 어떠한 드림도 업적도 공로도 없이 말이죠.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마18:5)

목회자가 하나님께서 주신 양무리를 어떻게 대하느냐가 그리스도를 대함과 같은데 그가 모든 사람과 양으로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저와 제 양무리와의 관계는 저와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것이죠. 각 양을 어떻게 돌보느냐가 양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대하는 저의 태도라는 것이죠.

양들의 존재 이유는 목회자를 위하고 잘해 주려고가 아니라 목회자가 양들을 성장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죠. 그들 안의 그리스도가 영광받게 하고 그들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완전한 일치를 끌어내기 위함이죠. 이게 목회의 긍정적인 측면이죠.

부정적 측면은 6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목회자가 믿는 이의 발을 죄에 헛딛게 하는 원인이 되거나 거룩해지는 과정을 늦추는 빌미가 되거나 주가 아닌 다른 길로 돌아서게 만들거나 그들을 불의한 것이나 그 어떤 죄된 헛딛음으로 향하게만 해도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하나님이 제하여 버리신다는 말씀입니다.

목회자가 끔찍하고 고통스럽고 두렵게 물에 빠져 익사하는 편이 하나님의 양 한마리가 거룩해지는 것을 늦춤으로 받을 벌보다 낫다는 말입니다. 주의 자녀 한명이요.

스펄전 목사님은 말하길”엄숙히 명령하노니 결코 다른 이를 죄로 인도하지 말라. 홀로 죄를 범해도 나쁜 것이로되 함께 죄를 범하면 자신의 죄에 답한 것뿐 아니라 다른 이의 죄에 대해서도 그러한 것이다. 그 죄인으로 인해 죄가 배가된다. 사람들을 죄 가운데 빠지게 하는 목회자들을 알고 있는데 그들의 설교는 모호하고 암시적이고 풍자적인 것으로 가득해 신성모독만큼 나쁘다. 모든 성도들을 더럽힐 수 있기 때문이다.”

교인들을 거룩케 하는 목자는 육의 힘을 알고 그의 양들을 그것으로부터 보호합니다. 교인들을 거룩케 하는 목자는 세상의 힘을 알고 그의 양들을 그것으로부터 보호합니다. 교인들을 거룩케하는 목자는 사탄과 악의 힘을 알고 그의 양들을 그 세력으로부터 보호합니다. 교인들을 거룩케하는 목자는 그의 양무리의 삶을 세상과 육과 마귀로부터 튼튼히 하고 지키는 일에 인생을 바칩니다.

긍정적 측면은 교인들을 거룩케하는 목자는 성경의 진리의 힘을 알고 성령의 힘과 기도의 힘과 악에 대항하는 능력을 안다는 것입니다. 또한, 본을 보임의 힘을 압니다. 본보기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 양무리의 본이 되십시오. 양들이 목회자의 믿음을 본받을 수 있도록이요. 모든 사역의 목적은 양무리의 주님 닮음 입니다.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여러분을 거룩케하는 목자를 찾으십시오."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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