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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방한을 통해 보는 가톨릭과 한국교회 (3 - 기독교보 2014.7.19)
최성림 2014-08-04 추천 0 댓글 0 조회 342
 
교황 방한을 통해 보는 가톨릭과 한국교회 (3)
교황 방문: 흐려진 복음진리를 선명하게 하는 기회
   
▲김재윤 교수

이번 교황의 방문을 바라보는 개신교회 성도들의 입장을 보여주는 키워드는 무관심, 우려, 호의 혹은 기대인 것 같다. 필자는 이번 교황의 방한을 무관심이 아니라 경각심을 갖고 살피되 성도수의 증감이라는 근시안적인 관심에서 접근하지 않았으면 한다. 한국 개신교회의 부족함을 비쳐보는 거울로 삼되 천주교회의 비복음적인 본질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복음진리를 더욱 분명히 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이를 위해 압축적이지만 교황 방한 때 이뤄질 몇 가지 일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한국 7대 종단 지도자들과의 만남

 

크게 주목받는 일정이 아니지만 교황은 방한 중 한국 7대 종단 지도자들과 만난다. 7대 종단은 천주교회를 포함해서 불교, 기독교, 원불교, 도교, 천도교, 민족종교협의회를 말한다. 왜 교황이 이들과 만나는가? 이는 단순한 친목모임이 아니다.

 

천주교회는 1962~1965년 사이에 제2차 바티칸공의회라는 중요한 회의를 가졌다. 이 회의에서는 이전의 천주교회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몇 가지 획기적인 변화와 개혁의 내용을 결정한다. 그 중에 하나가 기독교 안에서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개신교회를 일방적으로 저주했던 입장 대신에 (갈라진) ‘형제’로 명명했다. 거슬러 올라가 11세기에 이뤄졌던 그리스, 러시아 정교회 등을 포함하는 동방교회와의 분열에 대해서도 형제적인 사랑으로 품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같은 기독교 안에서 갈라진 형제들에 대한 일치를 강조할 뿐 아니라 힌두교, 불교와 같은 다른 일반종교들과 이슬람, 유대교에 대한 존중, 대화, 관심을 공식적으로 표명했다. 교황이 방한해서 한국의 7대 종단의 대표들을 만나는 것은 이런 천주교회의 일관된 목적 하에서 기획된 것이다.

 

그러나 천주교회가 말하는 기독교 내의 일치를 단순히 호의적으로 볼 수가 없는 다른 측면이 있다. “구원의 보편적 수단인, 그리스도의 가톨릭교회를 통해서만 구원 수단이 완전한 충만함에 이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앞장서는 한 사도단에 신약의 모든 보화를 맡기셨다고 우리는 믿는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서 중 교회의 일치를 다룬 교령의 결론에 등장하는 문장이다. 천주교회가 말하는 교회의 일치는 다른 모든 기독교회들이 굴복해서 가톨릭교회, 곧 천주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일치이다. 그리고 이 일치의 정점은 베드로가 앞장서는 한 사도단, 곧 교황이 돼야 함을 주장한다.

 

천주교회가 말하는 교회의 일치는 교회간의 상호 존중과 천주교회의 자기 겸손을 통해서가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종교 간의 존중과 대화도 마찬가지다.

 

여기에는 두 가지 면이 동시에 있다. 기독교뿐 아니라 유대교와 이슬람까지도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천주교회 아래 묶으려고 하는 정치적인 의도가 있다. 반면에 천주교회는 종교 간의 존중과 대화를 시도하면서 종교다원주의를 긍정하는 방향으로 필연적으로 나가게 될 것이다.

 

광화문 광장에서의 시복식과 여타 공개 미사들

교황 방한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가 서울의 심장부인 광화문 광장에서 이뤄지는 ‘시복식’이다. 시복식은 누구에겐가 특별한 옷을 수여하는 의식을 말하는데, 이 날 시복을 받게 되는 대상은 124명의 한국인 순교자들이다. 이들은 성인이 되기 전 단계인 ‘복자’로 인정되고 이를 시복식을 통해서 공식화하는 것이다.

 

이런 행사들은 아주 성스러운 의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천주교회를 매우 고상하고 초월적인 종교인 것처럼 포장한다. 개신교회가 예식에 있어서 이런 경건성과 성스러움을 일부 잃어버리고 심지어 외면적으로 빈약하고 천박하다는 평가까지 받고 있기에 이런 천주교회의 행사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매우 고결한 종교성을 느끼게 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우리가 분명히 지적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천주교회가 사용하는 ‘복자’와 ‘성인’과 같은 개념을 보자. 천주교회가 1992년에 발간한 가톨릭교회 교리서에 보면 기도에 대한 부분을 중요하게 다룬다. 많은 조건과 설명이 앞서 있긴 하지만 교리서에는 분명하게 애원과 찬양을 드리기 위해 천주의 성모님(마리아)께 즐겨 기도하는 것을 언급한다. 뿐만 아니라 성인들과 이미 죽은 증인들에게 교회와 이 세상을 전구(중보와 유사한 의미)해 주도록 기도할 수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기도를 받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한다. 드물지만 고린도후서 12장 8절에서 바울이 주께 세 번 기도했던 것처럼 성자 예수님께 직접 기도하는 예도 성경에는 나온다. 하나님 외에 어떤 존재도 기도를 받을 수 있는 존재는 없기 때문에 어떤 조건을 앞세운다고 하더라도 천주교회가 마리아와 성인들에게 기도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명백한 우상 숭배에 해당된다.

 

시복식과 같은 예식들은 단지 종교적 예식의 숭엄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종교개혁자들이 지적한 성인 숭배와 같은 악습들을 천주교회가 그대로 실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에 불과하다.

 

관련된 일정 중 한 가지가 유람선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을 위한 미사와 위로의 순서이다. 짐작컨대 이 자리에서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와 다양한 의식들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일들은 현상적으로 슬픔을 당한 가족들에게 위안을 줄 수도 있다.

 

세월호 사건을 통해 온 국민의 마음속에 내재된 슬픔을 감성적으로 어루만져주는 효과도 클 것이다. 그러나 이는 철저히 죽은 자들을 위한 의식들이다. 우리는 육체적인 죽음 후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의인과 지옥에 던짐을 받는 악인의 길 외에 중간적인 그 어떤 상태도 인정하지 않는다.

 

죽은 자들에 대한 기도나 연옥교리, 그리고 성인 숭배 같은 가르침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그리고 오직 그 분을 믿음으로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복음을 약화시키고 결국에는 복음이 아닌 것으로 이끄는 일종의 종교혼합주의의 미신적 행위라고 밖에 볼 수가 없다.

 

‘선교’와 ‘복음화’ 자체인 다양한 활동들

 

교황의 방한 일정에는 음성꽃동네 방문, 일제 강점기 위안부 할머니와의 만남, 한반도 평화를 위한 미사가 포함돼 있다. 이런 일정들은 단지 천주교회가 이미지를 좋게 보이기 위한 기술적인 몸짓이 아니라 ‘선교’, ‘복음화’에 대한 천주교회의 이해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프란치스코 교황은 서민적인 행보와 가난하고 아픈 자들과의 교감으로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저는 갇혀있으면서 자기만의 안전에 몰두하는 건강하지 못한 그런 교회보다는 오히려 상처를 입고 멍들고 먼지 묻은 교회를 더 좋아합니다.”

그가 교황이 된 후 처음 발표한 ‘복음의 기쁨’이라는 제목의 ‘사도권 권면’(Apostolic Exhortation, 교황권고 2013년 11월)에 등장하는 문구이다. ‘사도적 권면’(이하 권면) 초두에서 교황은 현재 세상의 가장 큰 위험은 소비지상주의에 의해서 만연돼 있는 자기만족적이면서 탐욕스런 심령에서 나온 고독감, 가벼운 쾌락을 무절제하게 추구하는 것, 무뎌진 양심이라고 진단한다.

 

우리의 내적인 삶이 자신만의 유익들과 관심에 사로잡히는 것이 세상의 가장 큰 위험이라고 규정하고, 그 결과로 다른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공간은 사라지게 되는 것을 가장 우려한다. 그리고 이제 ‘복음화’는 탐욕적인 편협함과 자기 몰두에서 벗어나서 다른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는데 있다고 본다.

 

천주교회가 가난한 자들과 사회를 위해서 행하는 여러 가지 활동들은 특별히 한국 개신교회에 뼈저린 도전을 던지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는 천주교회 이상의 희생으로 한국사회와 가난한 자들을 섬기고 있지만 이와 어긋나는 일련의 언행 때문에 때로 그것들이 가리어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주의 깊게 봐야 하는 것은 천주교회가 말하는 ‘복음화’, ‘선교’에 대한 이해이다. 이 부분은 깊이 다룰 수가 없지만 간단한 예만 소개하고자 한다. 앞서 소개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서에는 구원의 범위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단지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고, 그 분의 은혜에 감화를 받아 행위로 선한 의지를 표현하는 이들’과 ‘하나님에 대한 외적인 지식에 이르지 못했지만 은혜에 감사하면서 선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복음을 듣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교회’와의 신비한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받을 수가 있다.”

 

천주교회가 이해하는 ‘선교’는 복음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구원에 있어서 복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인가 라고 묻는다면 천주교회는 이에 대해서 매우 애매한 답을 내놓을 것 같다. 천주교회는 굳이 복음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선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구원이 있다고 보기에 이런 기준으로 구원을 보려는 사람들에게 호의를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가 행한 최고의 행위도 모두 불완전하고 죄로 오염돼 있고(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3문답), 그리스도가 없는 모든 존재는 철저한 죄인이기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는 복음의 초보적인 내용도 흐려져 있다. 반면에 인용된 공의회 문장에는 ‘교회’와의 신비한 관계라는 애매한 표현이 등장한다. 이는 천주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전통적인 입장에 전혀 변화가 없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천주교회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은 ‘선교’를 위한 통로가 아니라 ‘선교’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구원은 천주교회와의 신비한(?) 연합 곧, 천주교회와 그 기관이 시행하는 어떤 시혜 속에 있는 것 자체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천주교회의 다양한 선행과 가난한 자들에 대한 행동들 이면에는 복음과 구원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결여돼 있다.

 

 

복음의 잣대로 판단할 수 있어야

 

때로는 우리는 천주교회가 행하는 갱신과 개혁의 노력에 주목하고 민감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천주교회가 그 본질에 있어서는 종교개혁 시기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경각심을 갖고 살펴야 한다. 자칫 우리도 외형적인 것들만 좇다가 복음진리를 놓쳐버린 부분이 없는지, 천주교회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많은 개신교 성도들이 천주교회와 교황의 외형적인 모습에 호감을 가질 수가 있다. 그러나 막연한 호감이 아니라 복음이 아닌 것을 꿰뚫어 볼 수가 있는 복음진리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할 것이다.

 

김재윤 교수 /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이며, 관악교회 기관목사로 섬기고 있다.



기독교보 ksnews@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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