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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방문에 대한 반응 - 우리에겐 그리스도가 있다(기독교보)
최성림 2014-08-14 추천 0 댓글 0 조회 819
 
교황 방문에 대한 반응 우리에겐 그리스도가 있다
  
▲안재경 목사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번 주(8.14~18) 아시아 국가로서는 가장 먼저 한국을 방문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인기가 대단한 상황에서 그의 한국 방문은 커다란 화제 거리임이 분명하다. 한국천주교회만 교황의 방문에 들떠 있는 것이 아니라 정부조차도 교황의 방문에 한껏 고무된 듯하다. 교황은 전 세계 천주교인 10억 명을 대표하기에 한 나라를 대표하는 대통령보다 그 영향력이 크다는 것이 실감나는 상황이다. 교황의 한국 방문을 계기로 한국의 종교상황은 큰 변화를 겪을 것으로 보인다. 천주교 수장의 한국 방문으로 인해 대사회적인 영향력이 크게 실추된 한국기독교는 큰 타격을 입을 것 같다. 향후 20년 내에 신자수를 포함해 여러 가지 면에서 천주교가 기독교를 압도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오고 있다. 이렇게 천주교와 기독교를 세력의 관점에서 대립시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저속한 생각이겠지만 말이다.

 

한국천주교회는 교황의 방문으로 인해 새로운 영성, 새로운 복음화가 열릴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그럼 우리 기독교는 교황의 한국 방문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것이 좋을까? 차제에 교황제도의 문제점이며 천주교회의 이단성에 대해 대대적으로 알리는 계기로 삼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교황의 방문을 계기로 우리 기독교의 복음 이해를 새롭게 가다듬는 계기로 삼는 것이 좋을까? 우리의 반응이 어떠해야 할지는 꼭 집어서 말하지 않아도 자명할 것이다. 이에 한국천주교와 프란치스코 교황이 강조하고 있는 영성과 복음 이해, 그리고 천주교회 전체의 교회 쇄신과 세상평화를 위한 노력을 살펴보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순교적 영성 회복

 

이번에 교황이 한국을 방문하는 것은 한국에서 열리는 ‘제6회 아시아청년대회’에 참석해 미사를 집례 하는 것이 주목적이다. 하지만 초기 한국천주교회의 중요한 인물들 123명을 시복〔諡福, 복자로 추대하는 예식인데 시성(諡聖) 직전의 단계〕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한국에 처음으로 복음이 들어왔을 때에 조선은 쇄국정책을 쓰고 있었고, 천주교인들이 조상숭배를 거부하고 반상의 철폐를 주장하며 외국의 앞잡이가 됐다는 이유 등으로 인해 많은 순교자를 냈다. 1984년에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을 방문해 순교했던 한국천주교인 103위를 시성할 때 빠졌던 이들이 이번에 복자로 추대된다. 이 시복식은 서울의 광화문 광장에서 거행되는데, 광화문 광장이 선택된 이유는 그 인근이 천주교도들이 옥고를 치르고 순교했던 역사적 장소와 가깝기 때문이다. 한국천주교인들은 이 시복식을 흥분 가운데 기다리면서 ‘한국의 모든 순교성인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다. 한국천주교회는 교황 방문을 앞두고 한국의 천주 성지를 순례하면서 기도하는 운동을 제안하고 있다. 천주교회에서 이토록 순교자를 흠모하는 것은 그들을 성자로 떠받들어 그 공효를 받아야만 구원에 이를 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요즘 순교를 가장 많이 입에 담고 있는 종교는 이슬람이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유대교를 대항해, 그 외 중동지역에서는 기독교를 대항해 성전(聖戰)을 수행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많이 있다. 이슬람은 자신들이 유대교와 기독교에 의해 늘 핍박당하고 그들의 억압에 의해 가난에 시달린다고 믿고 있다. 이슬람에 의하면 거룩한 전쟁을 수행하다가 죽은 이들은 다 순교자가 된다. ‘교회는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진다’는 말도 있듯이 모든 종파들은 ‘순교자들의 영성이 자신들의 교회를 지탱한다’고 믿고 있다. 이렇게 순교를 찬양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 마지막 한 순간이 평생의 신앙생활의 모습을 담아낼 수 있을까?

 

‘지금도 해마다 1만 4000명 이상의 기독교인들이 순교하고 있다’는 통계도 있는데, 우리는 그런 순교를 부러워하면서 동시에 이용하려고 하지 않는가? 기독교인은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하는 순교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삶 속에서의 지난한 죽음이 없이 마지막 순간의 극적인 죽음을 기대하는 것은 종교적인 망상에 불과하다. 그리스도 외에 우리의 구원이 없다는 고백이야말로 순교의 밑자리이다. 현대 자본주의사회는 더더욱 이런 순교적인 삶을 요구하고 있다.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교회

 

프란치스코 교황이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그의 소탈한 성격과 더불어 로마교회의 보수적인 신학을 전복시키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가난한 교회’가 되자고 부르짖고 있다. 교황은 교황 권고문인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에서 소비주의와 개인주의를 강하게 질타한다. 교황은 시장과 금융 투기의 절대 자율성을 거부해야 하고,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포기해야 한다고 강하게 역설하고 있다. 교황의 이런 태도가 못마땅한 이들은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몰아가기도 한다. ‘교회가 가난한 이를 지원할 때는 천사란 말을 듣지만 가난의 원인을 물을 때는 빨갱이란 비난을 받는다’는 말은 익히 알려진 이야기이다. 교회는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자들과 하나라는 생각, 교회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돼야 한다는 주장은 지나친 것일까?

 

한국교회는 세계선교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가 없는 고속성장을 경험했다. ‘선교한국’이라는 표현처럼 한국교회는 2만 명이 넘는 선교사를 내보냈다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선교와 전도조차도 공격적인 마케팅처럼 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가 물량을 쏟아 붓는 것만큼 그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교회는 세상 속에 존재하기에 교회 안에 이미 세상의 물량주의가 들어와 있다. 교황의 지적 이전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나님과 맘몬을 더불어 섬길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도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라고 말했다. ‘교회의 전문분야는 가난’이라는 말과는 달리 교회는 너무 부유해져 있다. 한국기독교가 우리 민족의 가난과 고통을 끌어안고 우리 민족의 눈물을 닦아 줬던 것이 먼 과거의 추억이 돼가고 있다. 우리는 독거노인, 소년소녀가장, 비정규직, 청년실업의 문제를 외면하고 있지 않는가? 교회는 이제 더 이상 가난한 사람들이 발붙이기가 힘든 곳이 돼가지 않는가? 가난한 자가 구원받기에 합당하다는 말이 아니다. 교회는 부자든 가난한 자든 그리스도의 부요함을 누리지 못하고서는 영원히 가난한 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교회 쇄신과 세상의 평화 위한 노력

 

프란치스코 교황의 영향력으로 인해 천주교회는 대대적인 교회 쇄신과 세상의 평화를 위해 매진하고 있다. 교황은 마피아 가문을 파문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억압하고 고립시키고 있는 이스라엘을 질책한다. 교황은 성직주의와 성직자들의 도덕적인 해이를 강도 높게 질타하면서 ‘사제가 해야 할 일은 교인들과 젊은이들이 사회생활에서 정의와 형제애와 평화를 일구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교황은 우리가 성육신을 실제로 믿고, 구원의 완전성을 믿는다면 믿음을 내면화하지 말고 사회적 영성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올바른 믿음은 공공적 차원을 지닐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교황은 자기 보존을 위해 골몰하는 교회가 아니라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입고 더렵혀진’ 교회가 돼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인기를 얻기 위해 고도로 연출된 것일까?

 

유럽의 교회가 무너지게 된 것은 복음을 하나의 도덕으로 축소시키고 신앙생활을 사적인 영역에 국한시킨 것에 있었다. 우리는 복음을 환경문제, 이주노동자문제, 민족통일문제와 동일시하지 않으면서도 이런 문제들까지도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하겠다. 교회는 세상을 결코 떠날 수가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천주교회에서조차 교회는 항상 개혁돼야 한다고 주창하고 나섰다면 우리는 더더욱 ‘오직 성경’, ‘모든 성경’으로 교회와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하는 일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교회도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지만, 그럴수록 교회는 공교회(가톨릭)로 남아 있어야 한다. 로마천주교회가 가톨릭이 아니라 우리 기독교회야말로 가톨릭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공교회성은 사회적인 영향력을 재고하는 것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져온 우주적인 다스림과 회복을 끊임없이 상기하는 데에 있다.

 

 

그리스도께 새롭게 눈 돌릴 때

 

종교개혁자들은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봤다. 교황을 사탄의 꼭두각시로, 교회 타락의 원흉으로 본 것이다. 우리는 개혁의 후예들인데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방문을 기꺼이 축하할 수 있을까? 우리 한국교회는 교황의 한국 방문을 애써 무시하려고 하면서 동시에 질시와 부러움의 감정을 갖고 있지 않은지 모르겠다. 교황이 교회와 사회 개혁의 기수노릇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실감할 수가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교황과 같은 종교적인 영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조롱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한국천주교회가 자랑해 마지않는 순교자들의 영성, 교황이 추구하는 가난한 자들과의 연대, 그리고 교황에 힘입어 로마교회 전체가 추구하고 있는 교회 쇄신과 세상의 평화를 위한 노력 등에 대해 우리 기독교회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우리는 도덕이 교리를 대체하고 있는 모습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또한 전통과 경험의 조화가 오직 성경을 대체하고 있는 모습을 간파해야 하겠다.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께 새롭게 눈을 돌릴 때가 됐다. ‘총체적인 복음’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종교개혁자들처럼 오직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는 것에 달려 있다. 우리는 영웅적인 한 종교지도자의 영성에 기댄 교회가 아니라 우리의 유일한 직분자 예수 그리스도에 잇댄 교회가 돼야 하겠다. 한국교회가 다시금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Soli Deo Gloria) 돌릴 수 있기를 소망하자.

 

‘지금도 해마다 1만 4000명 이상의 기독교인들이 순교하고 있다’는 통계도 있는데, 우리는 그런 순교를 부러워하면서 동시에 이용하려고 하지 않는가? 기독교인은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하는 순교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삶 속에서의 지난한 죽음이 없이 마지막 순간의 극적인 죽음을 기대하는 것은 종교적인 망상에 불과하다. 그리스도 외에 우리의 구원이 없다는 고백이야말로 순교의 밑자리이다. 현대 자본주의사회는 더더욱 이런 순교적인 삶을 요구하고 있다.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교회

 

프란치스코 교황이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그의 소탈한 성격과 더불어 로마교회의 보수적인 신학을 전복시키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가난한 교회’가 되자고 부르짖고 있다. 교황은 교황 권고문인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에서 소비주의와 개인주의를 강하게 질타한다. 교황은 시장과 금융 투기의 절대 자율성을 거부해야 하고,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포기해야 한다고 강하게 역설하고 있다. 교황의 이런 태도가 못마땅한 이들은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몰아가기도 한다. ‘교회가 가난한 이를 지원할 때는 천사란 말을 듣지만 가난의 원인을 물을 때는 빨갱이란 비난을 받는다’는 말은 익히 알려진 이야기이다. 교회는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자들과 하나라는 생각, 교회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돼야 한다는 주장은 지나친 것일까?

 

한국교회는 세계선교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가 없는 고속성장을 경험했다. ‘선교한국’이라는 표현처럼 한국교회는 2만 명이 넘는 선교사를 내보냈다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선교와 전도조차도 공격적인 마케팅처럼 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가 물량을 쏟아 붓는 것만큼 그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교회는 세상 속에 존재하기에 교회 안에 이미 세상의 물량주의가 들어와 있다. 교황의 지적 이전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나님과 맘몬을 더불어 섬길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도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라고 말했다. ‘교회의 전문분야는 가난’이라는 말과는 달리 교회는 너무 부유해져 있다. 한국기독교가 우리 민족의 가난과 고통을 끌어안고 우리 민족의 눈물을 닦아 줬던 것이 먼 과거의 추억이 돼가고 있다. 우리는 독거노인, 소년소녀가장, 비정규직, 청년실업의 문제를 외면하고 있지 않는가? 교회는 이제 더 이상 가난한 사람들이 발붙이기가 힘든 곳이 돼가지 않는가? 가난한 자가 구원받기에 합당하다는 말이 아니다. 교회는 부자든 가난한 자든 그리스도의 부요함을 누리지 못하고서는 영원히 가난한 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교회 쇄신과 세상의 평화 위한 노력

 

프란치스코 교황의 영향력으로 인해 천주교회는 대대적인 교회 쇄신과 세상의 평화를 위해 매진하고 있다. 교황은 마피아 가문을 파문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억압하고 고립시키고 있는 이스라엘을 질책한다. 교황은 성직주의와 성직자들의 도덕적인 해이를 강도 높게 질타하면서 ‘사제가 해야 할 일은 교인들과 젊은이들이 사회생활에서 정의와 형제애와 평화를 일구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교황은 우리가 성육신을 실제로 믿고, 구원의 완전성을 믿는다면 믿음을 내면화하지 말고 사회적 영성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올바른 믿음은 공공적 차원을 지닐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교황은 자기 보존을 위해 골몰하는 교회가 아니라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입고 더렵혀진’ 교회가 돼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인기를 얻기 위해 고도로 연출된 것일까?

 

유럽의 교회가 무너지게 된 것은 복음을 하나의 도덕으로 축소시키고 신앙생활을 사적인 영역에 국한시킨 것에 있었다. 우리는 복음을 환경문제, 이주노동자문제, 민족통일문제와 동일시하지 않으면서도 이런 문제들까지도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하겠다. 교회는 세상을 결코 떠날 수가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천주교회에서조차 교회는 항상 개혁돼야 한다고 주창하고 나섰다면 우리는 더더욱 ‘오직 성경’, ‘모든 성경’으로 교회와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하는 일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교회도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지만, 그럴수록 교회는 공교회(가톨릭)로 남아 있어야 한다. 로마천주교회가 가톨릭이 아니라 우리 기독교회야말로 가톨릭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공교회성은 사회적인 영향력을 재고하는 것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져온 우주적인 다스림과 회복을 끊임없이 상기하는 데에 있다.

 

 

그리스도께 새롭게 눈 돌릴 때

 

종교개혁자들은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봤다. 교황을 사탄의 꼭두각시로, 교회 타락의 원흉으로 본 것이다. 우리는 개혁의 후예들인데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방문을 기꺼이 축하할 수 있을까? 우리 한국교회는 교황의 한국 방문을 애써 무시하려고 하면서 동시에 질시와 부러움의 감정을 갖고 있지 않은지 모르겠다. 교황이 교회와 사회 개혁의 기수노릇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실감할 수가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교황과 같은 종교적인 영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조롱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한국천주교회가 자랑해 마지않는 순교자들의 영성, 교황이 추구하는 가난한 자들과의 연대, 그리고 교황에 힘입어 로마교회 전체가 추구하고 있는 교회 쇄신과 세상의 평화를 위한 노력 등에 대해 우리 기독교회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우리는 도덕이 교리를 대체하고 있는 모습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또한 전통과 경험의 조화가 오직 성경을 대체하고 있는 모습을 간파해야 하겠다.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께 새롭게 눈을 돌릴 때가 됐다. ‘총체적인 복음’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종교개혁자들처럼 오직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는 것에 달려 있다. 우리는 영웅적인 한 종교지도자의 영성에 기댄 교회가 아니라 우리의 유일한 직분자 예수 그리스도에 잇댄 교회가 돼야 하겠다. 한국교회가 다시금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Soli Deo Gloria) 돌릴 수 있기를 소망하자.

 

안재경 목사 / 온생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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